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와 나 (~2020)
효녀엄마를 맏딸로 둔 외할머니는 한마디로 '여자 한량'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술을 너무 좋아하셨다.
하루라도 술을 안 마시고는 못 사는 사람이었다. 밥은 안 먹어도 술은 하루에 몇 병씩 마셨다.
시간이 가면서 그 행동이 더 심해지셨다.
그러니 항상 술에 취해있었고 그런 모습을 본 아버지는 맏사위 노릇은 고사하고 외할머니를 ‘미친년’이라며 행실이 나쁜 어미를 두었다고 엄마를 들들 볶았다.
아버지에게 당한 엄마는 그 속상함에 외할머니에게 "술을 좀 적게 마시라"고 말해도 "술 한 병 사주지 않으면서 잔소리한다"라고 엄마를 또 질타한다.
외할머니댁은 우리 동네 안에 몇 집 건너에 있었다.
외갓집 모든 대소사는 엄마가 알아서 도맡아 해야 했다. 외할머니는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다.
절제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엄마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용돈만 주고 가는 다른 딸들만 자식이라 생각했고 늘 곁에서 노심초사하며 부모를 살뜰히 챙기는 귀하고 고마운 딸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마디로 엄마에게는 무겁게 짊어지고 가는 또 다른 짐이었다. 무겁고 힘겹다고 내릴 수도 벗을 수도 없는 멍에 같은 짐이었다.
외할머니는 평생 엄마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외삼촌도 이모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릴 때는 엄마에게 더없이 좋은 동생들인 줄만 알았다.
어른이 되고서 알았다. 모두 다 엄마를 이용했었다는 것을. 엄마는 일찍이 알았지만 이해하며 살았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모든 짐은 엄마의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술로만 사셨던 외할머니를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씻겨드리고 챙겨드리고 살펴드린 효녀였다.
아들하나여서 귀하디 귀한 외삼촌은 엄마에게 맡겨놓고 아들노릇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귀하게 자라 모른다 싶어 섭섭한 마음을 접고 또 접곤 했다.
젊을 때 엄마는 외삼촌에게 최선을 다했다. 잘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있었다.
아들을 위해서였다.
딸 셋을 내리 놓고 귀하게 얻은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계시는 외삼촌한테 오빠를 맡겼다. 엄마와 아버지는 해마다 고생해서 지은 곡식들과 수확한 과일들을 외삼촌댁에 보내주었다.
그렇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며 일이 있어 시골에 내려올 때면 엄마는 꼭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외삼촌 식구들을 정성껏 대접했다. 그때마다 당연한 권리인 양 누렸다.
난 사정을 모른 채 왜 외삼촌네 식구들이 오면 아버지의 잔소리에도 엄마가 극진히 대접하는 이유가 귀한 동생이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한참뒤에 오빠일로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이유인즉슨 외삼촌이 조카인 오빠를 직장에서 종 부리듯 했다는 것이다.
일이 많을 때 다른 사람은 다 퇴근해도 오빠한테는 매일 늦게까지 잔업을 시키고 월급도 다른 사람들보다 반 정도밖에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빠하고 같이 일하는 직장상사라는 사람이 일찍 알았지만 본일 일이 아니라 모른 척하려다가 너무 심한 것 같아 부모님에게 알려주는 게 맞겠다 싶어 시골까지 내려와 알려주었던 것이다.
호시탐탐 엄마의 치부를 들추어 항상 따지기만 하던 아버지는 오로지 오빠만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 귀한 자식이 외삼촌한테 그런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당장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오빠는 누가 나서야만 해결이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빠는 머리도 무척 좋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상황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할 줄 몰랐다는 게 너무 이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는 것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오빠가 스스로 부모님께 의논을 해야 하는 일이었음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아 결국 남을 통해 알게 된 부모님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문제가 커졌고 그 사이에서 엄마만 또 힘들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불같이 욕을 하며 화를 냈다.
엄마 역시 기가 차고 괘씸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친동생이다 보니 차마 같이 화를 낼 수 없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유가 있었겠지 “하며 말 한마디 못한 채 한없이 속만 끓였다.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귀한 내 아들을 그리 대했다 생각하면 섭섭함과 괘씸함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을 것이다.
속 시원히 화 한번 내기 못하고 참아야 하는 엄마 가슴에는 1,000톤의 무거운 돌덩이가 짓누르고 또 짓눌렀다. 할 수 없이 외삼촌을 찾아가 오빠를 데리고 내려왔다. 그런 상황에서도 외삼촌은 사과 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엄마는 이중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툭하면 아버지는 외삼촌 일을 들먹거리며 외갓집 식구들을 ”인간 같지도 않다”며 싸잡아 무시했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외가 덕분에 오빠가 취직이 되고 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는데 오빠일로 인해 외갓집과는 원수가 되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눈치 없는 외할머니는 술에 취해 넋두리를 하며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건수만 있으면 엄마를 들들 볶던 아버지는 그 정도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형제들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외갓집 식구들이 오는 것을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그래도 외삼촌은 당당하게 누나를 보러 온다며 아버지의 행동에도 아랑곳없이 찾아왔다.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엄마도 외삼촌에 대한 섭섭함이 잦아들 때쯤 하루는 외삼촌네 식구들이 우리 집에 왔다.
추석명절을 앞두고 벌초를 하기 위해 오셨다가 우리 집에 들러가곤 했다. 그날도 손주까지 데리고 오셨다.
엄마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음식을 부산스럽게 준비하는 동안 벌초하고 온터라 몸을 씻기 위해 밖에 만들어둔 화장실 겸 욕실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물이 튄다며 못 들어 가게 했다.
근처 대중목욕탕이 있으니 그기로 가라며 기어코 욕실을 못쓰게 했다.
모처럼 본 조카 손주한테 용돈 한 푼 주는 것조차도 아버지는 "뭐 하러 용돈을 주냐."며 "돈이 썩어 남아도느냐."며 면전에 두고 온갖 타박을 하는 바람에 엄마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막무가내인 아버지에게 같이 따지고 들며 아무리 이해를 시켜도 소용도 없었고 말리지도 못했다.
끝끝내 견디지 못한 외삼촌네 식구들은 아버지의 불화통에 결국 동네 목욕탕에 가서 씻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엄마는 오랜 시간을 묵묵히 견뎌냈다.
늘 이해심이 많았던 엄마가 외삼촌한테 완전히 마음이 떠나버린 순간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날이었다. 엄마는 놀람과 당황스러움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차근차근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나갔다.
엄마는 앞으로는 외삼촌을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밥 한 그릇 먹여 보내려고 정성껏 준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외삼촌이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
외삼촌은 외할머니집을 판 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엄마는 넋을 잃고 말았다.
"누나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얼굴도 안 보고 남처럼 가버린 것이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는 동생의 얼굴이라 생각해 너무 섭섭한 마음에 "얼굴이나 보고 가지~~" 했더니 "엄마 돈 바라고 그러냐 "라고 하는 외삼촌의 한마디 말에 엄마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엄마가 돌아가시며 처음으로 우리에게 한 말이 있었다.
엄마의 형제들을 빗대어 모두가 나한테는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다며 큰 언니를 엄마라 여기며 살아온 눈물 많은 이모만이 한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엄마 마음을 알기에 그 순간 엄마의 인생이 참 모질고 가엽다는 생각이 내 뼛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