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새끼줄 꼬는 사장님

1. 엄마와 나 (~2020)

by 복사꽃향기

엄마는 젊은 시절에 사장님이었다. 대체할 수 없는 그 이름 새끼사장!


유년시절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리 집에서만 새끼줄을 꼬아 팔았다. 이것도 기술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기계가 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엄마는 너무 쉽게 그 일을 해 내는 전문가였다. 너무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아버지를 만나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았지만 부지런하고 긍정적인 성격에 머리가 똑똑한 엄마는 가족을 위해 무슨 일이든 힘들다 생각하지 않고 밤낮없이 일을 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인근에 사과농사를 많이 지었다.


그 때는 사과나무 지줏대로 새끼줄만 사용했기 때문에 새끼줄이 많이 필요했다. 지금은 튼튼하고 좋은 끈들이 많이 나와 있어 골라서 사용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러질 못했다. 집 지붕도 대부분 초가지붕이라 일 년 동안 묵은 지붕을 해마다 새로 짚으로 바꾸어 주어야 했기에 그때도 새끼줄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 덕분에 새끼줄 판매가 우리 집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봄이 되어 사과나무에 지줏대 세울 시기가 되면 새끼틀을 밟는 소리가 밤낮없이 들려왔다. 엄마는 새끼틀에 앉아서 일하다 밥을 먹기 위해 일어날때만이 새끼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큰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어린 자식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눈치 없이 보채는 자식을 하루종일 등에 업고 앞에는 8개월 된 무거운 배를 한 아름 안고 일을 하셔야 했다. 그럼에도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오로지 들어오는 주문날짜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새끼를 꼬았다. 그 부지런함 덕분에 인근에 새끼 사장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복숭아 농사. 밭농사. 논농사 모두 지어가며 밤이 되면 또 새끼줄을 꼬아 팔았다. 매일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언제 시작했는지 언제 그쳤는지는 모른다. 어떤 때는 자고 일어나도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새끼를 사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믿고 살만큼 튼튼하고 야무지게 잘 만들었다. 그 소문이 퍼져 항상 우리 집에만 주문량이 많았다.


그리고 또 청도에는 복숭아 농사가 잘되었고 집집마다 거의 복숭아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해마다 복숭아 나뭇가지를 새끼줄로 얼기설기 묶어주었기 때문에 복숭아나무에도 판매 상자에도 많이 필요했다. 새끼는 20분에 1 롤 정도가 나왔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시기는 주로 봄이었다. 한 달 전부터 미리 예약을 받아 새끼를 꼬아도 항상 예약이 밀려 있었다. 대문 옆에는 새끼를 수시로 꼬아 쌓아놓아야 했던 큰 창고가 하나 있었다. 그 창고에 천장에 닿도록 가득 쌓아 놓아도 순식간에 다 나가버렸다.


새끼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튼튼한 볏짚줄기를 물에 살짝 적셔 줄기가 부드러워진 상태를 만들어 끊어지지 않게 쉴세 없이 넣어줘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연결이 안 되거나 잘못 넣어버리면 사용할 수 없는 새끼줄이 되어 버려야 했기 때문에 안타까워도 엄마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체구의 아버지에 비해 몸집이 큰 엄마는 너무도 많은 일을 해냈다. 처음엔 밟아서 하는 기계로 하다가 너무 많은 양을 감당하지 못해 비용을 들여 스위치만 올리면 빠르게 돌아가는 기계로 바꿨다. 빨라서 좋기는 했지만 굉장히 위험했다. 잘못하면 손이 딸려 들어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걱정이 되어 기계 근처는 오지 말라고 항상 조심을 시켰다. 그런 무서운 기계를 엄마는 능수능란하게 잘 다루었다.


엄마의 모습이 어린 나의 눈에는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우리 엄마는 왜 저렇게 일만 해야 하나 싶어 늘 마음이 아팠다. 주문이 밀려 있는 날에는 밤새 새끼틀을 밟아댔다. 나는 어려서 몰랐다. 그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이었는지를.


언니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먼저 난다."고.....

"어릴 때 학부모 모임에 엄마들이 학교에 오면 다른 엄마한테서는 향기로운 분냄새가 폴폴 나는데 우리 엄마한테는 늘 기름냄새만 났었다"라고 얘기하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온다.


“오래전에 일인데 아직도 눈물이 나냐?"고 언니에게 물었다.

“엄마가 너무 고생하고 살았던 모습만 기억에 남아 지금 생각해도 목이 메고 눈물이 난다”라고 했다.

그렇게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엄마는 소설책을 너무 좋아해서 밤늦게까지 읽곤 하셨다. 그 모습이 어린 자식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던 것 같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늘 못마땅해 엄마에게 꼬투리를 잡아 잔소리를 해대는 아버지의 투정을 말없이 받아내며 없는 살림살이에 6남매나 낳아서 키우자니 매일 일만 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 살아 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얼마나 벅차고 힘든 나날들이었을까 싶다.


어릴 때 나는 엄마하고 한 번도 같이 놀아본 기억이 없다.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일만 하느라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때 홍역을 심하게 앓아 1달 동안 학교를 못 간 적도 있었다. 그때도 엄마는 내 곁에 없었다. 외할머니께서 어린 내가 안쓰러워 이마를 짚어주었던 기억이 있을 뿐. 방안에만 있어서 너무 답답한 마음에 밖에 나갈 때도 언니들이 번갈아 업어주고 재워주며 돌봐주었다. 엄마가 가끔씩 나를 살펴주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엄마가 따뜻이 나를 챙겨준 기억은 없다. 아마도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나를 간호해 주었으리라 그렇게 믿는다. 엄마는 천성이 따뜻하고 온화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였다. 아마도 내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부분이 많았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린 내가 엄마의 그 힘겨운 인생살이를 얼마를 보았을까. 전부를 보았다 해도 삶의 시작점도 찍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이제야 느껴진다. 엄마가 가끔 자식들 때문에 힘들었던 얘기를 할 때 그 고달팠음에 혹시라도 내가 보태지는 않았나하는 미안한 마음에 자꾸만 물어 보았다. "너는 있는 듯 없는 듯했다. 너 정도면 10명도 키울 것 같다." 라고 하셨다.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너무 다행이다. 엄마의 힘든 인생길에 나도 모르는 내가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들어주었다는 기특함에서.


엄마와 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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