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해의 시작
어느덧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석 달째가 지나고 있었다.
2주마다 반복되는 병원 방문은 이제 내 생활의 한 조각으로 자리 잡았고, 그날 역시 정기적인 진료를 위해 익숙한 진료실 의자에 앉아 원장님을 마주했다.
"선생님,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숨도 덜 막히고, 잠도 조금은 자요."
원장님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아지셨네요. 그런데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낮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아이한테 화내는 건... 여전해요.
조금 나아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또 폭발해요.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지독한 후회가 밀려와요."
원장님은 가만히 내 말을 들으시더니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어머님, 혹시 '마음 챙김'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과 적절한 거리를 두는 연습.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바로 내뱉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물러서서 나를 관찰하는 것.
원장님은 다섯 살인 콩이와 함께 해보는 프로그램을 권유하셨다.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약만으로도 일상이 겨우 굴러가기 시작했는데,
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커다란 납덩이처럼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저...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장님은 억지로 권유하지 않으셨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 챙김'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의 진료 결과를 들은 남편은 결연한 표정으로 나섰다.
"내가 할게. 밥에 관한 건 이제 다 내가 책임질게."
그렇게 콩이의 식사 시간은 남편의 영역이 되었고, 결과는 놀라웠다.
내가 개입하지 않으니 아이는 더 이상 음식을 게워내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 앞에서 절대 재촉하지 않았고, 그저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천천히 먹어도 돼, 콩이야."
그 평화로운 풍경을 보며 나는 안도하다가도,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베이는 듯한 씁쓸함이 찾아왔다.
내가 아니어도 되는구나.
아니, 어쩌면 내가 아닌 게 아이에게 더 나은 거구나.
엄마인 내가 아이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사실을 매일 같이 확인받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여전했다.
밥을 안 먹겠다고 버티다 뒤늦게 배고프다며 짜증을 내는 콩이를 보면 도저히 이해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럼 아까 먹지 그랬어.'
'엄마가 먹으라고 할 때 먹었어야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카로운 말들을 삼키고 또 삼켰다.
하지만 참는다고 해서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가슴속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이 앞에서는 가면을 쓰듯 참아냈지만, 혼자 남겨진 시간에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약이 내 머릿속의 안개는 걷어주었지만, 콩이와 나 사이에 놓인 거대한 벽까지 허물어주지는 못했다.
몸이 편해질수록 오히려 선명해지는 관계의 균열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안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남편이 만들어준 이 평화도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만 같았다.
8월의 끝자락. 다시 진료일이 돌아왔다.
나는 진료실에 앉아 지난번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원장님, 저번에 말씀하신 마음 챙김이요. 지금 시작해도 될까요?"
원장님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셨다.
"물론이죠. 이제 정말 준비가 되셨나 보네요."
아이의 투병 기록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