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3년의 시골살이는 나에게 정신적 육체적 안정을 주었다.
근처 동네에서 여러 정보를 접하던 중 드로잉을 배울 수 있는 자조적 모임이 있었다.
연필을 많이 사용하는 드로잉 수업은 처음이었지만 그동안 붓을 다룬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란 생각에 새로운 사람들과 정보도 얻고 교류도 할 겸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첫 수업을 가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시골생활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 가끔 일어나지 않을 일들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한 카페에서 고향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학창 시절에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얼굴정도로 알고 있는 그 친구가 나를 보자 너무도 해맑게 웃어준 기억이 났다.
순간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며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생각이 났다.
또 한 사람은 간호일을 하면서 여러 어르신들의 처방약을 타기 위해 부지런히 도 갔던 약국의 여직원선생님이었는데 차분하면서도 말수가 적고 일처리도 참 깔끔한 사람이라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인연이 된다면 나의 시골살이에 참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애써 만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연관성이라고는 없었기에 연이 닿아 친구가 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젊을 때 내 성격 같았으면 바로 대시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인품을 만든다고 내 얕은 잣대로 사람을 가볍게 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미치자 행동에 조심성이 생겨 잠시 스쳐가는 생각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그 생각을 모두 묻고 첫 드로잉 수업을 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잠시 떠 올렸던 좋은 기억의 사람들이 모두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너무 신기했다.
어색하리라 여겼던 첫 수업시간은 반가운 인사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선생님도 좋으신 분이었다. 50대 초반의 남자분으로 '산불진화 대응팀소속이며 봉사정신이 많은 인품도 훌륭한 분이었다.
미대를 나와 한동안 그림을 못 그리는 상황이었다가 시골에 내려와 이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며 무료 수업이었지만 열정을 보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 백발에 카리스마를 장착한 여장부 스타일의 한 여인이 수강생들 틈사이로 비집고 들어섰다.
나는 너무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우연한 만남에 몰입되어 그동안의 일상을 격하게 나누고 있었는데 앞빈자리에 앉던 백발의 한 여인이 나를 향해 "늠이 언니 아이가?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내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순간 나는 "누구?" 했다.
"내 모르겠나? 언니 뒷집 OO 아이가~~ 하는 것이었다.
"응?" 하고는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때서야 조금씩 윤각이 드러났다.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모를 수밖에.
많이도 변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남편이 조폭 보스였다.
얼굴은 보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친정동네에 가면 그 동생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 사생활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조직 폭력배들이 주 하객이다 보니 결혼식장이 장례식장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지역에서 유명한 일화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곳에서 만날 줄 생각도 못했다.
인연이란 어디서 만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란 걸 여러 번 겪었다.
한 번은 내 바로 위의 오빠의 친구이면서 고향오빠를 타지에서 살 때 자동차학원 강사로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도로주행강사로 그 고향오빠를 선택했고 그와 동시에 학원에서는 여자수강생 모두에게 걱정의 대상이 되었다.
알고 봤더니 고향오빠는 자동차학원에서 요주인물이었다.
하도 까따롭고 괴팍스러워 여자수강생 모두를 울게 만들었기에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려고 하는 강사로 인식이 되어있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학원에서 쫓겨나지 않고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고향오빠라 편안하게 생각하고 지목을 한 것이다.
강사 선택을 할때 담당자분이 여러차례 선택이 맞는지? 를 물었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되었다.
첫날 1시간 도로주행을 나가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이며 교육을 시키는지 자기 맘대로 안되니까 헤드에 발로 차며 소리치는 바람에 학원차를 다 때려 부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기가 찼다. 내가 고향동생인걸 잊은 채 이성을 잃은 사람 같았다.
고향오빠라 생각했기에 부리는 성질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1시간을 넘은 도로교육을 마치고 늦게 학원으로 들어가자 학원에서는 난리가 났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사의 횡포에 견디지 못하고 울면서 중간에 내가 집에 간 줄 알았다는 것이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면서 들어가자 그런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고향사람이라고 말도 못 꺼내고 교육기간 동안 입을 꼭 다물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참아주었지만 또 그런 식으로 대하면 가만있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음 수업 때 단단히 각오하고 들어갔다.
'고향 오빠고 뭐시고 간에 오늘 하는 거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호기롭게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데 고향오빠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고향 동생한테 너무했나?' 하는 마음의 각성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라오는 성질을 순간순간 참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말이 전날보다는 많이 부드러웠다.
다행히라 생각하며 열심히 설명을 들으며 수업에 임했다.
도로주행교육이 끝나고 고향오빠를 마지막으로 언중유골의 심정으로 한마디 던졌다.
"와~~~ 오빠를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네~~" 하며 웃었다.
그 의미심장한 말을 고향오빠는 알아듣기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