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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세미 Feb 07. 2022

응애 하고 보니 K-장녀

k-장녀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만 유독 장남, 장녀의 몫이 있음을 느낀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나의 의지가 아니었는데, 순서까지 내가 정할 수 없다. 태어나 응애 하고 보니 첫째인 것이고 한 집안의 장녀인 것이다. 요즘은 덜 하다 믿지만 과거에는 장남에게 많은 뒷바라지와 유산을 물려주고 동생들에겐 기회가 덜 주어져 성인이 되고 나서 설움으로 인해 많은 다툼이 일어난다고도 들었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닌 것 같다. 따로 장녀에 대한 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교육을 받지 않아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당연하게 한 자리를 차지해야만 하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인지 모르게 대학보다 취업을 하고 싶다 생각을 했다. 공부에 뜻도 없었지만 대학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대학이란 곳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고 사실 잘 알지도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바로 취업을 하려고만 생각하고 면접을 봤고, 내가 원하던 곳에 취업이 되어 졸업식도 마치기 전 부산에서 네 시간 거리에서 일을 하며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집에서 떨어져 돈을 벌기 시작하면 우리 집은 금방 여유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버는 돈을 모두 보내준 것도 아니면서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당연히 변화가 있겠지’ 생각했다. 참 어린 생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티도 나지 않는 생활에 ‘내가 집 떠나 타지에서 일을 할 동안 집안 살림은 얼마나 더 나아졌느냐’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힘들게 삼켰던 적도 많다. 아무도 등 떠민 적 없던 타지에서 직장생활이었다.


취업하고3년 정도는 시도 때도 없이 참 많이 울었다. 처음 회사에 올라오던 날 4시간 내내 우는 아이도 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면 밝아 보였겠지만, 속으로는 우울감을 키우고 살았다. 혼자 버스 타고 갈 때면 내 인생 마지막을 생각하며 울고, 술 마시면 또 울고 서러웠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신랑 앞에서 유독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반대 입장이었다면 벌써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늘 다독여줬을까.


한 날은 직접 회사 내에 있는 마음 상담 센터에 찾아갔다. 휴무 날 문득 연락을 하고 가서 설문지에 한참 체크를 하고 질문에 답하며 또 울었다. “동생이 이제 고등학교 졸업할 때도 되어가서 동생 대학교도 보내줘야 하고, 집도 어려운 걸 도와야 하고” 그래서 힘들다고 했던 건지, 해결하고 싶다고 했던 건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야기하면서 울었다. “그렇게 해달라고 부모님이나 동생이 부탁하던가요?” “…. 아니요..” 십여 년 전 기억나는 대화 전부다.


엄마와 딸 사이에 고민이 있으면 상담을 할 수 있고, 시시콜콜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이야기가 작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작든 크든 뚝딱하고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 마냥 다정한 딸일 수만은 없다. 엄마는 대화 상대가 필요할 때도 난 해결사가 되어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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