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가르침

by 복사꽃향기

하루는 뒷집 아저씨가 집에 있던 돈이 없어졌다며 앞집인 우리 집을 향해 담장너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집 아들이 가져간 것 같다"며 아들이 도둑질해 갔다고 엄마한테 무자기로 따졌다.

옆집아저씨의 목소리는 남들과 다르게 무척 높고 쨍쨍거리며 날카로운 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고 있던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는 너무 화가 나서 동생을 끌고 와서는 큰소리로 다그쳤다. 자초지종을 물어보지도 않고 옆집 아저씨말만 믿고는 “왜 남의 돈을 가져갔느냐”면서 "돈을 빨리 내놓아라"라고 무조건 윽박지르며 아들을 도둑 취급을 했다. 놀란 동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네가 가져간 게 맞냐?”며 얼어있는 동생을 계속 다그쳤다. 동생은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엄마가 애들을 그렇게 다그치면 놀라서 말을 못 한다면서 동생을 조용히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찬찬히 물었다. "혼을 안 낼 테니 솔직하게 말해라"며 “혹시 네가 가져온 게 맞느냐”라고 했더니 동생이 가져왔다고 했다. 그 돈을 가져와 보라고 하니까 숨겨놓은 곳에서 찾아 가지고 왔다. 동생이 또래 친구가 있는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아무 생각 없이 돈을 가져온 모양이다. 결국 동생을 데리고 가서 까다롭고 별난 뒷집아저씨한테 사과하고 돈을 돌려주고 돌아왔다.


그 시대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는 흔히 있는 행동이었다. 항상 부족한 게 많은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엄마는 그런 행동과 마음을 알아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잘못을 해도 엄마는 우리들에게 혼을 잘 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을 해도 마음이 편한 구석도 많았다. 혼을 낸다 해도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안타까움이 반이상인 꾸중을 듣기 때문이다. 어려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사실 혼을 내도 혼이 나는 게 아니었다. 엄마는 천성적으로 따스하고 한 없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그 마음을 이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또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엄마는 말로 우리를 가르친 적은 없는 것 같다. 항상 일하느라 바빠 자식들을 훈육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들었던 잔소리의 말들만 생각이 난다. 동네어르신들 보면 인사 잘해라, 사람들한테 욕 안 먹게 항상 바르게 행동해라. 공부 열심히 해라,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라. 일찍 일어나라. 늘 좋은 말만 했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그다지 본보기는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스로의 행동도 모범이 되지 못했기에 그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래도 부모랍시고 평생 자식들에게 잔소리했다.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의 훈육은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 더 엇나갈 수도 있음을 아버지는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아무도 아버지처럼 고집스러운 자식은 없었다. 아마도 엄마의 다정다감하고 따스한 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싸움이 늘 일상이긴 했지만 가끔 심하게 다투고 난 후 억울함과 허탈감에 억장이 무너져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열심히 살아 뭐 하겠노!”하시며 그동안 모아논 종이돈을 방바닥에 전부 뿌려놓고는 “이렇게 살 바에는 돈이 뭔 소용이냐" 며 "먹고 싶은 거라도 실컷 먹어라”며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돈을 주워 손에 쥐어주었다.

어리고 철이 없었던 우리들은 그동안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없었던 맛있는 과자를 사 먹게 되자 못이 박힌 엄마가슴에 대못을 박는 소리를 해댔다. "엄마 아버지 자주 싸웠으면 좋겠다"라고,..

그 소리에 기가 찬 엄마는 철없는 자식들의 순수한 본심에 그저 헛웃음만 지었다.

시간이 흘러 예쁜 첫째 딸이 국민학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없는 돈에 큰맘 먹고 처음으로 빨간 운동화 한 켤레는 사주었다. 그 예쁜 신발을 학교에 신고 갔다가 누가 신고 갔는지 그날 바로 잃어버리고 왔다.

엄마는 당장 학교로 달려가 누가 가져갔는지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속상해서 울고 있는 딸에게 열심히 돈 모아 다음에 꼭 더 예쁜 신발을 사주겠노라고 약속하며 달래주었다. 속상함으로 말하자면 엄마가 더 했을 것이다.

없는 형편에 고생만 시킨 딸의 입학식날에 사주고 싶어 벼르고 벼른 새 신발을 하루 만에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아까웠을까! 하지만 엄마는 내색 한번 없이 딸의 마음만 생각하는 넉넉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의 보살핌 속에 우리들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해마다 명절이 다가왔지만 우리 집에는 항상 쌀이 모자랐기에 떡국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그런데 한 해는 조금의 여유가 생겨 우리도 떡국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그런 풍족한 마음을 안고 엄마와 언니는 불린 쌀을 조금씩 나누어 머리에 이고는 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갔다. 버스가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언니는 빨리 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급히 서두르다 눈이 온 겨울 길바닥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길바닥은 얼어서 어린아이가 걷기엔 무척 미끄러웠다.이고 있던 쌀들이 버스가 내려오고 있는 도로 한가운데 모두 쏟아져 버렸다. 쏟아진 쌀이 아까워 엄마와 언니는 정신없이 쓸어 담았다. 눈, 흙덩이, 쌀이 함께 바구니에 담겨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혹시나 버스가 가버릴까 봐 불안한 마음으로 살펴가며 주워 담는데 걱정 말고 담으라며 쌀을 대충 다 담을 때까지 기사님이 기다려 주었다. 너무도 감사해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언니가 “쌀이 많이 줄어 어떡해”하고 엄마에게 말했더니, “괜찮다”며 오히려 “다친데 없느냐”며 물었다. 결국 떡국은 반만 해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 집에는 동생들이 많다 보니 항상 첫째 언니가 엄마 노릇을 다해야 했다.

사고뭉치 동생들의 잘못은 모두 언니의 책임이었다. 그래서 혼이 안나고 지나가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둘째 언니가 고집도 세고 호기심도 많고 열정도 많은 성격이라 대형 사고를 가장 많이 쳤다. 우리 동네에는 유달리 물이 흘러 내려가는 곳이 많았다. 강이며 농수로가 곳곳에 있었다. 대문을 나서면 바로 집 앞에 개울가가 있었고 집옆에는 농수로가 있어 어디에서 시작해 흐르는 지는 몰라도 항상 마르지 않는 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여름이면 아이들이의 수영장이 되어 주었다. 매일 아침밥만 먹고 나면 달려 나가 너나 할 것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하루 종일 물에서 친구들과 헤엄 지며 물장난하며 노는 게 일이었다. 그래서 물에 빠지는 사고가 잦았다. 어린객기에 위험한 줄도 모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 허욱적대기 일쑤였다. 귀신이 밑에서 잡아당긴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나도는 깊은 수렁 같은 곳이 몇 군데 있었다. 호기심 많고 지기 싫어하는 둘째 언니는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에 오기가 발동해 결국 일을 저질렀다. 어른들도 조심해야 곳을 겁도없이 뛰어들어 그만 물길이 거세게 쏟아져내려 겉잡을 수없이 회오리를 치는 깊은 웅덩이에 빠져 세차게 빙빙 돌며 허우적 대고 있는 것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발견하고는 건져 주었다. 물에서 나온 언니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큰언니는 동생이 죽는 줄 알고 놀라서 소리를 질러 언니를 깨웠다. 언니가 눈을 떠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또 다시 더 큰걱정 밀려왔다. 이사실을 아버지가 안다면 분명히 잘못도 엄마를 족칠 것이라는 불안함 때문에 그 상황을 목격한 친구에게 돈까지 줘가며 우리 부모님께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알게 되었고 그 모든 화는 엄마에게 돌아갔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엄마는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큰 언니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고생만 하는 큰 딸이 안쓰럽기만 했다. 그날밤 아버지 때문에 무서워 숨죽여 있는 딸을 엄마는 마음고생 많았다며 위로해 주었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란 언니는 지금도 '엄마'라는 말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5~6월에는 모내기를 하는 시기다. 모를 심고 난 뒤에는 흙둑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땅이 귀했기 때문에 자투리 공간이란 공간에 다 콩을 심었다. 콩들은 잘 자라 꽤 많은 수확이 되곤 했다. 그리고 거리가 좀 있는 밭까지도 항상 콩을 심었다. 여름에는 풀과 전쟁을 치런다. 그래서 엄마는 아침 눈뜨자마자 콩밭에 풀을 메러 나갔다. 그런 엄마를 위해 제일 큰언니가 엄마의 아침밥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밭까지 가져다주었다. 어리다 보니 돌부리에 자주 걸려 넘어졌고 그 바람에 광주리에 있던 밥과 반찬들이 모두 흙길위에 엎어져 버렸다. 배고플 엄마를 생각하며 얼른 주워 담아 갈려고 하는데 하루는 엄마 놋숟가락이 보이질 않았다. 밥이 다 쏟아져 버려서 엄마한테 사실대로 말을 하게 되었고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어린 딸이 다치지 않았음에 안심을 하고는 집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일하러 나가셨다.


그 이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던 엄마의 놋숟가락이 며칠 뒤 고물상 아저씨의 수레 위에 있었다. 잃어버린 우리 엄마 숟가락이라고 달라고 했더니 웃으며 아무 말 않고 그냥 주시더란다. 시골인심은 그랬다. 네 것 내 것도 없이 돈이 되는 것은 아무거나 집어 들고 갔으며 지나가다 집에 사람이 있으면 이웃집 들러듯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슬쩍 들어와 대충 건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며 제자리라고는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집의 물건들을 눈대중으로 금을 메겨 슬쩍 들고는 가져간다. 그럴 땐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놀란 시늉도 곁들여 고물상 아저씨를 향해 웃으며 사용하는 물건이니 내려놓고 가라고 소리를 치신다. 아저씨 역시 겸연쩍은 듯 모른 척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다른 것 없냐며 너스레를 떨다 가져갈 물건이 없음에 인사도 없이 자기 집 나가듯이 대문을 나서곤 했다. 그런 정겨움이 시골에는 항상 흘렀다. 어렸지만 고물상 아저씨의 순수한 행동들이 낯설지가 않았고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고물수레 위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정말 많았다. 만물상보다도 더 많은 것 같았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의 만난 일상이었지만 지금도 고물상 아저씨에 대한 기억은 가끔 미소 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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