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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Jun 26. 2020

기자정신 그리고 '얘기되는 것'의 덫

그는, 그들은 왜 그렇게 취재했을까

"별로 얘기가 안 돼."


여기에서'얘기가 된다/안된다"는 말을 쓴다.


"그게 말이 돼?"라고 할 때의 말이 된다와는 다른 뜻이다.

얘기는 재미있는 혹은 의미 있는 혹은 문제가 될만한 이야기, 즉 뉴스거리다. 우리는 늘 얘기되는 것을 찾아다닌다. 수많은 이상한 제보들이 들어오지만 대부분은 얘기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목숨이 달려있다며 목청을 높이는 내용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 "얘기가 되지 않" 아이템이라 킬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 그 누군가에게 나는 "뭣이 중헌지 모르는" 기자놈이 되기 십상이다.) 


기자가 되기 전에는 기자정신은 정의를 좇는 것,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것, 어떠한 위험과 어려움을 뚫고도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진 정확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진짜 기자들'은 으레 그런 대단한 것을 매 순간 추구하며 살 것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했다.

 

막상 기자가 되고 보니,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은 매일 '얘기되는 일'을 찾아다니는 이었다. 사회 통념과 어긋나는 사건들, 들여다보면 겉보기와는 조금 결이 달랐던 문제들, 어딘가에 영향력을 미칠 것 같은 변화들, 곳곳에서 무언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덜 거창한 일들이었다.


그렇게 얘기되는 것을 찾아다니다 보면 우연찮게 얻어걸리는 의미 있는 사건들도 있으며, 어쩌다 보니 한 번 판 걸 계속 파던 끝에, 결국 동료들에게 'ㅇㅇ 전문기자'라는 놀림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할 게 없어서 이딴 걸 기사랍시고 쓰느냐"는 욕도 얻어먹었다.




기자 혼자서만 그렇게 나쁜 취재를 한걸까


채널A의 이동재 기자 관련 진상조사위원회 글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그가 취재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한 것은 사실이다. 부장은커녕 데스크조차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다가, 뒤늦게서야 너무 멀리까지 온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어제 그는 해고 결정을 받았고, 책임자들도 결코 적잖은 징계를 받았다.


나는 이동재를 잘 모른다. 어쨌든 채널A는 그 기자를 심사 끝에 용해 5년을 넘게 키웠고, 그는 채널A라는 회사를 만나서 일하다 보니 지금의 이동재 기자가 된 것이다. 사람은 배운 대로 행동하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화된다.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녹취록을 "법조기자 6개월 하 5분이면 만드는 창작"이라고 한 그의 증언은 꽤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 그럴 수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해왔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


이동재라는 기자가 그렇게 취재를 하게 된 건, 그렇게 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만든 건, 그런 취재 방식을 떠올리게 된 건 온전히 본인의 아이디어일까. 이동재라는 개인의 문제라고, 그는 기자정신 같은 건 애당초 없고, 사실은 사기꾼에 가까운 악의적 기레기라고, 그렇게 욕하는 게 과연 온당할까.




"열심히 하려 욕심부리다 그랬겠지"

취재를 하다 보면 "이 정도면 좀 얘기되는 것 같다" 싶은 수준의 별 것 아닌 것으로 시작했지만, 커지고 커져서 알고 보면 권력의 핵심부에 가까워지는 때도 있다. (물론 매우 드문 일이다.) 뉴스 소비자들이 어떤 이슈에 열광하는 이유 단순히 선정적인 흥밋거리여서가 아니라, 그런 곳에서 무언가 말로 똑떨어지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권력의 냄새를 느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최순실 사건도 부분부분 떼어보면 사실 대부분 그런 이슈들이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이트 부서, 특히 법조를 필두로 하는 사회부 기자들의 과격한 취재는 미덕에 가깝게 여겨져 왔다. "진짜 얘기되는 것들"은 당연히 취재하기가 쉽지 않고, 그런 것들에 다가가려면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게 취재하다가 가끔 사고가 나더라도 윗분들이나 주변 동료들은 "열심히 하려고 욕심부리다 그런 것"이라고 정상참작하거나 때로는 위로까지 하고 넘어갔다. 결성과가 나오면 그것을 치하하고 재빠르게 다음 취재로 넘어다.


을 사리지 않는 훌륭한 기자들과 더불어, 방향을 조금씩 잘못 잡은 기자들의 잘못된 취재도 그렇게 '열정'의 탈을 쓰고 용인되어 왔다. 경력이 많은 기자들은 가끔씩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얼버무리는 척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쳤던 사고들을 거의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좀비 공정

어제 읽은 권석천의 <사람에 대한 예의>에는 이런 고백이 있다.

법조기자로 일했던 나도 좀비 공정에 갇혀 있었다. 1. 계속해서 쫓기듯 허겁지겁 일했고 2. 검찰 시각에서 피의자를 마녀 사냥했고 3. 기사를 작성하면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시각각 기사를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물먹지 않기' 위해, '깨지지 않기' 위해 넘어질 듯 말 듯 비틀거리며 달리기를 매일 거듭했다. 선배들이 물려준 좀비 공정 밖으로 뛰쳐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이 모든 건 '기자정신'이라는 수식어로 포장된, '얘기되는 큰 건을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점철된 좀비 공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기자 개인의 과시욕과 허세에서 비롯된 탈선,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상급자들의 직무유기만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건 '꼬리 자르기'가 아니라 본질을 외면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안 그래도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그를 두고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미안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이동재를 조졌던 MBC의 기자들을 비롯해, 이런 좀비 공정을 통해 길러진 기자들 중, 이동재가 비난받았던 모든 요소요소에서 자신은 100%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우리는 그러한 공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을까, 아니,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까.


#커버: V30. 아마도 강서 한강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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