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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Nov 19. 2016

혐오가 이기는 날들

거부하면 사실 모든 게 편하다.

 


 요즘 글을 쓰려고 몇 번을 망설였다. 생각이 넘칠 듯 찰랑거렸다. 하지만 브런치를 켜지는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 글을 쓰면 '정치' 라던가 '세월호' 같은, 입에 담는 순간 레고 블록을 입에 잔뜩 넣고 가글 하는 것 같은 불편한 얘기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웹툰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신이 그리고 있는 캐릭터의 얼굴 표정을 짓게 된다고 했다.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불편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 내가 쓰고 있는 주제의 무게감과 감정을 글을 쓰는 내내이고 있어야 하니까, 그게 두려웠다. 꽃 글만 쓰고 싶다.

 며칠 동안 우리는 성능 안 좋은 매트리스에 기대어 자듯 불편한 현실에 일상을 뉘었다. 일단 살아야 하니까, 수많은 사건 , 우리 모두가 엮여있는, 기이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깔고 우리의 일상을 전경에 두었다. 근데 뭘 해도 배경이 구리니까 다 구렸다. 내 일상이 이상하게 어그러졌는데, 이게 내 탓이 아니라니 조금 당황스럽다. 그래도 지금 껏 살면서 '나'만 잘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뭔가 되는 거라 생각했는데, 존재 만으로 전국구 광역 스트레스 유발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그래도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학교를 가고 수업을 듣고 알바를 했다. 지하철에 타면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사람들도 대부분 스마트폰으로는 최순실의 얼굴을 보고 있더라. 나는 그런 옆사람의 스마트폰을 몰래 들여다보며 저 사람도 지금 스트레스받고 있겠지, 하고 혼자 동지애를 느꼈다. 외모 가지고 사람 평가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볼 수록 짜증 나는 얼굴들이다.

 사실 나는 대통령 때문에 살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줄 몰랐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말들, '난 이렇게 말할 테니 듣기나 하라' 식의, 책임감이 결여된 발화들을 보고 있자면 언어학과 몽둥이로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희귀종 언어학과입니다. 관련 인들이 검찰에 출석할 때 그들이 뱉는 말을 보면 진짜 기가 찼다. 말을 안개처럼 한다. 실체는 없이 대충 사람들의 눈만 일시적으로 가리려는 게 목적인 단어들. 그래도 다들 이참에 그런 멍청한 말들이 얼마나 문제인지 깨달았을 테니, 기세를 몰아 화용론을 전 국민 필수 과목으로 지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말을 학문적으로 언어 분석해보면 정말 이성적인 분노가 끌어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걷다가도, 수업을 듣다가도 친구들과 SNS를 보다 훅 치고 들어오는 짜증에 '허!' 소리가 절로 난다. 학교 후문에 붙어있는 수많은 대자보중,  '시일야방성대곡'을 스치듯 봤다. 올드하게 표현하자면 정말 목놓아 울고 싶을 지경이다. 내 팔자에 없는 나라 걱정을 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요즘 하는 자조적으로 얘기가 있다.   

'김정은이 서울 불바다 만든다더니 진짜 그렇게 됐네. 팩트 폭격으로'

 웃긴 자료나 맛집 정보만 넘치던 페이스북 피드가 실시간으로 한 여자와 그를 둘러싼 이들의 불쾌한 언행으로 뒤덮였다.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컨텐츠의 무게가 갑자기 훅 늘었다.근데, 팩트에 자꾸 맞으니 슬슬 아프지 않으려 한다. 벌써 맨 처음 생긴 상처에는 무력감의 딱지가 앉으려, 아니 앉을까 무서워지고 있다. 근데 내 딱지는 괜찮은데, 우리 모두가 딱지가 앉고, 흉이 지면 어떡하지. 아니 또 근데, 이제 그러다가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 이겼다?

 혐오가 이기고 있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옳은 게 되고 있다. 혐오가 이기는 날들과 그리고 그 사실. '세상은 착하지 않다' 같은 건 이미 알고 있는 건데, 굳이 또 이렇게 적나라한 사례로 마주하고 있다니. 인생은 참 어렵다. 

 어렴풋 알고있었지만, 엊그제 지금껏 ㄹ혜 정부에서 일베로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게 사실 확인됐다. 일베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사이트였다. 예전에 한 번 호기심에 들어가 봤다가 그 사이트 안에 압축된 엄청난 혐오감에 구역질을 느끼며 껐다. 해외 스타들의 장애부위가 있는 사진을 모아놓은 글이 베스트에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걸 보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생각해보니 웃기다. 보수 정부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혐오'를 조장한다는 게. 오히려 우리를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면 본인들이 우리를 조종하기 더 쉬웠지 않을까? 그들은 왜 혐오를 선택했을까.


거부하면 편하다.

  본디 평화에 끌리는 내 쫄보 성격 때문인 지 혐오를 마주하는 건 심리적으로 정말 힘들다. 잔뜩 성이나 가시 돋친 선인장을 손으로 움켜쥐는 느낌이다. 근데 문득 생각해보니 가시를 뻗치는 게 선인장에게는 가장 쉬운 자기 방어일 거란 생각이 든다. 낯선 존재에 대해 타협하고 이해하는 건 고지능의 동물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시간도 머리도 많이 써야 한다.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라는 건, 나도 알아야 되고 상대방도 알아야 되고 접점이 어디인지, 나의 마인드맵 안에 어디쯤에 저 새로운 것을 조심스럽게 넣어놔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아마 그런 능력이 안되면 그냥 가시를 팍 세워버리는 게 편할 거다. 여자들은 왜 저래? 어떻게 동성을 좋아할 수 있어? 이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싫어하면 편하다. 헤어진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전 애인을 괜히 남들에게 욕하고 싫어하는 게 편하듯이.  부정하고 멀리하는 순간 그 다른 존재가 나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라는, 내가 자리한 지금을 절대 뺏기지 않을 거라는 위안에 휩싸이니까. 게다가 어떤 걸 싫어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것보다 높은 위치에 두는 거다. '난 그걸 싫어할 권리가 있다' 고 감히 전제하는 거다. 감히란 말을 감히 썼다. 뭐, 다른 곳에서 자신이 높지 않다면 본인 머릿속에서라도 그렇게 스스로를 높이 두고 싶을 것 같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혐오'란 방식으로 본인의 사고방식을 현재에 안주한 그들은, 분명 진화하지 못할 거다. 현실에 불편함을 느끼고 스스로를 변화하려는 종들만이 진화의 은택을 받았으니까! 뭐 어쨌든 나는 그렇게 못살겠다.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에 대해 부정하고 대충 빨간 줄 죽죽 그어 '나 그거 싫어' 라는 꼬리표를 달아두고 대충 어디 처박아 두는 거. 그렇게 편하게는 못살겠다. 차라리 내 머리를 굴리고 노력해서 이해하는 게 최종적으로 더 편하다.

 정말 매일 매일 혐오가 판치는 세상이다. 그래도 내 주변 대다수의 사람들은 혐오를 선택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다행이다. 근데 날이 점점 추워진다. 다들 괜찮은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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