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크렁 Aug 29. 2022

서울의 밤은 잔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알콜 앤 더 시티

나는 찐 서울 토박이다. 

빼곡한 빌딩 숲을 보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길거리에 사람이 없기라도 하면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진다. 


방금 계산해보니 약 10,000일 이상의 밤을 꼬박 서울에서 보낸 셈인데,  

아직도 나는 내일의 밤이 기다려지고 설렌다. 


서울의 밤은 왜 특별할까?




| 마음을 채우는 사람들 


해가 지고 업무가 끝나면 진짜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회사에서의 나는 이상하게도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다. 하기 싫은 말도 해야 하고, 보기 싫은 사람도 봐야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회적인 내 모습은 사실 썩 맘에 들지 않는다. TPO에 맞춘 오늘의 옷 스타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퇴근 후 바로 집에 가기는 어딘가 조금 아쉽다. 

몸과 마음은 약간 지치긴 했는데, 조금 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찾아온다. 


허기진 배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면 나와 비슷하게 배고픈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 보인다. 주변의 식당마다 사람이 없는 곳이 없고, 조금 맛있거나 분위기가 좋아 보이면 웨이팅은 또 기본이다. 줄을 서서까지 밥을 먹어야겠다는 기분은 아니어서 그나마 한적해 보이는 식당을 골라서 앉는다. 메뉴를 유심히 골라보지만,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나는 사실 아무거나 먹어도 다 맛있다. 


배를 채우고 나면 살짝 놀고 싶은 기분은 드는데 친구를 부르자니 시간이 애매하고, 뭔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놀고 싶기도 한데 어디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또 있을까? 


'반모 술지트'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열어 사무실로 사람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을 것 같았고, 그냥 하루라도 사람들이 찾아준다면 함께 술 먹으면서 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직도 첫 모임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이번이 첫 모임임을, 그래서 약간 서투른 호스트임을 당당하게 밝혔고 다섯 명에게서 진심 어린 응원을 받았다. 술자리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으니 다들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간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 출근은 매우 늦어졌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이 있어 이 모임은 계속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후기가 모이고, 모임 날짜가 하나둘씩 마감되면서 정말 다양한 직업과 나이의 사람들이 찾아와주었다. 우리는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며 웃고, 서로의 고민거리를 공감하고, 각자의 지친 마음들을 위로했다. 서로 일면식도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작은 공간에 모여 짧게나마 온기를 함께 지피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었다. 모임이 끝난 이후에는 또 다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어제의 온기로 또 하루를 버티어 낸다. 


다시 오시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또 한껏 어깨가 올라갔었다고 한다. 오는 사람들도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단순히 술 마시면서 목적 없이 만나는 모임인데, 후기가 좋아서 그 이유가 궁금하다고. 나는 항상 같은 대답으로 일관한다. 호스트 보다,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오늘 분위기는 너네가 스스로 만드는 거야, 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한데 그거까지는 다들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잔을 부딪치면


가끔은 나도 갑자기 마음이 귀찮아지는 날이 있다. 이미 낮에 사람들과 잔뜩 이야기했다던가, 업무 스트레스로 혼자 있고 싶은 날. 도저히 웃으면서 환영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들. 


그래도 약속이니까, 나는 화요일 7시가 되면 문을 열어놓는다. 

이제는 익숙하게 와인잔과 위스키잔을 착착 세팅하고, 안주를 접시에 예쁘게 담아 모든 사람의 손이 모든 음식에 닿을 수 있도록 놓고, 각자의 자리에 마실 수 있는 생수 한 병씩을 놓아둔다.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물을 많이 마신다는 것을 모임하면서 처음 알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면 웃음을 장착하고 톤을 한껏 높여 반갑게 맞이한다. 웃지 않는 모습이 무서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의식적으로 입술 끝을 관자놀이에 붙여본다. 우리는 어색하게 어디서 왔는지, 날씨가 덥지는 않은지 같은 소소한 안부를 나누고 정확히 7시가 되면 반말 모드를 켠다


어색함에 잔은 빠른 속도로 부딪히고, 준비했던 와인 한 병은 금방 동이 난다. 와인을 다 비우면 와인잔을 치우고 위스키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신다. 공식적으로 한 잔씩 마시기로 되어있지만, 나는 술이 모자랄 것임을 알기에 다소 저렴한 위스키 한 병을 준비해 모두 비우도록 한다. 더 좋은 위스키를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아쉽지만 모두들 나는 위스키 맛은 잘 몰라, 하며 잘 먹어주니 다행이다. 맛보다 사람에 취하고 싶은 마음이 나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와인 한 병을 비우고 나면 아까의 지친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있다. 우리는 인생에 관해 얘기하고, 서로의 추억을 나누고, 농담이나 장난을 던지기도,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취한 사람들의 대화란 참 어디로 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껏 잔을 부딪치며 우리의 밤은 또 한번 지나간다. 

이 작은 도시 안의 더 작은 공간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잠깐이나마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다양한 모습을 마주하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