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장하면서 수많은 정보과 경험을 통해 배우고 살아왔다. 그러한 경험들이 앞으로의 삶을 위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감정이나 상황, 기준을 정의하고 그 정의에 맞지 않으면 갈등하게 된다. 내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조차 없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의 신뢰하는 것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신학에서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과 변화하는 하나님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보통 전자가 보수고 후자가 진보라고 말한다. 최근의 넷플릭스에서 호평을 받았던 <두 교황>에서 두 교황의 성향 차이도 이러한 것이다. 진리가 고정되어있는지, 변화하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확실한 건 어떤 입장을 가지던 사람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변화하는 인간은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있다. 변하지 않아야 변수가 없어지니까. 변수가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 외의 것들이 잘 풀리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변수에 의지하거나 책임회피를 할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변하지 않는 변수, 즉 전제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상황을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하기에 종종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한다. 하나의 질서를 만들고, 질서 안에서 문제를 단순화한다.
이러한 정의에 대한 집착은 각 분야, 장르를 뛰어넘어 생긴다. 한 사람 혹은 한 단체가 내리는 정의와의 대립이 발생하곤 하는데, 예술에 대한 정의도 이 논리를 피할 수 없다. 근대에서는 예술에 대한 정의를 '정하는 다수', '예술협회'라든지 '사회에서 권위 있는 이'가 정하곤 했다. 이들이 가치를 매기고, 없애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은 정의할 때 정의할 수 없는 신비한 개념이다.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열린 개념'이라 한다.
정의하려 하지만, 정의될 수 없는 개념.
이런 표현이 생긴 것은 사람은 개인이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집단이 정의하는 개념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정의하는 개념을 무시할 수 없다. 누군가는 예술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예술로 받아들이는 실존적인 경험하는 곳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사람은 자기 의견을 관철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타인의 의견이나 경험을 비정상적이라던지 '정의'에 부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렇게 간단하게 타인의 경험과 관점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이 모든 것은 정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의하는 것 자체가 대단했던 시대가 지나가고, 정의와 정의를 새롭게 융합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앞으로 나타날 그리고 나타나고 있는 모든 미디어나 소비문화들은 수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며 사라지고 있다. 정의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언제든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개개인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 시대에 배려와 경청이 중요한 이유다. 정의는 수없이 많으며, 수없이 바뀌고 있고,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