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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an 27. 2022

제18화 - 해외건설이야기

한국기업이 세계 최고층 건물들을 지었다

  이제 해외건설 이야기다. 해외건설은 건설업체가 인력, 건설기자재 등을 자국에서 반출하거나 외국에서 조달하여 해외에서 시공하는 건설사업을 일컫는다. 토지에 부착된 시설물을 만드는 건설사업의 특성상 제품의 이동이 아니라 생산요소를 반출하여 현지에서 생산하는 형태로 수출하는 것이다.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동남아 진출이 해외건설 효시다     

  1965년 태국의 파타니와 나리티왓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현대건설이 수주했다. 우리나라 해외건설의 효시다. 총연장 98km의 2차선 도로를 540만달러에 낙찰 받아 1966년 6월부터 1968년 2월까지 시공했다. 540만달러는 당시 환율로 14억5천만원이었고, 현재가치로는 747억원 정도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 현장      

 

  현대건설은 이 공사의 경험을 토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월남전에 파병했던 1965∼72년 기간 중에는 미국 공병단이 발주한 베트남에서의 공사를 다수 시공함으로써 해외건설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고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월남전이 종식되자 송출된 인력과 장비를 활용하기 위한 신시장 개척이 요구됐다. 국가적으로는 석유사태로 야기된 불경기를 타개하고, 고용창출과 국제수지 적자를 보전할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 시점에서 중동지역이 유망한 해외건설시장으로 등장했다. 중동 산유국들이 유가 상승으로 축적된 오일달러를 활용하여 건설 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중동진출로 해외건설 강국이 됐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가 발주한 도로공사를 수주하여 중동지역 진출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어 주택, 항만, 담수화공장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함으로써 198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가 해외건설 강국으로 부상했다. 1981년에는 해외건설 수주액이 137억달러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해외건설 수출국이 됐다. 이 해 중동지역이 전체 해외건설 수주의 92%를 차지했다. 137억달러는 1981년 우리나라 총 수출액 212억달러의 거의 3분에 2에 해당하는 금액이고, 당시 중동에 진출한 우리 근로자 수는 무려 16만명에 달했다. 

  한국과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왕래가 잦아져 대한항공이 김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를 운항하는 직항노선을 개설했다. 중동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경제개발계획 추진에 필요한 재정의 원천으로 활용됐을 뿐 아니라 두 차례의 석유사태를 극복하고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주베일 항만 공사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시공했다     

  이 시기에 우리 기업이 건설한 대표적인 프로젝트인 주베일 산업항만 공사를 소개한다. 이 공사는 수심 10m의 바다 16km2(2km✕8km)를 매립하여 항구와 기반시설을 조성하고, 30만톤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 가능한 해상 유조선 정박시설(OSTT; open sea tanker terminal)을 설치하는 것으로 현대건설이 9억3,114만달러에 수주했다.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약 4,600억원인데 이는 국가 예산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수주 과정을 보면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당초 현대건설에서는 두 번째로 낮은 가격을 써낼 입찰자(second lowest)의 투찰가를 12억달러로 예상하고, 그보다 25% 낮은 금액에서 추가로 2.5% 더 낮춰 8억7천만달러에 입찰가격을 써넣기로 결정했다. 수주책임자는 이명박 부사장이었으나 입찰장에 들어간 전갑원 상무가 사전에 정한 금액에다 6천만달러를 추가하여 9억3천여만달러로 투찰하면서 공기를 8개월 단축하는 안을 제시함으로써 현대건설이 낙찰자로 선정됐다. 그래서 공사기간은 당초 44개월에서 1977년 1월부터 36개월로 확정됐다. 이명박 부사장은 수주 성공의 보상으로 1977년 사장이 됐다.  

  저가 수주였음에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공사를 진행하여 3천만달러 이상의 이익을 남겼다. 해상 석유수출 터미널을 건설하는 데는 18m✕20m✕36m규격의 중량 550톤인 재킷(jacket) 89개를 이어서 설치해야 했다. 이 재킷들을 현지에서 제작하지 않고 울산에서 만들어 동・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지나 걸프 만을 통과하는 장장 12,000km의 항로를 바지선으로 19항차에 걸쳐 운송했다. 1항차에 35일 이상 소요됐다. 다행스럽게도 태풍과 사이클론은 모두 피했으나 여덟 번째 항차에서 바지선이 대만 선박과 충돌하여 재킷 일부가 파손됐다. 파손된 부품을 뭄바이 항에서 수리한 후 계속 주베일로 운송했다.

주베일항 석유수출터미널                      18m✕20m✕36m규격의 재킷

 공기 단축과 공사비 절감을 추진하다보니 공사 진행에 무리가 있었다. 1977년 3월과 1979년 8월에는 근로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왕정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위는 중대 범죄로 간주된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 방위군이 투입되어 시위를 진압했다. 이로 인해 현대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로부터 이후 발주되는 공사에 수주 기회 박탈이란 제재를 받았다. 1980년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는데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기업이 '세계 제8의 불가사의리비아 대수로를 건설했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우리나라의 해외건설 수주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석유공급 과잉과 이에 따른 유가하락으로 중동 산유국들의 수입이 감소함에 따라 발주물량이 급감했다. 또한 자국화 전략을 추진함으로써 외국기업의 수주 기회는 더욱 줄어들게 된 것이다. 시장이 좁아지자 국내기업 간에 수주를 둘러싼 과당 경쟁으로 저가 수주가 빈발했던 데다 노임상승 등으로 가격경쟁력 우위도 상실하게 됐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기업이 쾌거를 이룬 대형공사 수주가 있었으니 리비아 대수로 공사가 그것이다.

  1953년 서방 석유메이저들이 유전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리비아 내륙 깊숙한 사하라 사막 아래에 있는 대규모 대수층(帶水層)을 발견했다. 저수량은 나일강 유량의 200년분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량으로 확인됐다. 1984년 리비아 정부는 이 지하수를 해안지역의 트리폴리, 벵가지 등 대도시와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지역 등 농경지에 공급하는 관개공사를 25년 동안 추진하여 2009년에 완공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리비아 최고실권자였던 카다피 대령은 이 프로젝트를 ‘세계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로 불렀다.

  대수로 공사는 5단계로 구분하여 추진하기로 했으며, 이후 목표연도를 5년 연장하여 2013년 완공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장장 5,524km에 달하는 수로를 통해 하루 650만톤의 용수를 공급하는데 150억파운드(25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500m 깊이의 우물 1,300개를 관정한 후 여기서 퍼 올린 물을 운송하기 위해직경 4m에 길이가 7.5m고, 중량이 75톤에 달하는 원통형 송수관(PCCP; prestressed concrete cylinder pipe)을 이어서 사막에 매설하는 공사였다.

  동아건설산업 컨소시엄이 동남부 지역의 수원지에서 벵가지를 연결하는 1단계 대수로 공사를 수주했다. 벵가지는 카다피 반대세력이 우세한 지역이기에 정치적 요인에 의해 1차 사업의 대상지로 선정됐다. 공사금액은 39억달러였으며, 1984년 1월에 착공하여 1991년 8월 완공한 후 통수식이 거행됐다. 총 1,874km의 수로를 건설하는데 연인원 1,100만명의 인력과 550만대의 건설장비가 동원됐다.

리비아 대수로 사업 개요                                   원통형 송수관  

  서남부 지역의 자발하소나 취수장에서 트리폴리까지 1,730km의 송수관 라인을 연결하는 2단계 사업 역시 동아건설산업 주도로 건설됐다. 공사비는 66억달러였고, 1990년에 착공하여 1996년 8월에 완공됐다. 3단계 사업도 동아건설산업의 수주가 유력했으나 2003년 회사가 파산함에 따라 더 이상 리비아 대수로 사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 이후 동아건설산업을 인수한 대한통운의 자회사 ANC가 3단계와 4단계 사업에 참여했다.

     

해외건설 진출 지역이 다변화됐다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 해외건설은 아시아 시장을 발판으로 활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지역의 수주액이 전체의 60% 이상을 점하고, 발전소, 화학공장, 담수화시설 등 고부가가치의 플랜트공사 비중도 높아졌다. 그러나 인건비가 지속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해외공사에서 우리나라 인력이 참여하는 비율은 1987년 96.5%에서 1996년에는 8.7%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기업이 수주하여 시공한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공사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건물은 말레이시아 국영에너지 기업인 페트로나스의 본사 빌딩으로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소재한다. 88층의 트윈타워로 높이가 452m이며, 타워1과 타워2는 41층과 42층에 설치된 스카이브릿지로 연결돼 있다. 1993년에 착공하여 1998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높이 509m인 타이베이101 빌딩이 완공된 2004년까지 6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타워1은 일제 강점기에 수풍댐을 건설한 일본 유수의 건설업체인 카지마(迫間)건설이 담당했고,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타워2를, 스카이브릿지는 극동건설이 시공했다. 타워1과 타워2 공사는 한・일 건설기업 간 자존심을 건 경쟁으로 진행됐다. 삼성건설의 타워2 공사는 타워1에 비해 35일 늦게 시작했으나 1개 층에 7일 소요되는 공사를 4.5일로 단축해서 시공했다. 치밀한 공정계획이 뒷받침되었음은 물론이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부르즈 할리파

  지금은 보편화된 Self-climbing Form 공법이 세계 최초로 이 공사에 사용됐다. 통상 콘크리트를 중간층까지 올려놓고 펌프로 보내는 윈치운송법 대신 바닥에서부터 펌프로 쏘아 올리는 콘크리트 압송법을 건물 높이가 380m 될 때까지 적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카지마건설이 시공한 타워1보다 열흘 먼저 공사를 마침으로써 삼성건설이 판정승을 거두었다. 이러한 콘크리트 압송법은 이후 삼성건설이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를 건설할 때도 사용됐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유가가 상승함에 따라 중동지역에서 건설 붐이 다시 일어났다. 우리나라는 2010년 186억달러에 달하는 UAE 원전 수주에 힘입어 사상 최대치인 716억달러의 해외건설 수주액을 기록했고, 2014년까지 매년 650억달러 내외의 수준을 유지했다. 2015년 이후 유가 하락으로 해외건설 수주는 감소 추세를 보였으나 2020년에는 351억달러로 반등했다. 

     

세계에 가장 높은 부르즈 할리파 빌딩도 우리 기업이 건설했다     

  2000년 이후 우리나라 기업들이 해외에서 시공한 두 건의 공사를 살펴본다. 먼저 두바이 신도심에 랜드마크로 세워진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 건설공사다. 부르즈는 아랍어로 탑이란 뜻이고, 할리파는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인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하얀의 이름에서 따왔으니 번역하면 ‘대통령의 탑’인 셈이다. 163층에 높이 828m로 세계 최고(最高)의 빌딩이다. 연면적은 495,850m2고 2004년부터 5년 동안 시공하여 2010년 1월 4일에 문을 열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주계약자로 시공했으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건설 시 도입했던 콘크리트 압송법을 여기에도 적용했는데 452m까지 쏘아 올림으로써 또다시 신기록을 달성했다.

  두 번째로 소개할 프로젝트는 보스포루스 제3교 건설공사다. 아시아 지역인 동이스탄불과 유럽의 서이스탄불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세 번째 교량을 건설하는 공사였다. 총연장 2,164m의 다리인데 흔들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장-현수 복합 방식으로 건설했다. 주탑의 높이는 세계 최고인 322m고, 주탑과 주탑 간의 거리인 경간은 1,408m다. 사장교로서는 경간이 세계 최장이다. 참고로 여수반도와 광양의 묘도를 연결하는 이순신대교는 현수교인데 경간 거리 1545m로 건설됐다. 이순신 장군의 탄신연도인 1545년에 맞춘 것이다.

  8차선 도로와 복선철도가 놓인 보스포루스 제3교는 현대건설과 SK건설이 공동으로 시공했다. 공사금액은  6억9,740만달러였으며, 2013년 6월에 착공하여 38개월만인 2016년 8월에 완공했다. 이로써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교량은 1973년에 개통된 제1교와 1988년에 완공된 제2교와 함께 3개로 늘어났다. 또한 해협 남쪽에는 제3교와 비슷한 시기인 2016년에 개통된 해저터널이 있는데 SK건설이 공사에 참여했다. 제1교는 영국과 독일 건설회사의 컨소시엄이 시공했고, 제2교는 일본과 이탈리아 기업이 건설했다.

  보스포루스(Bosporus)는 암소(bos)가 건넜던 개울(porus)이란 뜻의 고대 그리스어인데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됐다. 신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제우스신이 연인인 이오(Io)와 사랑을 나누다가 본처 헤라에게 발각되자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켰다. 이를 알아차린 헤라가 제우스로부터 암소의 인계를 요구하여 건네받은 후 쇠파리로 하여금 암소를 끊임없이 괴롭히도록 했다. 암소가 쇠파리를 떨쳐내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 다녔는데 먼저 지나간 곳이 이탈리아반도 남부와 그리스반도 사이의 이오니아해였고, 이후 지나쳤던 지역 중 하나가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해협이었다. 그래서 이 해협을 보스포루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보스포루스 제3교 전경

자료 : 현대건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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