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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Mar 14. 2022

제31화 - 수출이야기

자투리 처분이 수출 인센티브였던 시기도 있었다

  2021년도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전년비 25.8% 증가한 6,445억달러로 집계됐다. 역대 최고치다. 돌이켜보건대 우리나라의 수출은 1964년 처음으로 1억달러를 넘어섰다. 그해 실적치는 1.2억달러였다. 이후 1971년 10억달러(실적치는 10.7억달러), 1977년 100억달러(100.5억달러), 1995년 1,000억달러(1,251억달러), 2011년과 2018년에는 각각 5,000억달러(5,552억달러)와 6,000억달러(6,049억달러)를 돌파했다. 이후 다시 5,000억달러 대로 감소했고, 2020년의 경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5,128억달러에 그쳤다.

     

우리나라는 세계 8위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했다     

  수출과 수입을 합한 무역규모는 2011년 1조달러를 상회했으나 2015년과 2016년에는 저유가로 인해 1조달러 이하로 떨어졌고, 이후 회복됐지만 2020년에는 코로나19에 따른 경기침체의 여파로 다시 1조달러 미만으로 축소됐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는 중국, 미국, 독일, 네덜란드, 일본, 홍콩에 이은 세계 7위의 수출대국이며, 수출과 수입을 합한 무역규모는 1조2,596억달러로 세계 8위에 올라있다.

  수출에서 수입을 차감한 무역수지는 1986∼89년 4년 동안 3저 호황에 힘입어 흑자를 기록했으나 다시 적자 기조로 전환됐다. 그러나 IMF 환란을 극복하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 등 노력으로 1998년에 다시 흑자로 전환된 이후 현재까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을 제외하고는 흑자 기조를 지속하고 있다. 1977년의 경우 무역수지는 적자였으나 무역외수지와 이전수지를 합한 경상수지는 최초로 흑자를 기록했다.

수출입추이(1965-2021)

  자료 : 한국무역협회

     

수출주도형 공업화와 대외지향 전략이 성공했다     

  1960년대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역점을 두었다. 정부 주도로 외자를 도입하여 생산시설을 구축하고 잠재실업 인구를 생산적 인적자본으로 전환해 산업인력으로 육성했다. 우선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 위주로 생산하여 해외시장에 수출했는데 주 수출지역은 미국이었다.

  초기에 수입대체냐 수출주도냐를 두고 공방을 벌였으나 국내시장이 협소하여 대내지향형 수입대체정책(import substitution policy)은 효과가 미미하다고 판단하여 해외시장에서 유효수요를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1960∼70년대의 유리한 무역환경도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의 성공에 한몫을 거들었다. 1967년 GATT에 가입하고, 對선진국 수출 시 특혜관세를 적용받는 GSP(general special preference) 제도를 십분 활용했다.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지원 제도가 시행됐다. 금융기관에 신용장(L/C; letter of credit)을 제시하면 수출대금의 90%에 해당하는 금액의 대출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일반대출 금리 20%의 절반도 안 되는 연리 9%의 저금리가 수출지원금융에 적용됐다. 수출용 원자재를 수입할 때는 자동 수입 허가는 물론 관세가 감면됐고, 원자재의 일정 비율 이상만 사용하여 수출하고 나면 나머지 원자재는 국내 판매가 허용됐다. 즉, 감모(減耗; loss)율 범위 내의 자투리에 대해서는 처분권이 수출업자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수출 실적에 따라 수입권을 부여하는 링크제도 시행됐다.

  수출지원 기관도 운영했다. 정부는 기업들의 해외시장 개척을 지원하기 위해 1962년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를 설립했다. 이 기관은 현지 지원 조직으로 해외무역관을 설치했다. 현재는 업무 영역에 투자 유치를 포함시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로 확대 개편됐다. 1969년에는 중소기업제품의 수출을 대행해 주는 고려무역이 설립됐다. 그러나 UR 협정이 체결된 1995년 이후 모든 수출지원 제도는 폐지됐다.

  수출지원에 소요되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수출특별회계자금(수출특계자금)을 운용했다. 후에 무역특계자금으로 명칭이 변경됐는데 1969년부터 수입액의 일정 비율을 징수하여 조성했다. 처음에는 1%를 적용하다가 0.1% 수준까지 낮춘 후 1998년에 폐지됐다. 누계 징수액은 약 7,000억원이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조∼5조원 정도로 추정된다. 대부분 박람회 개최 등 수출지원 용도로 운용됐으나 서울 삼성동에 소재한 무역회관과 코엑스 건설비로도 사용됐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매월 개최됐다. 이 회의의 명칭 역시 무역진흥확대회의로 변경됐다. 수출의 날을 제정하여 수출유공자를 표창하고 100만불, 500만불, 1억불 등 금액별 수출탑도 수여했다. 수출의 날은 1964년 11월 30일 그해 수출액이 1억달러를 돌파한 것을 기념하여 11월 30일로 정했으나 2011년 이후 12월 5일로 변경됐다. 2011년 12월 5일에 무역 1조달러가 달성됐기 때문이었다. 수출의 날도 1990년부터는 무역의 날로 명칭이 바뀌었다.

     

수출지원제도의 역기능도 있었다     

  정책이 시행될 때 대체로 순기능이 크지만 역기능도 있기 마련이다. 수출지원 제도도 마찬가지다. 수출금융을 이용해 급성장했다가 파산한 기업 이야기를 소개한다. 1975년 6월 신선호 등 5명의 20대 청년들이 자본금 500만원으로 오퍼상 형태인 율산실업을 창립했다. 이 기업은 설립한 지 3년도 되지 않아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됐다. 초기의 성장은 중동지역 수입상이 발행한 신용장을 통해 이루어졌다. 수출지원금융 제도를 최대한 활용했던 것이다.

  쿠웨이트 현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원길남을 쿠웨이트지사장으로 임명하고 적극적인 수주 활동을 전개했다. 원길남은 추후 독립하여 원기업을 설립한 자다. 시멘트, 합판 등 건자재 수출에 주력했는데 운송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한 기상천외한 방식의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중동 바이어들로부터 ‘납기는 꼭 지키는 사업자’란 신용을 얻었다.

  당시 중동 붐이 크게 일었으나 항만시설 부족으로 항구마다 극심한 체선 현상은 불가피했다. 율산은 선박을 직접 임대하여 수송하면서 고의로 선박에 불을 질러 우선적으로 입항하기도 했다. 화재가 나면 비상 상황으로 간주돼 바로 입항허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박에서 헬기로 화물을 수송하거나 전차상륙함(LST)을 이용하여 트럭을 임시도로가 있는 해안에 상륙시켜 운송하는 기발한 수법을 쓰기도 했다.

  그 결과 창립 4년 7개월 만에 14개 계열사와 8천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 그룹으로 성장하여 ‘재계 신데렐라의 탄생’이란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1979년 4월 신선호 회장이 외국환관리법 위반과 횡령죄로 구속됨에 따라 율산은 도산했다. 신 회장과 회사 소유의 부동산은 자금난으로 매각 절차에 들어갔다. 서울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는 2000년대 초반 소유권이 애경그룹으로 이전됐다가 통일교재단을 거쳐 신세계그룹에 넘겨졌다. 현재 잠실 롯데월드인 석촌호수 부지의 경우 소유주가 한양과 롯데 순으로 바뀌었다.

  율산과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제세(制世)의 이창우나 원기업의 원길남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제세는 ‘세상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이창우 등은 2000년까지 세계시장을 평정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당시로는 생소했던 삼각무역도 활용했다. 대만과 스페인에서 조달한 시멘트 등을 제세 명의로 중동에 수출했던 것이다.

  원기업은 원길남이 율산과 마찰 끝에 쿠웨이트지사장을 그만두고 독립하여 설립한 회사였다. 1976년 1억달러 짜리 신용장으로 수출금융을 일으켜 기업을 만들었다. 초대 한국 이슬람교 사무총장과 쿠웨이트 공무원이었던 때 구축한 중동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신용장을 확보했고, 직접 생산하거나 하청을 통해 제품을 공급받아 수출했다. 그러나 두 기업 모두 지나친 사세 확장과 경영 미숙으로 몇 년을 버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수출지원금융이 수출을 증대하는데 효자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던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합판 제조에 원목 감모율을 최대한 활용했다     

  합판은 섬유와 함께 1970년대의 수출 주종품목이었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원목으로 합판을 만들어 수출했는데 동명목재와 성창기업 등이 대표적인 합판 제조업체였다. 동명목재는 1965년 기준 재계 서열 1위 기업이었고, 1970년대에 7년 연속 수출 1위를 기록했다. 동명목재 강석진 대표는 1974년의 경우 소득신고액 47억8,547만원에 8억1,134만원을 납세함으로써 종합소득 및 납세자 순위 1위에 올랐다. 부산은행 설립 시 최대주주로 참여하는 등 활발하게 사업을 전개했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된 불운한 기업인이다.  

  당시 합판을 제조할 때 10%의 원목 감모율이 적용됐다. 수출용 원자재로 100톤의 원목을 수입할 경우 합판 원료로 90톤의 원목만 사용하여 수출하면 관세 전액이 면제됐던 것이다. 합판 생산업체들은 감모량을 3% 정도로 최소화했다. 나머지 7%는 원목 상태로 비싼 값에 가구제조업체 등 국내 시장에 판매하여 큰 수익을 올렸다. 합판 수출량이 많아질수록 원목의 내수 판매량이 증가하고 이윤도 커지는 구조였다.

  수출의 일등 공신 중 수출전선의 최일선에서 바이어들과 상담하여 거래를 성사시키는 세일즈맨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상담 시에 제품 견본을 지참한다. 직물이나 양식기 등을 수출하는 세일즈맨들은 이른바 이민가방이라고 하는 천으로 만든 대형가방(캐리어)에 샘플 조각이나 제품을 담아 전 세계를 누볐다.

  직물 수출이 전공인 세일즈맨은 자조적으로 걸레쟁이라 했고, 양식기의 경우는 이동 시에 덜거덕거리고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면 샘플이 찌그러진 형태가 되기에 거지라고 지칭했다. 자동차, 철강 등 지참이 불가능한 제품을 파는 세일즈맨은 카탈로그만 지참했기 때문에 세련된 신사로 불리었다.

    

수출 품목은 고도화됐다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주종 수출 품목은 철광석, 중석 등 광산물과 오징어, 활선어 등 수산물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섬유, 신발, 가발 등 경공업제품이 주종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1980년대 이후 수출상품 구조는 중화학공업제품 중심으로 전환됐다. 1990년대에 들어와 반도체가 거의 매년 1위 수출품목을 유지하고 있으나 자동차나 선박, 석유제품 등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석유제품의 경우 2008년과 2012년에 각각 수출액이 366억달러(총수출의 7.8%)와 561억달러(10.2%)로 1위 수출품목에 올랐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제품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줄곧 수출 10대 품목에 들어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원유를 1차 정제한 후 다시 저품위 유종을 재정제해서 휘발유, 경유 등 고급유를 추출하고 이들 석유제품을 수출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유가 시기에는 수출액이 커지게 된다. 그래서 저유가는 우리의 수출 및 무역규모를 감소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10대 수출품목(백만달러)                    


수출대상국도 다변화됐다     

  對중 수출이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급증하여 중국은 2003년부터 미국을 제치고 최대 수출상대국으로 부상했다. 2020년 대중국 수출은 1,326억달러로 총수출의 25.9%를 점했다. 다음으로는 미국(741억달러, 점유율 14.5%), 베트남(485억달러, 9.5%), 홍콩(307억달러, 6.0%), 일본(251억달러, 4.9%), 대만(165억달러, 3.2%), 인도(119억달러, 2.3%) 순이다. 對베트남 수출이 많은 이유는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이 높은 데다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이 급증함에 따라 이들 기업에 대한 수출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 일본, EU 등 對선진국 수출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나 이후 개도국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다. 주종 수출품목이 경공업제품에서 자본재나 중간재로 투입되는 중화학공업제품으로 전환됨에 따라 이를 원자재와 투자재로 사용하는 개도국들의 수입 수요가 증가한 데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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