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와 나 (~2020)
엄마는 가난한 집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18살의 어린 나이에 8살이나 많은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다.
엄마는 나이가 너무 많은 아버지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워낙 술을 좋아하시는 외할머니가 아버지가 술 잘 드신다는 말에 엄마에게는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맏사위로 점찍어 버렸다. 외할머니의 그 섣부른 판단이 평생 사위 눈치 보며 살아야 했음을 그때는 전혀 몰랐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아버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 형님집에서 형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첫 번째 큰어머니는 몸이 약해 자식도 없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아버지 나이 또래의 두 딸을 데리고 온 큰어머니와 재혼하셨다. 좋은 분이라 믿었던 새 형수는 정말 옛날 말 그대로 계모 같은 사람이었다.
어린 아버지는 큰어머니 밑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가 성장해 결혼할 나이가 되었지만 큰집의 주권을 잡고 있던 큰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다 엄마와 늦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바로 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를 했고 엄마는 아버지가 안 계시는 큰집에서 고되고 독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다.
옛말에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동서시집살이가 더 무섭다'는 말이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니었다.
엄마의 동서시집살이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엄마보다 훨씬 작은 키에 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큰어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어진 엄마에게 농사일은 물론이고 먹을 양식까지 관리를 했다. 큰어머니가 쌀독에서 식구가 먹을 만큼의 쌀을 퍼서 떠내주면 엄마는 그걸로 많은 식구들이 먹을 밥을 지었고 가족들의 밥을 다 퍼주고 나면 엄마는 밥이 모자라서 배를 곯는 날이 많았다.
엄마는 힘들어도 본인에게 주어진 삶이라 여기며 묵묵히 참고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가도 변하는 게 하나도 없었으며 더 고달프기만 했다. 그러다 엄마는 임신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먹는 게 없었고 굶주림에 지친 몸으로 농사일에, 살림살이에, 다섯 명이나 되는 조카들까지 모두 돌보아야 했다.
너무 힘들고 지쳐 빨리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을 바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어느 날 나쁜 마음을 먹고 동네 높은 곳에 있는 못둑으로 올라갔다. 못둑 위에 올라서서 한참을 생각하다 마음을 먹고는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군에 가있는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어 그 길로 바로 집으로 돌아와 어떤 힘든 일도 참고 견디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슬퍼할 아버지를 생각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인생에 그나마 애정이 있었던 시기가 이때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고생만 한 엄마를 데리고 바로 그 집을 나오게 되었지만 살림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새끼틀 하나만 가지고 나와 친정집 근처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말이 신혼이지 엄마의 참된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시집살이에서 벗어났지만 수중에는 무일푼이었다. 무조건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버지와 함께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열심히 일해 돈이 조금 모이면 논 한 마지기 사고, 또 조금 더 모이면 또 밭 한 마지기를 샀다. 그렇게 살림을 조금씩 늘려가는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기에 더욱더 열심히 일했다. 어린 나는 그런 소소한 엄마의 행복을 몰랐고 그저 매일 일만 하는 엄마가 너무 안쓰럽기만 했다.
어릴 때 엄마는 손수 뜨개질을 해서 우리 옷을 만들어 입혔다. 첫째 언니가 입고 작아지면 다시 풀어서 둘째 언니에게 맞게 다시 떠서 입히는 대물림 했고 목도리 장갑까지 직접 떠 주었다. 밤이면 일에 지친 피곤한 몸으로 해진 옷을 꿰매주느라 바늘을 쥐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다 꿰매어 놓고 주무셨기에 우리는 다음날 말끔해진 옷을 입고 학교로 갈 수 있었다.
딸 셋을 내리 낳고 뒤늦게 귀하게 얻은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 아껴두었던 분가루를 얼굴에 곱게 바르고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엄마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항상 그 모습으로 다녔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자식의 말에 엄마는 그저 헛웃음만 보였다고 큰언니가 회고하며 하는 말이었다.
여섯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이 얼마나 많이 엄마의 삶을 수고롭게 했을까. 엄마는 늘 착하기만 한 자식들이었다고 항상 말해 주었다. 우리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엄마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신들의 기억 속에는 오롯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죄스러움을 간직한 채 엄마에게 듣는 추억담은 늘 착하고 세상에 더 잘하는 자식이 없는 듯 그렇게 말하곤 하셨다. 엄마는 늘 고생만 시켰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엄마에 대한 애정이 아무리 깊다한들 자식에게 보내는 엄마의 애정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돌아가실 때까지도 뼛속 깊이 느끼며 살았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울타리 속에는 온기 한점 없는 황무지 같은 사막이었지만 자식을 향한 속정만은 꿀이 철철 흐르는 오아시스 같은 샘물로 가득 차있었다.
아버지로 인해 불안하고 괴로운 하루하루의 삶에도 엄마는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고 늘 많이 웃게 해 주었으며 엄마의 사랑을 순간순간마다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런 엄마의 노력 덕분에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 없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참 고결하고 순결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