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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라이 Dec 31. 2023

글쓰기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을 한다

소소한 일상, 작은 행복의 기록 9 - '해이해지는 일'의 발견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위험한 욕망에 사로잡히면 나는 아이를 껴안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가슴속 무언가가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온전한 공간에 들어앉은 기분이 든다.




며칠 전, 둘째 아이의 졸업식이 있었다. 식은 10시에 학교 체육관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그러나 9시 20분까지 교실로 가면 아이가 상장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아이의 사진도 찍을 수 있다고 했다. 무조건 9시 20분까지 교실로 가자고 생각했다. 9시 20분에 시간을 맞추려고 마음을 먹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도통 글이 써지지 않았다. 새벽 3시. 시간은 충분했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운동과 샤워를 하고, 아침밥을 차려주고, 화장과 드라이를 하고, 꽃집에 들러 꽃을 찾아도 브런치에 올릴 글 한편 완성하는 것쯤이야 불가능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굴려본 바로는.




그런데 아침 6시가 다 되도록 단 하나의 문장도 쓰지 못했다. 아니 쓰고 지우고 하느라 소중한 시간만 썼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작은 재능과 그에 대한 희망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내 안에 머물러있던 어떤 따뜻한 것들이 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3시간 동안 좌절과 열패감을 느낀 몸은 죽어가는 동물처럼 딱딱해지고 뻣뻣해져 툭 건드리면 뚝하고 러질 것만 같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통하게 하고 물을 듬뿍 주어 메말라 가는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했다. 훼방을 놓자, 훼방을 놓자, 죽어가는 몸과 정신에 훼방을 놓자.




노기가 들어앉은 크기만큼 사랑스러운 것들을 그러모아야 했다.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음악, 향긋한 커피, 달콤하고 끈적끈적한 젤리, 나만의 노스탤지어 군고구마, 살짝 입을 벌리고 자는 아이의 모습, 보드라운 쿠션의 감촉, 생명을 위해 뛰는 심장 소리, 아이들의 풋풋하고 여리여리한 냄새, 거칠게 호흡하는 아이들의 숨소리, 시큼한 아이의 머리 냄새. 그러나 탐험가처럼 의도성을 품고 찾아 헤매는 것은 무용했다. 수집가처럼 목표한 대상을 찾아 모으는 것도 무효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무가치하게 변신하는 것들이었다.




좌표값 (0,0).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 봐야 했다.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이켜봐야 했다. 어떤 목적을 가슴에 품고 글을 쓰기 시작했던가? 왜 매일 글을 쓰려고 했던가? 이유는 단순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기록해 삶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 아련한 목적이 실체로 느껴지자 그다음 스텝으로 가는 것은 쉽고 간단했다. 해이해지자, 해이해지자, 나를 꽉 조이고 있던 것들을 무장해제시키자.




나를 무겁게 누르던 원씽을 내려놓았다. 내려놓기 전에는 원씽(onething)이 에브리씽(everything)이었는데, 내려놓자마자 원씽은 곧 낫씽(nothing)으로 바뀌었다. '단 하나의 문장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은 전과 다름없었는데,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졸업식에 갔다. 교실에서 웃고 있는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을 보니 마음이 몰랑몰랑해졌다. 체육관에서 졸업생들이 준비한 공연을 보니 뭉클뭉클해졌다. 초등학교에서의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자,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요리를 먹고 집에 돌아와 아이와 거실 바닥에 누우니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누운 아이 옆에 몸을 가까이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야구 게임을 들여다 보고, 아이의 말장난에 또 다른 말장난으로 응수하며 행복했다. 최근 뇌파 실험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행복의 전염과 나눔이 가능하다'고 한다(뇌는 행복을 기억하지 않는다, 미츠쿠라 야스에, 알에치코리아). 우리는 셋째까지 합세한 무장해제의 공간에서 함께 행복했다. 질서 없는 찰나와 또 다른 찰나 속에서 계속 행복했다.   




나는 몸이 빳빳해지고 생명이 꺼져가는 듯한 기분이 들면 아이를 껴안는다. 볼에 뽀뽀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쩌면, 자석처럼, 생명력이 강한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면 신기하게도 가슴속 무언가가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온전한 공간에 들어앉은 기분이 든다. 이 모든 것들은 계획성 없이 이루어졌을 때만 가능한 행복감. 뭐가 그리 급해 욕심을 부렸을까? 뭐가 그리 조급해 바짝 긴장했을까? 이건 입시를 위한 연주가 아닌데 말이다.



지금, 한 해의 끝에 서있다. 다사다난한 올 한 해 수고했다. 2023년의 무거운 것들은 2023년에 놓아두고, 가볍고 경쾌하게 2024년을 살아보자. 기분 좋은 일을 하며, 또 한 해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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