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철수 씨(34,남)이라고 쓰지 않는가
언론사에는 '스타일북'이라는 것이 있다. 언뜻 듣기엔 디자인이나 패션 매거진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면의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만들어놓은 규정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있다)
- 나이 계산은 출생연도로만 한다 (만 나이와 다른 소위 '신문나이'라고 부른다. 1980년 1월 20일생이라도 신문나이는 만 나이 36세가 아닌 2017-1980=37세)
-대략 어떤 시간대쯤을 이야기할때 한겨레는 오전 9시'께', 동아는 오전 9시'경', 조선은 오전 9시'쯤'이라고 쓴다. "지난 1월 5일"이라고 쓰는 곳도 있고 그냥 "5일"이라고만 써야 하는 곳도 있다. 기자가 마음대로 쓰는 게 아니라 언론사마다 정해져있는 '스타일'이다.
-이름도 마찬가지로 홍길동 씨(24)라고 쓸지, 홍길동(24)씨라고 쓸지, 홍아무개(24)씨라고 쓸지 정해져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이 신문 저 신문 싸그리 다 읽기 때문에 막상 입사를 하고 나면 남의 회사 스타일과 우리 회사 스타일이 머리 속에 뒤죽박죽되어 엄청 헷갈린다.
하여튼 입사한 뒤 직접 보고, 기사, 메모를 만들면서 우리 회사의 '스타일'에서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성별 표기방식을 규정한 이 부분이었다.
기사의 성격이나 문맥상 여성임을 드러낼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여성임을 밝힌다.
예) 강다혜(23 ․ 여) 씨는…
다만, 여성임이 드러나 있는 경우에는 이를 생략한다.
예) 미스코리아 강다혜(23) 씨는…
요컨대, 여자는 여자라고 말해주는게 원칙이라는 것이다.
사실 기사의 성격상, 문맥상 여성을 드러내야 할 경우가 많지는 않다. 명확한 근거나 기준도 없다. 그냥 대부분은 쓰고, 어떨 땐 안 쓴다. 수습기자들도 그런 걸 판단하라고 배우지 않는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은 기본적으로 파악해야하고, 여성인 사람은 꼭 '여'라고 명기하라고 배운다. (대신 '남'은 굳이 안 써도 됩니다. 디폴트 값은 남성이니까.)
다시 말해 '여'를 밝히는 것은
'여성임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 때'가 아니라
'여성임을 감춰야할 필요가 없을 때"다.
웬만하면 쓴다는 것이지만 사실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
스포츠면에서는 아직도 '여제(女帝)'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는다. 스포츠는 종목별로 남녀 스코어가 따로 집계되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검사, 여경, 여교사, 여학생은 도대체 언제쯤 생명이 다하는 단어가 될까? '여류(女流)'라는 단어를 놓고 조선일보는 뉴스Q에서 혐오용어라고 지적하면서도(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에서는016/12/28/2016122801160.html) 다른 면에서는 여류소설가, 여류문단이라는 단어를 버젓이 사용한다(http://edu.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29/2016122902097.html). 애초에 이런 표현을 사용할 근거도 명분도 없으니 나오는 모순인 셈이다.
언론에서 사용되는 접미사 '여-'는 습관적이다. 의미없는 '여' 표기는 관성이다.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라면 남/여를 둘 다 쓰든가, 의미가 없을 때라면 둘 다 안 쓰든가.(그리고 정말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 사람의 '생물학적 성'만을 보고 성별을 '추정'해서 강조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언론계 내부에서도 이게 필요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다. 남성이 대부분이던 성비도 많이 달라졌고 성평등 의식도 커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참 징글징글한 게 그놈의 '습관'과 일관성이다. 지면의 통일성을 위해서는 전 부서에 "아아, 오늘부터는 '여' 안씁니다. 다시 한 번 전 사원과 기자들에게 알립니다. 오늘부터는 모든 기사에서 '여'를 쓰지 않습니다"하고 신신당부하고 이유를 납득시키고, 그런 뒤에는 모두가 신경써서 그동안 가져왔던 습관을 고쳐야 하니까. 개인적으로는 '여'를 내 손으로 내 기사에 알아서 먼저 넣지 않는 편이지만, 굳이 데스크가 넣으면 그냥 두는 것이 결국 지금의 형편이다. 간결을 위해 "여 좀 뺍시다!"라고 해야하는지 정보를 위해 "남 좀 넣읍시다!"라고 해야하는지는 여전히 확신이 없다.
#커버: Hawaii. 2015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