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있는 그대로
두 번째 금요일, 우리는 다시 상담실의 문을 열었다.
일주일 전보다 조금 더 익숙해진 공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수업이 준비되는 시간 동안 나는 콩이에게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콩아, 얌전히 수업 들어야 해."
"네!"
"대답만 잘하지 말고... 엄마 말 좀 잘 들어줘."
"선생님!! 들어가도 돼요?"
아이의 활기찬 목소리에 안에서 다정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요~ 들어오세요!"
여전히 포근한 향이 감도는 방 안,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트레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길가나 개울가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돌부터
매끈하고 알록달록한 돌들까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한 돌멩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 오늘은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돌을 딱 하나씩만 골라볼까요?"
선생님의 말씀에 콩이는 기다렸다는 듯 바구니 앞으로 달려갔다.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돌들을 하나하나 뒤집어보고 살피며 심각한 고민에 빠진 아이.
"엄마.. 다 하고 싶어요..."
"우리는 하나만 고르기로 약속했잖아 그렇지?
이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돌을 골라보자."
콩이는 한참을 망설이다 트레이에서 선명한 줄무늬가 새겨진 작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흑갈색과 캐러멜색, 그리고 순백색의 띠가 자로 잰 듯 반듯하고 촘촘하게 층을 이루고 있는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운 돌이었다.
콩이의 작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저 돌의 무늬는
마치 우주의 비밀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고,
아이가 견뎌온 성장의 시간들을 층층이 기록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흔히 볼 수 없는 이 섬세하고 특별한 존재를,
콩이는 첫눈에 알아보고 자기 보물로 삼은 것이다.
반면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다 중심으로 갈수록 색이 맑아지는,
작고 매끈한 돌 하나를 골랐다.
깊은 바다의 속살을 떼어온 듯 고요한 그 색감이 묘하게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그 질감이 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자, 이제 눈을 감고 손에 든 돌의 감각을 느껴보세요."
선생님의 차분한 안내에 따라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자 손끝의 감각이 예리하게 깨어났다.
돌의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고,
손가락 끝으로는 돌의 미세한 굴곡과 매끈하고 거친 면들이 입체적으로 읽혔다.
이어 눈을 뜨고 돌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냥 파란 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안에는 미세한 선과 점들이 얽혀 있었다.
가운데에는 무언가에 부딪힌 듯 움푹하게 깎여 있었고,
마치 햇빛을 바라본 고양이 눈처럼 가운데에는 푸른 선이 그어져 있었다.
충분한 관찰이 끝난 뒤, 선생님은 A4 크기의 정사각형 캔버스를 내어주셨다.
"이제 방금 본 돌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볼까요?"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고개를 들려할 때마다,
나는 방금 전 선생님의 말씀을 되뇌었다.
'잘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 있는 그대로, 그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거야.'
캔버스 위로 색연필을 천천히 움직였다.
잘 그리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손이 생각보다 자유로웠다.
돌의 둥근 윤곽을 따라가다가, 움푹 파인 자리에서 잠시 멈췄다.
그 작은 흠집을 그대로 옮겨 담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
한 번이라도 나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을까.
나는 나에게 항상 엄격한 검열관이었다.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해했고,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래서 콩이가 투병하는 그 시간 동안에도,
나는 친구나 가족들에게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혼자서 모든 무게를 짊어졌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남들에게는 쉽게 건네던 그 한마디를, 정작 가장 지쳐있던 나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나에게 이토록 인색하고 뾰족했으니, 내 곁의 아이는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나를 지키기 위해 세운 이 단단한 성벽이,
정작 내 아이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뾰족한 가시가 되어 아이를 찔러온 건 아니었을까.
그 생각이 스치자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콩이 역시 자기 캔버스 앞에 앉아 저만의 특별한 줄무늬 돌의 형체를 제법 진지하게,
하지만 아주 자유롭게 담아내기 시작했다.
어느덧 1시간의 수업이 끝났다.
우리는 각자의 돌과 그림을 소중히 챙겨 들었다.
선생님은 돌을 유독 욕심내던 콩에게 돌멩이들을 한 아름 더 쥐어주셨다.
양손 가득 보물을 얻은 콩이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환한 웃음이 번졌다.
집으로 돌아온 뒤, 콩이는 자신이 고른 줄무늬 돌과 그림을 침실 옆 협탁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꽤나 재미있었는지 아빠에게 쉴 새 없이 재잘거리다 이내 단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내가 그린 푸른 돌 그림을 작업 책상 위, 노트북 바로 옆에 올려두었다.
날 선 고민과 마감의 압박이 소란스럽게 오가는 나의 일터.
그 소음 한복판에 놓인 정적인 돌 그림을 보고 있으니,
상담실에서 느꼈던 그 짧은 정적이 다시금 내 곁으로 찾아오는 것 같았다.
'멈추고,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것.'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콩이라는 우주를 제대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거친 파도부터 잠재워야 한다는 것을.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 주는 것이 그 시작임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진짜 회복의 지도를 그려가고 있었다.
아이의 투병 기록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