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 장국과 가설극장

1. 엄마와 나 (~2020)

by 복사꽃향기


시골은 일로 인해 항상 바쁘지만 그래도 곳곳에 낭만이 숨어 있었다.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비슷한 연령의 엄마들은 '계'라는 것을 만들어 1년에 봄가을로 모임을 했다. 계라는 것은 매달 정해진 금액의 돈을 조금씩 모아 필요한 것도 사기도 하지만 잔치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할 때 융통해 주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서로에게 도움이 많이 되는 장치였다. 그래서 친목도모를 위해 해마다 봄이 되면 계추라는 이름으로 집앞산 남산계곡에서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모여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다 같이 즐기는 동네잔치 같은 날이 있었다.


그날이 되면 엄마는 동네아이들을 시켜 우리를 꼭 불렀다. 엄마의 긴급호출에 식구 많은 우리 집은 언니가 꼬맹이 동생들을 줄줄이 데리고 가야 했다. 그럴 때면 우리들은 오래 신어 늘어질 대로 늘어진 고무신을 구겨 신고 뛰어갔다. 빨리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마음은 급한데 눈치 없는 고무신은 왜 그리 자꾸만 벗겨지는지. 미끄러운 시냇가를 풀쩍 뛰어넘어 가파른 산을 오르자니 올라가는 동안 내내 고무신 주워 신느라 무척 힘들었다. 동생이 하나둘씩 뿔뿔이 흩어져도 모르는 채 동생 걱정보다 맛있는 음식이 다 사라질까 그 마음이 더 급해진다. 엄마는 그 사정도 모르고 불러도 오지 않자 자꾸만 동네 애들을 보내 재촉했다. 우리를 데리러 내려오던 애들은 중간에서 만나면 짜증을 있는 대로 낸다. 본인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얼마나 마음이 조급했을까.


부랴 부랴 올라가면 엄마는 준비해 둔 음식을 먹으라며 푸짐하게 챙겨주셨다. 기름을 듬뿍 넣어 볶고 굽고 끓인 음식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 양도 많이 하기 때문에 맛에 더한 맛이 어우러져 진한 맛을 내어 더할 나위 없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걱정 없이 마음껏 포식하는 날이었다. 주로 어른들을 위한 음식이었기에 매워 먹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특히 기억나는 음식이 있었다. 육수로 우려낸 국물에 불린 미역과 함께 맵쌀새알심을 가득 넣어 가마솥에 푹 끓여낸 장국이라는 것이었다.


어린애들인 우리에게도 구수하면서도 적당하게 간이 맞아 너무 맛있었다. 몇 그릇씩 먹어도 그만 먹으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잘 먹지 못할 때라 그때만큼은 맘껏 먹으라고 많이 끓인다. 지금은 새알심을 찹쌀로 빚어 더 구수한 맛을 내지만 보리밥이 주식이던 그때는 찹쌀이 너무나 귀해서 넣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잊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요즘에도 가끔 재래시장에 갈 때면 옛날 생각에 장국을 한 그릇 사 먹어 보지만 그때 맛이 아니라 실망을 하곤 한다. 이젠 영원히 추억의 맛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다. 기억으로라도 남을 순간들이 있었기에.


평상시에 먹지 못한 고급진 음식들도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엄마가 우리를 먹이려고 애를 썼다. 모처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배가 불러도 그냥 계속 먹었다. 그러다 결국 탈이 나 배앓이를 심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애들이다 보니 음식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일단 먹고 보는 것이다. 너무 먹어 일어설 힘도 없다. 먹다 지친다는 말이 이때 나왔나 보다. 어떤 애들은 너무 먹어 배가 개구리배처럼 뽈록해 곧 터지지 않을까 싶어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음식을 많이 먹어도 배가 터지는 경우는 없었다. 언제부턴가 아무리 먹어도 배는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하나씩 삶을 터득해 갔다. 어쩌면 본능인지도 모르는 사실을 깨달음인양 대단하게 자신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불변의 진리를 찾아낸 발명가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우리에게 준 진한 사랑의 일부였음을 퍼즐의 한 조각처럼 남아 마음속에 아린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추억의 순간이 또 있다. 우리 집 앞에는 대문을 열고 나가면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이 있고 건너편에 산 계곡에서 연결되어 우리 집 앞에까지 항상 흘러내려오는 개울가가 있다. 물이 메마르지 않고 흘러 내려갔기에 동네 어머니들은 빨래를 하는 빨래터 역할을 아이들에게는 더위를 식혀주는 동네 수영장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무더운 여름이면 열네다섯 살 정도의 언니들과 컴컴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큰 돌들을 쌓아 올려 물을 가두어 놓고 몰래 멱을 감기도 했다. 시골은 고되게 일을 하느라 피곤해서 다들 일찍 주무신다. 그때를 기다려 동네 처자들은 옹기종기 모여 작당모의를 자주 했다. 달빛아래 몰래 물놀이를 하는 즐거움은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둥근 달빛을 벗 삼아 멱을 감고 있자면 잠시나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정말 그런 어슴푸레한 저녁에는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도 모른 채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가뭄이 심해 물 한 방울 없이 메말라갈 때쯤 사람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기 위해 우리 집 앞 개울가에는 가설극장이 세워졌다. 아무것도 접할 수 없는 시골 촌구석에 유일하게 호사를 누릴 수 있는 문화생활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인이 오는 것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필름으로 돌아가며 깨끗하지도 않은 스크린에 찍찍 소리를 내며 화면이 잘렸다 나왔다를 반복해도 마냥 즐거웠다. 허연 천막 위에 비친 영화의 한 장면에 몰입에 사람들이 울고 웃었다. 그때 영화는 '빨간 머플러', '엄마 찾아 삼만리' 등 지금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옆에 있던 언니가 사라져도 모른다. 어떤 때는 컴컴한 천막 안에서 영화하는 내내 가족만 찾다가 영화는 보지도 못하고 오는 때도 많았다. 그런 날은 무서움과 서러움에 내내 울면서 집까지 오면 가족들은 우는 이유를 몰라 의아해한다. 그 모습이 더 서러워 더 큰소리로 대성통곡을 한다. 장난이었다며 다독여준다.


그런 순간들이 이젠 모두 추억으로 남았다. 그 순간에 머물렀던 우리 가족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좋은 추억만 있다면 좋으련만 인생이 어디 그렇던가 때로는 깊은 수렁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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