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단상
사흘 전 퇴근길 ‘기둥’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환승하는 오금역은 5호선 끝자락이라 배차간격이 유난히 길었다. 열차를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꺼져 앞에 놓인 지하철역 기둥을 한참 보았다. 두 사람이 둘러싸도 모자랄 둘레였는데, 30대 남자가 두 귀에 이어폰을 꼽고 핸드폰을 보며 온 몸을 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10분이 지나자 문득 사람이 기대면 기둥은 힘이 들까?라고 생각했다. 사실 기둥이 너무 거대하고 두꺼워 거뜬해 보였기에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러다 열차가 들어왔고 곧 기둥은 잊었다.
병자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악취가 날까. 냄새가 새어나가는 걸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대학 병원 복도는 엄격한 위생의 냄새가 났다. 아빠는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자고 있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톤으로 왔냐, 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날 출근 이주 차 직장인이라 바쁘단 핑계로 가족들 얼굴을 본지 오래였다. 정말 오랜만에 아빠와 단둘이 시간을 가지는 게 이 병실이었다.
폐에 물이 찼다는데 그게 무슨 병인지 몰라 지식인에게 물었다. 아빠 쓰러지셨어, 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건대 병원으로 가는 지하철 안이었다. 얼마큼 슬퍼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검색을 하면 답을 줄 것 같았다. 폐부종, 혹은 폐수종. 병은 아니고 증상인데 스트레스 외 기타 이유로 체액이 폐에 차는 경우다. 합병증 란에는 사망이라고 쓰여있었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폐에 찬 물이 호흡을 방해해 죽음에 이른다고 했다. 익사처럼.
가장 최근에 생각한 죽음은 노견이 된 애완견을 떠올릴 때였다. 앞으로 짧으면 삼 년, 길면 오 년인 강아지의 눈을 떠올렸었다. 오 년 너머를 상상하자 강아지가 산책하자고 보채면 좀 더 기꺼이 집을 나서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와 죽음이란 단어가 나란히 서자 머리는 회전을 멈췄다. 상상하기에 너무 큰 상실이라 63 빌딩을 처음 코 앞에서 봤을 때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회사 적응은 잘하고 있냐?’
몇 주 만에 딸을 마주한 아빠는 쉰 목소리로 나를 챙기는 말을 했다. 엄마는 잠시 짐을 챙기러 집에 가고 없었는데, 그날 아빠의 완벽한 문장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새 회사 재밌어요, 하고 말을 이어가려는데 아빠의 호흡이 가빠졌다.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움츠리고 다리를 굽혔다. 그릉그릉 숨을 쉬는 옆에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애써한다는 게 고통스러워하는 아빠 어깨에 손을 올리는 거였는데, 보통의 집처럼 암묵적으로 사랑을 믿되 데면데면하기를 유지했던 이 부녀관계에서 유례적인 스킨십이었다. 간호사 부를까?라는 말에 아빠가 대답을 안 했는데, 나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간호사를 부를 만큼 응급상황이 생길 일 없다, 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빠는 간호사 좀 불러라, 고 날숨으로 내뱉었다.
아빠의 고통은 초 단위로 몰려왔다 사라졌다. 나중에 보니 폐에 3L의 물이 있었다. 익사 직전의 호흡은 이런 걸까. 그러나 대학병원은 바빴고, 폐 물을 빼는 수술은 몇 시간 뒤로 잡혔다. 근처에 당직 간호사만 있었기에 아빠는 수술 시간까지 진통제로 버티며 빠르고 짧게 호흡했다. 간호사는 불러도 잘 오질 않았다. 내 시야에 보이는 모든 병실의 담당 간호사 이름이 하나뿐이었기에 그도 수긍이 갔다. 작은 몸의 그는 아빠 말고도 많은 이들을 위해 작은 약병과 주사기를 쥐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내가 있는 동안 아빠는 폐에 찬 물이 다른 장기를 누를 때마다 두어 번 더 간호사를 필요로 했고, 아빠 숨소리에 목 긁는 소리가 더 해질수록 간호사의 오지 않음이 원망스러울 뻔도 하였는데, 어떻게 보면 그만큼 아빠가 위독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반증인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확실히 나보다 아빠의 몸을 더 잘 만졌다.
엄마가 돌아오자 간호사만 기다리는 내 어정쩡한 자세와 아빠의 숨소리가 만드는 묘한 정적이 깨졌다. 엄마는 짐을 내려놓자마자 꺼낸 수건으로 아빠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집에서 챙겨 온 온갖 다양한 크기의 방석으로 아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폐 물이 호흡을 방해하지 않는 각도를 찾아 아빠 허리를 조금씩 기울였다. 엄마도 이런 간병은 처음일 텐데, 한 손으론 아빠 이마를 짚고 한 손으론 오른쪽 승모근을 지압하는 모습을 보며 능숙함에 놀랐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내가 아팠을 때도 엄마는 내 몸 어딘가를 계속 안마해줬는데, 날 위한 누군가의 부드러운 악력은 나을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걸 분명 줬던 것 같다.
아빠는 나를 일찍 낳아 내 또래 부모님 중에서 젊은 편이었다. 작은 회사를 운영했기에 은퇴는 남의 이야기였고, 소위 사회생활 한창일 나이였다. 그리고 크면서 눈치껏 알게 됐지만 주위 친척들보다 사업 수완이 좋았다. 능력은 더 큰 책임을 불렀다. 나중에야 분명히 안 사실이지만 아빠는 우리 가족과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몇몇 경제력을 잃은 친척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고통은 나눌수록 준다고 하는데 아빠의 고통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아빠는 자기가 아픈 소식이 실시간으로 퍼지는 걸 참을 수 없어했다. 나에게도 엄마가 기어이 너네한테도 말했냐는 식의 말을 했다. 내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아빠 표정이 묘했던 이유가 설명되었다.
나중에 동생까지 침울한 표정으로 들어오자 아빠는 무언가를 못 참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몸져누운 탓에 가족들이 비좁은 병실에 모인 거라는 말을 자꾸 했다. 속상했지만 아빠가 유별나서도 아닌 것 같은 게, 병상을 중심으로 사회 초년 티를 못 벗은 딸, 입대를 앞둔 아들, 그리고 함께 오래 살기로 약속한 아내가 있었다. 우리 신분은 간병인이었지만 아빠 어깨 위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물 찬 폐로 숨쉬기도 버거운데 아빠는 이런 데를 오게 했네,라고 다시금 작은 쇳소리로 뱉었다.
단위 분마다 고통은 심해졌다. 폐 물을 뺄 수술은 아직도 한참 뒤였고, 호흡 한 회 한 회를 버거워하는 아빠에게 너무 긴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우리 앞에서 고통을 참아보려는 아빠의 의지가 흔들릴수록 아빠는 자식들이 불편해했다. 동생이 온 지 10분쯤 지나자 아빠는 거의 화를 냈다. 너네 있을 곳 아니라며 얼른 집에 가,라고 했는데,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과 말투와 그 거친 쇳소리가 그를 남처럼 보이게 했다. 역정에 놀란 엄마는 애들 서운하게 왜 그래,라고 했고 나도 서운함이 들려다 아빠의 다음 말을 듣고 군말 없이 짐을 챙겼다. 아빠는 해석도 어려운 쇳소리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며 당부했다.
아니 지금, 이 생생한 고통 속에 있으면서 저게 할 말인가. 조금 내려놔도 되는데, 싶다가도 아파도 강해야 하는 사람의 근심을 헤아릴 길이 없어 동생을 데리고 병실을 나왔다. 분명히 주기적으로 몰려오는 고통 때문에 찡그릴 때 보다, 우리에게 다짐받으려는 그 표정이 더 컸으며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본인의 고통이 더 큰 걱정을 불러오는 일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눈빛이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잡는데, 동생의 눈에는 참았던 눈물이 고였다. 맞아, 방금 아빠 호통 소리는 형편없이 작았지.
엘리베이터가 두웅-하며 움직이자 갑자기 사흘 전 본 지하철 역사 기둥이 생각났다. 떠오른 기둥의 심정을 다시 상상해보았다. 사람이 너무 기대면 힘든가, 이번엔 답을 알 것 같았다. 내가 본 기둥은 기억 속에서 이렇게 답했다. 얼마나 많은 이가 내게 기대든 난 상관없으니 이 자리에 조용히 오래도록 서있게만 해달라, 고.
정말 오랜만에 쓴 일상 감상입니다.
트렌드와는 별개로 쓴 글이지만
다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아참 저희 아버지는 회복기시고
저도 마음을 추스려 정리한 글이니
맘 편히 읽어주세요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