선택의 연속성에 주어진 의미들
7월 초입인데도 올해는 폭염과 열대야가 20일이나 빨리 찾아와 더위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오늘 아침은 모처럼 초가을 같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야외파라솔 아래에서 바람과 꽃들을 벗 삼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나는 얼마간의 휴식이 필요했다.
엄마를 간병하느라 나도 모르게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서울에 있는 딸 집에서 2주일가량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신 직전에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함께 하염없이 쏟아졌다.
엄마의 부재는 언젠가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순간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슬프지도 그립지도 않은 일상 속에 있었음에도 이유 없는 눈물이 속에서 차올라 흘러내렸다.
그때는 나 조차도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안 계신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아서일까.
50년 이상을 함께한 시간들이 마치 잠깐 만난 인연처럼 조금의 잔여물 없이 한순간에 비워져 내린 이 마음이 더 이상하기만 했다. 이럴 수도 있는 일인가?
그런데 이런 나의 행동이 없어지기까지는 일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알 수 없는 마음을 달래며 얼마 동안의 휴식하고 난 뒤 일상으로 돌아와 새로운 일을 선택하게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인생전반은 그림강사로 살았다면 인생후반전은 다른 삶을 한번 살아보고자 했다. 그래서 자격증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나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직업이 잘 맞을까' 하고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생각보다 많은 나이에 속했고 사회적 제한 또한 많았다.
한 달 동안 고심한 끝에 간호조무사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학원원장님과 상담 후 다음날 바로 간호공부에 돌입했다. 학원에서의 학과공부와 병원에서의 실습을 병행하며 1년을 공부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실습은 종합병원에서 5개월간 했다.
실습할 수 있는 병원으로는 한방병원, 요양병원, 종합병원 등 여러 곳이 있었으나, 우리 나이의 동기들은 모두 한방병원을 지원해 갔지만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열정에 호기롭게 환자들이 가장 많은 종합병원을 선택을 했다.
기존 규칙에 의하면 실습생들은 일반 검사실로 배치되어 기본적인 간호일을 배우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해에는 여러 간호학원에서 온 실습생들이 많아 처음으로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동으로 배치를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 실전간호를 많이 배웠다. 고생하시는 선생님들을 도와 봉사하는 마음으로 갔으나 내가 담당해야 할 그곳은 간호통합병동으로 쉴 틈도 없이 무척 바쁘게 돌아갔다.
간호통합병원은 입원한 환자들이 보호자 없이 간호조무사 선생님들이 모두 케어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보호자나 간병하시는분이 따라 없어 병실에서 벨이 울리면 무조건 달려가야 했다. 나도 간호선생님들을 따라 무얼 해야 하는지도 모른채 덩달아 달려갔다.
늦게 시작한 만큼 인생을 좀 더 산만큼 나이 어린 선생님들보다 더 열심히 도와야겠다는 각오로 잠시도 쉬지 않고 병실을 쫓아다녔다. 실습생들이 병동에 처음 배치가 되다 보니 담당 간호선생님들도 정해진 매뉴얼이 없어 그냥 따라다니며 배우라고만 했다.
그러다 보니 병실 어르신들의 대소변까지 같이 도왔으며 주어진 1시간의 점심시간도 교대로 움직이다 보니 점심식사만 하고 쉴틈도 없이 바로 일로 투입되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점점 지쳐갔고 하루18,000보를 걷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낸 3일째 되는 날이었다. 4인 병실에 계신 환자 어르신이 거친 숨을 쉬는 모습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선생님들께 병명을 물어보았다.
부종이 심한 환자라 그렇다는 말은 들었지만
왠지 숨소리가 임종을 앞둔사람의 호흡 (체인스토크 호흡)으로 느껴져 신경 써서 그 어르신을 살펴보게 되었다. 바쁜 일들을 처리하고 그 어르신에게 다시 가보았다. 힘겹게 몰아쉬던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했다.
이상한 마음에 가슴으로 다가가 호흡을 확인하는데 옆환자 어르신이 "조용히 있었는지가 조금 됐다"는 것이다.
그 말에 수간호선생님에게 급히 알렸고 바로 응급벨(코드블루)이 온 병동에 울렸다.
여러 명의 의사 선생님과 간호선생님들이 촌각을 다투며 달려와서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최초발견자가 나임을 알고는 병원에 소속된 선생님들은 잘했다며 모두 칭찬을 해주었지만 외부업체를 통해일하는 계약 간호조무사선생님들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생각했으면 본인들에게 왜 먼저 알리지 않았느냐”며 나의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외부업체를 통해 일을 하고 있는 간호조무사(DS) 선생님들은 응급상황을 발견했을 땐 본인들의 실적이 쌓여 일이 들어왔을 때 우선순위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귀한 생명을 앞에 두고 이해타산이 오가는 순간을 마주하고 보니 실망감이 앞섰다.
가족의 입장에선 살아계신 부모의 모습을 보며 마지막인사라도 할수 있게 해드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은 좀 하고 일에 임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개월의 실습과정은 병동에서 2개월, 중앙공급실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두 번째로 간 중앙공급실에는 책임간호선생님이 총괄을 하고 있었는데 간호과장님의 신임을 얻어 그 부서의 책임자로 있었으며 똑 부러지게 일도 잘하면서 깐깐하기로 병원 안에 소문이 나 있었다.
같이 일을 했던 선생님들이 그곳으로 배정이 되었다고 했더니 "어떡하냐" 며 걱정을 많이 했다. 그곳에는 장애인 선생님도 한 분 계셌는데 장애인을 고용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채용이 된 것 같았다.
중앙 공급실에는 여러 파트로 나누어져 있었고 첫 번째 방에는 각종 수술실에서 나온 사용품들을 정말멸균하는 멸균실이 있었고 중간방에는 여러 과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배치해 놓은 곳이라 선생님들이 항상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공간바로 뒤 방에는 자료실에서 산더미 같은 물품을 대형 카트기로 4~5번 싣고 와 1주일 분량의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첫날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실수 없이 해야 한다는 나름의 각오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 이틀은 시스템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시간별로 체크를 해서 벽에다 붙여놓고 해야 하는 일을 꼼꼼히 체크했다.
오전에 첫 번째 방에서 멸균이 되어 나오면 물건들을 정리하라고 “학생”하고 소리쳐 부르는 것이었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부모가 된 입장에서 오라고 불러서 달려가는 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배우러 왔다면 제대로 하자는 마음에 부르기 전에 미리 가서 도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며칠 관찰하고 보니 멸균이 다 되면 강하게 벨소리가 한번 울렸다. 내가 멀리 있기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오는 시간을 체크해 놓은 게 있기 때문에 그 시간쯤에 귀 기울여 들었다.
"띵~~ 동" 하는 벨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달려갔다.
그리고 고온에 뜨겁고 무거운 집기들을 옮길 때 선생님들이 팔에 화상을 많이 입기도 했다. 그래서 옷을 두껍게 입어야 했다. 내가 할 일을 아니었지만 옮기는 일도 같이 거들었다.
그리고는 여러 병동으로 보내는 물품들을 모두 분류작업해 정해놓은 자리에 가져다 놓고 나면 중간방에도 모든 병동으로 가져갈 필요한 물품들을 날짜별로 종류별로 배치해 놓아야 한다.
정리하고 내 자리로 돌아오면 그날에 사용할 또 다른 갖가지 종류의 물품들이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필요에 맞게 개수를 맞춰놓아야 하기도 하고 화상에 필요한 거즈를 접고 치료에 필요한 붕대를 Y자 모양으로 잘라 만들어 포장하고 큰 솜 작은 솜을 개수에 맞게 포장한 다음 멸균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 산적해 있었다. 일을 보고 느긋이 있는 성격이 못되어 천천히 해도 되는 것들도 최대한 빨리 포장해서 멸균실로 보낸다.
박스에 포장해서 보낼 때는 아무렇게 보내지 않는다.
두 손가지 않게 동선은 최대한 짧게, 최대한 줄을 세워 일을 할 때 수월하도록 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일의 동선을 생각하면서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항상 신경을 써며 일을 했다.
어느 날 아침에 내가 출근을 할 때쯤 중간방의 간호선생님이 오전일을 처리해 놓고 직원들과 오전 다과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으며 그 모습을 보면서 '서로 간의 신뢰를 가지고 서로가 맡은 일을 잘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 역시 내 일을 잘 해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날이기도 했다.
실습첫날 이후 간호선생님들이 "학생" 하며 나를 부르는 일은 두 번 다시없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동선을 익혔다. 위치를 익히기 위해 폰으로 물품이 들어가야 한 곳을 일일이 찍어 익혔다.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일은 주도적으로 해야 일이 덜 힘들고 수월하며 빠른 일처리를 할 수 있다.
직원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동선을 다 알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 익히고 나니 내일처럼 수월해졌고 덕분에 바쁜 선생님들을 도와줄 여유도 생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간호선생님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친근감이 묻어 있었다. 간호선생님들이 바빠 자리에 없을 때는 혼자서 산더미 같은 물품을 받아와 창고에 일일이 제자리에 찾아 정리 정돈해 놓았다. 담당자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미안해했다.
그리고는 수시로 내 자리로 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위를 맴돌며 친근감을 표현해 주었다.
일도 일이지만 간호선생님들의 단합된 모습이 보기 좋아 가끔은 티타임 때 간식을 챙겨주기도 했기에 아마도 조금의 마음을 열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내 행동이 진심임을 알았는지 그다음부터는 티타임을 같이 하자며 나를 불렀다. 이전까지는 실습생이 직원들과 한자리에 있는 일도 없었고 직원들과 대화하는 것조차도 까다롭게 굴었다.
급이 다르다는 것을 주입시키는 듯 실습생들과의 거리에 경계를 확실히 했다. 그런 곳이 나의 노력에 답을 보내주어 간호선생님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었고 나이가 제일 많았기에 나를 언니처럼 편안하게 대해 주려고 했다.
직원과 실습생이라는 위치에서 좋은 감정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마음 언저리에서 교차하는 감정을 보았다.
형식에 얽매여 솔직하지 못한 감정을 흘려야 하는 그 감정들조차도 이해했다.
힘든 일을 서로 도와가며 하다 보니 좋은 마음도 조금씩 쌓여갔다.
어느 날부턴가 실습날짜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도 선생님들마다 찾아와서 “언제 까지 하냐” 며 자꾸만 아쉬운 마음을 비쳤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아~~ 내가 여기서 도움이 되고 있구나 ‘하고. 그러면서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실습생이라는 신분에도 열심히 한 결과 지금까지 거쳐간 실습생 중에서 가장 일을 잘했다는 칭찬을 들으며 병원에서 5개월간의 실습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울산에서 치른 국가시험에 합격을 해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앞으로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치열하게 공부할 일이 있을까?' 하고.
사람일이란 살아봐야 안다고 하더니 내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또 한 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런 시간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 이후에도 배움은 연속했다. 연달아 요양보호사, 컴퓨터 자격증. 노인두뇌훈련지도사(치매예방지도사), 노인미술심리치료사, 등 연관된 자격증을 취득했다. 늦깎이 배움은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다 엄마의 대장암이 발병해 간호를 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간호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면 무지상태에서 엄마를 케어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무척 컷을 것이다. 힘들게 배운 병동에서의 실습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수술 후 간호함에도 당황하거나 어려움 없이 엄마를 돌볼 수 있었다. 평생을 순하고 조용한 딸이라고만 여기며 제대로의 내 성격을 잘 몰랐던 엄마는 모든 일들을 도맡아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전혀 다른 모습에 많이 놀랐다고 하셨다. 엄마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놀랐다고 했다.
지금껏 친정에서 큰 일들은 언니들이 도맡아 했었고 그저 언니들의 결정에 따라가야 하는 나는 내 모습을 드러낼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가 너무나 힘들어하시고 돌봐드릴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생각에 그 무게를 어깨에 메고 나니 내 일이 되었고 엄마를 편하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가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내 모든 힘을 다 쏟아부었다. 나의 존재를 잊을 만큼.
지금은 그동안 해온 일들에 대한 믿음 속에 가족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엄마와의 이별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쯤 남편이 퇴직을 해 고향으로 내려와 완전히 터를 잡았다.
고향에서 인생후반전을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여러 곳 면접을 봤다.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회에 나가 현실에 부딪혀 보면 그 말이 사실은 무색할 수밖에 없다. 용기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들 나이 경력 안 본다고 해놓고 막상 면접에서 갖은 이유를 다 대며 탈락시킨다.
시골은 도시처럼 그렇게 까다롭지가 않다. 도시보다 시골은 생각보다 일자리가 많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은 다 도시로 가서 생활하기 때문에 인원이 부족했고 돌봐야 하는 노인들은 많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출근을 하게 되었다. 일에 대한 기대와 나 스스로의 대한 조금의 의구심을 가진채 시골에 내려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공동생활가정'이라는 곳으로 요양원에 속하며 9명만 입소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젊은 나이임에도 치매가 있는 어르신 몇 분과 조현병을 가진 50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와상(누워서 생활하는) 환자.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까지 그렇게 생활하고 계셨다.
반이상이 기초수급자였다. 그러다 보니 모든 약값, 병원진료비, 정기검진비등은 전부 무료였다.
늦은 나이에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처음 들어간 곳이었기에 기초수급자분들에 주어지는 혜택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의욕만 넘쳐 호기롭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요양원은 집에서 25분 거리에 있는 그다지 깊지 않은 곳에 있어 출근하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고향의 또 다른 동네로 이름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근처에 사과밭 복숭아밭 감나무밭 밤나무 등 많은 과실수가 있어 친근한 느낌도 들었고 주위에 수목이 우거져 공기도 좋으며 새소리 풀벌레소리가 늘 끊이지 않아 자연을 벗 삼아 어르신들이 계시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은 지 오래되어 낡은 느낌이 많았지만 마당도 넓고 아늑한 면도 있었다.
원장은 한분이었지만 상호가 각각 다른 두 군데의 센터가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그중 한 곳에 간호를 전담하게 되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전체어르신이 나와 쉬는 넓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베드가 놓인 방이 4개에 조리실이 있었으며 성격 이 털털하고 직원들을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 원장님 아래 야간담당하시는 요양보호사님 3분과 출퇴근하시는 주간요양보호사님 한분, 조리사님 한분, 간호선생님까지 일곱 사람이 로테이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간호일은 처음이라 걱정도 앞섰지만 일단 부딪쳐 보자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면접 볼 때도 오로지 어르신들한테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것만은 자신이 있었다.
첫날 선배간호선생님을 따라 몇 개의 방을 라운딩 하면서 어르신들의 소개를 받으며 인사를 드리자 치매어르신들이라서 그런지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다.
어르신들의 특징과 좋아하는 말들, 행동들, 기분에 따라 가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일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한 주의사항을 들으며 호실과 어르신이름을 하나씩 익혀나갔다.
나이 들어 나약해진 어르신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 분 한 분 눈 맞춤인 인사를 하면서 어르신들을 잘 보살펴 드려야겠다는 애정 어린 마음이 생겼다.
나의 하루일과는 정해진 시간보다 30분 일찍 출근해 밤새 있었던 어르신들 건강상태나 인지행동에 대한 경과를 듣고 요양선생님들에 대한 당부나 조리실에 오더를 넣기도 하며 어르신들의 케어에 만반의 준비를 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오전근무가 시작이 되는데 먼저 바이탈체크를 하고 어르신들의 신체에 대한 변화를 감지해 그에 맞는 예방간호를 한다.
주중에 하루는 어르신들이 목욕하는 날이다. 그날은 모두가 바쁜 날이다.
걸을 수 있는 어르신은 조금만 보조해 주면 혼자서 목욕을 할 수 있지만 와상어르신이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은 베드에 몸을 눕혀 목욕을 시킨다.
치매어르신들은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발버둥 치며 꼬집고 때리고 욕설이 난무한다. 그 와중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몸을 제어해 가며 목욕을 시켜야 했다.
어르신들 목욕 중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가 많이 났다. 아무 일이 없는 날은 그나마 운수대통한 날이 된다.
깨끗이 씻고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오면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은 감기 걸리지 않게 드라이로 머리부터 빨리 말려드리고 유분기라고는 없는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한 발톱과 손톱이 물에 불려져 부드러워져 있을 때 정리해 드린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느끼신다. 본인들이 조금은 멋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기분도 한껏 고조되었음을 말투와 표정에서 읽곤 한다. 개운함 몸과 마음으로 이른 점심식사를 하시고 각자 자유시간을 갖는다.
그사이에 나는 지루하지 않게 퍼즐이나 동화책이나 놀잇감을 가져다 놓고 놀 수 있도록 해 드린다.
원하시면 휠체어에 태워 밖으로 산책도 잠시 나갔다 온다.
인지가 있는 몇 분은 화투놀이도 즐겨하신다. 패와 계산이 하나도 맞지 않지만 어르신들은 나름대로 고심하며 아무 말이나 막 던지며 돌아오지 않는 대답도 중요하지 않다. 순간순간의 느낌만으로 행동하신다. 소소한 말과눈빛에도 오해를 해 갑자기 욕설이 오가며 폭력도 행사한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르신은 힘과 고집이 대단하다. 제어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면 어르신들 모두 거실에 나와 오후 프로그램을 매일 한 가지씩 한다.
낚시놀이, 풍선배구놀이, 장구놀이, 춤추기, 탁구공 옮기기, 색깔별로 콩 고르기, 달력 만들기, 등 어르신들의 기억력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한다.
어르신들과 생활을 하다 안 사실은 생각보다 가족들이 자주 오지 않았다.
시간이 되지 않아 못 오는 경우가 있겠지만 부모나 가족을 보러 온다 해도 그다지 애정이 없고 의무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어쩌면 서글픈 세상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서 더 어르신들에게 애정을 담아 살펴드렸다.
그 마음을 아는지 얼굴이 낯설지가 않을 때쯤 나를 보며 초점 잃은 눈빛으로 “이쁘다 이쁘다”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미소를 지어주셨다.
어르신들은 오래된 요양선생님들보다 손길에 따뜻함이 배어있는 나를 더 좋아해 주셨고 어르신들의 귀엽고 사랑스러움은 내가 그곳을 나올 때 까지도 계속되었다. 어설픈 초보신입에서 시작해 선생님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하지만 개선해야 할 부분들도 많이 보였다.
제일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가장 힘든 일이며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숭고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막중한 책임과 어르신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함께 고생하는 동료들에 대한 배려 없는 이기심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동고동락하는 동료를 위해 작은 배려조차 하지 않는 모습들이 너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첫날 어르신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적잖이 놀랬다. 첫째로 따듯한 말투가 전혀 없었다.
어르신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의 인성에 실망을 했다. 어르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아이들을 혼내며 놀리는듯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어르신들에게 더 깍듯이 대했다.
그동안 어르신들에게 함부로 해온 관행처럼 스스럼없이 심한 장난치며 서로 웃어가며 내 눈치를 볼 때 나는 웃지 않았다. 잘못된 행동들이었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휘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고 센터 안은 내 책임이었기에 요양선생님들의 어떠한 행동에도 같이 동조하지 않았고 분위기를 좀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르신들을 욕을 하며 겁을 주듯 혼을 내고 있었다. 고된 자신들의 분풀이 대상인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나의 노력이라 할 수는 없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어르신들에게 화를 내거나 함부로 하는 모습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르신들과 웃는 일이 많아졌다. 요양선생님들 대부분의 나이가 60을 넘다 보니 자기의 고집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독불장군이었다.
타협과 조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수를 해놓고도 당당하게 큰소리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한 가지 배울 점은 일을 잘하는 몇 분이 계셨다.
일을 잘하는 선생님은 확실히 달랐다. 모든 일을 스스로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트러블이 많았다. 잘하든 못하든 자기 스타일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다.
자기 일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서툴렀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불신만 생겨 순조롭게 흘러가는 게 없었고 그 반면 나는 일이 익숙해지다 보니 자꾸만 일들이 눈에 보여 내가 하는 일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래서 요양선생님들끼리의 문제도 많이 발생했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조금 손해 본다고 지는 것이 아닌데 이기고자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을 보면서 삶의 대한 회의감 마저 들었다.
요즘은 사람관계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남에게는 쉽게 말하면서 자신은 듣기 싫고 이런 이중성을 가진 채로 사회라는 곳에서 전문가인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소위 봉사정신을 가지고 일해야 하는 곳인데 봉사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어르신들을 보면서 죄송스러움에 마음이 참 착잡했다.
엄밀히 말하면 어르신들 덕분에 일하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에도 너로 인해 내가 고생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깨달음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또 다른 성장을 하고 있을 즈음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곳에서의 일을 마무리했다.
어떤 일에서든 배움은 큰 것 같다. 일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내가 서고자 하는 자리가 내 자리이며, 내 자리로 만드는 답 또한 나에게 있다는 것을.
그래서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게 없을 것 같다는 진리도 얻었다.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정보도 교환한다. 그렇게 배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과 사람을 대하느냐에 따라 삶이 만들어지고 그 시간들이 채워진다고 믿는다.
아마도 내가 아무도 믿지 않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도 좋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어느 곳에서든 좋은 사람을 얻고 싶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