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술라이 Jan 03. 2024

거울의 아이들

소소한 일상, 작은 행복의 기록  11 - 아프면 쉬어 가자

아이들은 가장 크고 투명한, 그리고 가장 깨지기 쉬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때로 가장 어둡고 깊은 곳으로 내려가 덮어둔 현재와 묻어둔 과거까지 환히 내리비춘다. 내가 그 연약한 거울 앞에 설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퉁퉁 붓고 벌게진 나를 바라보길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느 때고 찬란하게 나를 들이비출 것이다. 단,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굉장히 약하고 여린 이 거울들은 매우 쉽게 깨지니 아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




거울을 보지 않아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늘 다니던 도로에 밤 사이 방지턱이 설치된 듯 찌그덕 찌그덕 눈알이 자주 멈춰 섰다. 눈을 굴릴 때마다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공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흐물거리는 눈곱이 앞을 가려 무언가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울 앞에 서니 핏물이 괴인 듯 눈알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문득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거울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오늘 눈이 좀 뻑뻑하네'라며, 다소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내 눈은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붓고 벌게져 있었다. 사람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는 숙명의 존재.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한쪽 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나를 휘덮었다. 아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를 걱정했다. 첫째는 아폴로 눈병일 수 있다며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검색했고, 셋째는 작은 손으로 내 눈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런 아이들 덕분에 조금은 치유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은 병원에 가보라며 나를 떠밀었다. 길건너에 있는 병원의 의사는 전혀 큰일이 아니라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염증이 생겼네요. 화면 보이시죠? 여기, 여기 물이 찼어요."

물 한줄기조차 구별해 낼 수 없었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아픈 건가요?"

의사의 설명이 끝난 뒤, 개미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는 균이 들어갔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균이 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소리일까? 균은 필시 통증을 동반한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통증이 있는 걸로 보아 균의 침투를 예상해 볼 수 있다는 소리일까? 알 수 없었지만 묻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안약을 넣고 셋째가 종이접기 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셋째는 며칠째 '광전사' 접기에 여념이 없었다. 작은 손으로 꼼지락 거리는 셋째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셋째는 앞뒤로 색이 다른 광전사의 망토를 가리키며 "안쪽이 흰색이라 안 멋지지?"라고 아쉬운 듯 말했다. "페이퍼빌드님은 어떻게 했어?"라고 내가 묻자, 페이퍼빌드는 양면이 모두 검은색인 색종이를 쓴다고 했다. 음, 이걸 어쩌지, 집에 양면 색종이는 없는데,라고 속으로 웅얼거리고 있는데, 셋째가 방긋 웃으며, 광전사 어깨에 붙인 망토 사이즈에 맞게 단면 색종이를 잘라 덧붙이면 된다고 했다. 기특하군.




균 때문인지 으슬으슬 추워졌다. 좋아하는 커피 대신 뜨근한 허브티를 한 잔 마시며 온기를 모아 모니터 앞에 앉았다. 뻑뻑한 왼쪽 눈은 '방전되었음'을 알리며 씀벅거리다 감겼다. 한쪽 눈을 감고, 긴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 다른 쪽 눈으로 빈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꼬맹이 셋째가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엄마가 글을 써야 하는데, 몸이 안 좋네"라고 중얼거리듯 말하자, 꼬맹이는 "그럼 안 쓰면 돼."라고 야무지게 답했다. 딱 맞는 꼬맹이의 말에,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아프면 쉬어가라는 그 말.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그 말. 수정 가능한 생에 대한 그 말. 멀고 먼 시절에 들었어야 하는 그 말.  




곁에 있는 세 아이들은 가장 크고 투명한, 그리고 가장 깨지기 쉬운 거울이 되어 나를 각각 비춘다. 때로 가장 어둡고 깊은 곳으로 내려가 덮어둔 현재와 묻어둔 과거까지 환히 내리비춘다. 내가 그 연약한 거울 앞에 설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퉁퉁 붓고 벌게진 나를 바라보길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느 때고 찬란하게 나를 들이비출 것이다. 단,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굉장히 약하고 여린 이 거울들은 매우 쉽게 깨지니 아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 한 번 깨지면 비추길 두려워하고, 주저할 것이라는 것. 어제 나를 비춘 그 거울을 보며 나는 가까스로 뜨고 있던 오른쪽 눈을 마저 감았다. 아주 달고 편안한 휴식을 오랜만에 즐겼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