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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크렁 Aug 11. 2022

너의 다양한 모습을 마주하는 일

캐치미이프유캔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를 멀리에 대고 걸어왔어요."


젠틀하게 생긴 그는 공손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보통 술모임에 차를 가져오는 일은 조금 드물지만, 택시가 안잡히는 요즘은 차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들어온 지 1년 됐고, 평소에는 일하느라 술은 잘 안마셔."


그는 해외에서 오래 살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겸사겸사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오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데, 언제 거래처를 방문해야할 지 몰라서 차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 한다. 술먹으면 운전 못할텐데, 물어보니 오늘은 오랜만에 술약속을 잡은 날이라 일을 다 끝내고 왔다며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는다. 대리 꼭 불러서 갈거라는 말을 덧붙여 나를 안심시킨다. 






차분하고 진솔한 대화가 좋아. 


그는 정말로 덤덤한 얼굴로 해외에서 생활하며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국어책을 읽는 듯한 특유의 억양없는 말투와 솔직한 화법에는 이상하게 사람을 집중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보통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는 경우 듣다보면 지치기 마련인데, 그는 본인 이야기를 꽤 길게 이어나가면서도 전혀 장황하지 않은, 대화의 적정선을 지키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보통 모임의 분위기는 두 가지 버전으로 나누어진다. 1) 왁자지껄 농담과 술기운이 오가는 분위기 2) 조곤히 대화를 이어가며 공감대와 소소한 웃음포인트를 나누는 분위기. 그날은 2번이었는데, 사뭇 진지한 대화와 적당한 술이 어우러진 날이었다. 그는 예전에는 가볍게 농담을 나누거나, 장난을 치거나, 가벼운 대화가 이어지는 술자리를 좋아했으나 이제는 이렇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상당한 무게감을 가진 그가 왁자지껄 노는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서로의 가치관을 나누고, 살아왔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나니 벌써 시간은 밤 11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12시가 넘도록 안에 있던 무언가를 실컷 나누고서야 헤어졌다. 그는 집에 가는길에 장문의 문자를 내게 남겼다. 오늘 너무 즐거웠고, 오랜만에 좋은 추억 남기고 간다는 방명록이었다. 





ㅋㅋㅋㅋㅋㅋ. 


그는 2주 뒤 다시 모임에 참여했다. 그날은 남성의 비율이 높아 시끄러운 분위기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진지한 그가 이런 분위기에 잘 어울릴까 모임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유달리 텐션이 높은 사람들만 모였던 그날은 술을 먹기 전부터 벌써 재미있었다. 거기다 다들 술을 잔뜩 사와서 짧은 시간에 다들 술기운이 많이 올라버렸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대화주제는 의식의 흐름대로 여기저기 튀어다녔다. 호스트로서 제일 좋아하는 분위기인데, 내가 분위기를 띄우거나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 딱히 신경쓸게 없어서 그렇기도 하고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기분이 좋아서기도 하다.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지난번 만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엄청 웃기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특유의 짖궂지만 선을 넘지 않는 농담을 잘 던질 줄 알았다. 모임의 분위기를 리드했고, 우리는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빵빵 터졌다. 지난 번 모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그와는 달리, 이번에는 누군가 이야기를 길게 하거나 했던 이야기를 또 하기 시작하면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판단이 백번 옳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자주 모임에 나오시는 분들의 성격은 대충 알고 있는데, 보통 대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의 경우 왁자지껄 농담을 나누는 분위기를 선호하지 않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임의 경우 참여하는 사람들간의 케미에 따라 분위기가 좌우되는 편이라, 예전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다시 방문했다가 이전과 다른 분위기의 술자리에 흥미를 잃어 다시 오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렇게 분위기에 맞추어 확 달라지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에 돌아갔고, 나는 내심 그날이 기다려진다. 

그는 또 어떤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모습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어렵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밌고 웃긴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데, 그럴때면 이 괴리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혼자 곰곰히 고민해보기도 했다.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는 다른 사람이듯, 함께하는 상대 그리고 상황에 따라 사람의 성격 또한 다르게 발현된다. 사람은 입체적이고, 단면만 보고는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 이렇게 보면 맞다. 살다보면 입장이 변하기도 하고, 하루만에 의견이나 생각이 변하기도 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판단은 단면적이다. 

나는 그 사람의 모든 순간을 알 수 없기에, 내가 접한 파편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는 것은 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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