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니까 하나 물어보자"
"기자니까 하나 물어보자, 야 니가 생각하기에도 유병언이 죽은 것 같니?"
"기자니까 네가 더 잘 알겠지만, 7시간 동안 나는 정윤회 만났다고 생각한다"
"기자들끼리는 뭐라고 얘기하냐? 니들끼리는 정보가 다 통하잖아"
"네가 기자니까..."
누구나 명절이 싫은 이유가 한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좋은 이유야 어찌됐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을 것이다. 명절만 앞두면 나오는 얘기. 공부는 잘 하냐, 반에서 몇 등 하냐, 대학은 어딜 갈거냐, 애인은 있냐, 결혼은 언제 하냐, 애는 언제 낳냐, 돈은 얼마나 버냐...
수많은 '명절에 듣기 싫은 말' 시리즈 중에서 '나 같은' 기자가 듣기 싫어하는 건 "네가 기자니까 나 하나만 물어보자"로 시작하는 말들이다.
언제까지나 아기같아 보이기만 했을 손녀가, 조카가 세상에나 기자가 됐다. 그것도 우리집에 배달오는 바로 그 종이신문 기자가 된 거다. '기자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자기들이 아는 게 100이라면 그 중에 10만 꺼내는 사람들이잖아? 내 조카, 내 손녀도 그런 기자란 말이지? 이야 대단한 사람이 우리 집에 있네. 그 때 그 꼬마가 이제 말이 통하는 어른이 다 됐네!'
이 때부터 어른들은 나를 붙잡기 시작한다. 특히 정치부, 사회부를 겪은 나에게는 아주 격앙되고 신이 나 죽겠는 말투로 "야 네가 기자니까 더 잘 알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로 자신의 온갖 정치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견해를 쏟아놓는다. 내가 보기에 7시간동안 박근혜는 정윤회랑 놀아난게 틀림없다, 야 봐봐라? 니가 몰라서 그렇지, 그게 갑자기 나온 얘기가 아니라 너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사람이었어, 얘. 아니, 모른다고 하지 말고~ 네가 세월호도 취재를 했었고 그러니까 더 잘 알 것 같아서 궁금해서 물어보는거야. 근데 유병언은 죽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왠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다 조작했다는 소문이 나잖니? 사람들이 의심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니까? 그나저나 네가 보기에는 김무성이는 어떻냐? 실제로 보면 좀 괜찮니 사람이?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 무식하기만 하고 있지..........
어른들이 나를 앉혀놓고 세상에서 수집해온 각종 유언비어들을 풀어놓며 중간중간 추임새를 부추길 때마다 난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치? 맞지? 아니니?"라는 말에 대해서 "삼촌이(또는 할머니가, 또는 외숙모가) 다 맞아요"라는 대답만 내놓는 자판기가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아진다. 이를테면 이런 대화다.
-ㅇㅇ야 물론 니가 기자니까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전문적이겠지만 그래도 하나 내가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사드 있잖아 사드. 너는 사드가 좋다고 생각하니?
=아 저 사드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게을러서 제대로 공부도 못했고 오히려 저보다 더 잘 아실 거예요.
-에이 그래도 니가 기잔데 나보다는 더 들은게 많지 않겠니? 그냥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해서. 그게 진짜 우리나라에 좋은 거니?
=저 진짜 모른다니까요. 그냥 신문에 나오는 정도밖에 몰라요. 뭐 우리끼리 숨기고 그런게 아니라 진짜 몰라서 그래요
-아니 그럼 ㅇㅇ야 그냥, 딱 생각했을 때 좋은 것 같은지 싫은 것 같은지만 한 번 얘기해봐봐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내가 잘 모르지만 사드가 아무리 생각해도 있지~~~
명절만 되면 내가 도망가고 싶은 이유는 전 부치기 싫어서도 아니고, 시집 언제가냐는 쓸데없는 질문 때문도 아니다. 넌 기자니까, 내 똑똑한 이야기 좀 들어봐 응?? 이라는 눈빛 때문이다. 한 친척은 내게 "이런 식으로 명절에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도 듣고 여론도 알아가고 그러는거야"라고 또 일갈하신다.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1년 지난 지금 말고 진작 좀 전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손주나 조카들 중에 기자가 있고, 만날 때마다 입이 근질거린다면
-의견이나 취재 뒷이야기가 궁금하실 경우, "~는 사실은 어떤 거니?"라고 그냥 드라이하게 물어봐주시고
-주장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주장이 이 계층, 이 집단의 여론이니 아주 주의깊게 들으라는 말씀만 안 하셔도 그 대화는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우리도 간만에 맞은 빨간 날들에는 평소에 취재원들에게 겪는 감정적 스트레스를 최대한 피하고 싶다. 기자가 정말 모든 걸 다 아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끼리만 무슨 아주 사적이거나 고급스러운 정보를 공유하는 비밀결사체도 아니다. 기자들은 정말 자기 분야가 아니라면 모르는 것 투성이이고, 아무리 모르는 것이라고 해도 당장 오늘 취재하라고 하면 미친 듯 급히 달려 아는 척이라도 해가며 취재해야 하는 게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고로운 것이다. 돌아오는 명절은 부디 스트레스가 아닌, 적당한 동기부여의 계기가 되길 매번 간절히 바란다.
#커버: 다음웹툰 <간이역에 겨울이 오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