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특유'일 건지...
기사에도 클리셰라는 것이 있다. 습관처럼 쓰는 쓸데없는 사족이거나, 재미도 감동도 없는 진부한 표현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면을 낭비해서 문제인 게 아니라, 재미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젠 좀 그만 꺼내야만 하는 클리셰가 하나 있다면 그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라고 난 망설임 없이 얘기할 것이다.
네이버가 제공하는 훌륭한 품질의 서비스 중 하나는 '뉴스 라이브러리'. 여기에서 "여성 특유의"라는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가장 오래된 결과는 무려 1935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아니고 '먼동이 틀때'라는 연재소설의 14편이다. "숙자도 나이 찻스니까 형이 결혼하는것을 본다면 여성특유의 감정으로 샐죽해질것만은 상상할수 잇는 일이라치더라도 이러케까지나 머리를싸매고 나서리라고는 현숙도 까마득이 생각지 못한바엿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자=감성적인 존재라는 인식이지만 일단 여기는 소설적인 표현이니 그렇다고 쳐도 상관없을 것 같다.
최초로 기사에 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수십년이 지난 뒤인 1962년 8월 9일자 경향신문. "「女子(여자)의窓(창)」을 通(통)해 속삭이는 女性(여성)의마음과生活周邊(생활주변)"이라는 사회면 기사다. '여자의 창'이라는 고정코너에 투고하는 여성 글쓴이들이 식물을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며 이렇게 표현한다. "여성특유의 연약함, 아름다움이 식물성과 묘하게 관련지어 있었다". 당시 가정주부 압도적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집안의 화초를 보는게 주로 주부였던 건 너무 당연한데, 그게 왜 여성의 '특유의 연약함'과 연관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맛보기다.
본격적으로 이 표현들이 쓰이는 것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일반화되기 시작할 때부터다. 두 가지 기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여성이 기사에서 하나의 주체로 다뤄지기 시작할 때,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이 '남성의 일자리'에 진출하던 때.
첫번째 기점에는 절반은 여전히 여성의 감성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것들이 많지만 스물스물 '여성 특유의 델리키트함'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한 예로, 동아일보의 1966년 3월 24일 '보람을 안고' 시리즈 첫번째 회에서는 역 안내원을 다룬다. 기사의 마무리 문장은 이렇다. "그들은 기계적인 입놀림만을 되풀이 하는것이 아니라 여성특유의 따뜻한 마음과 밝은 음성으로,「서비스」를 한다. 생색내지 않고 오만하지 않게". 1968년 12월 3일자 매일경제 3면에는 전화로 주부 부업을 안내해주는 서비스를 소개하며 "보세가공품을비롯해서 여성특유의 섬세한솜씨로 할수있는 일거리를찾아보기로한다."는 문장이 아~주 수려한 문체로 쓰여있다. 이런 식의 표현은 80년대까지 주구장창 이어진다.
90년을 전후로 본격화되는 두번째 기점에서는 기존 남성의 영역을 여성이 깨뜨리고 들어오는 현상에 당황하며 어떻게든 이것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크게 고민을 한 것 같진 않다. 그 해석이 대부분 "현대사회에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자상하며 꼼꼼한 면모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라는 데에 멈춰있기 때문이다. 찾아보면 정말 지겨울 정도로 많다.
-KDI근무중 합격 李恩守(이은수)양 軍(군)법무관 첫 紅一點(홍일점)(1990.10.31경향신문)
=여성 군 법무관이 탄생하자 "자칫 경직되기쉬운 군사법정에서 여성특유의 온화함과~~"
-첫 여성 형사기동대장 홍영화 경위 여성들 범죄피해 보호에 최선(1991.09.10한겨레)
=합기도 3단, 태권도 초단에다 엠16 사격교관을 할 정도의 명사수이지만 "그러나 10년째 해오고있는 꽃꽂이 솜씨도‘사범 수준’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여성 특유의 섬세함도 갖고 있다"고...
-여성동장 시대 막올라(1993.07.01한겨레)
=여성 동장이 재등장하자 "유능한 여성인력의 활용과 함께 여성 특유의 섬세한 동행정을 통한‘가깝고 친근한 동사무소’운영이 기대된다."
-여름극장가 女(여)감독작품 2편"눈길"(1993.08.07경향신문)
="남자감독들과는 달리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과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데 그게 뭔지는 잘..
-한국 여자축구 불길 댕긴다(1993.04.03한겨레)
="한국여성 특유의 끈기와 지혜를 갖고 있는 우리선수들이‘척박한 토양’을 뚫기"를 바라며 이젠 한국여성 특유의 까지 나왔다.
-국내1호 江南署(강남서) 金淑眞(김숙진)경위「22세 처녀」가 刑事(형사)반장 됐다(1993.10.10동아일보)
=제목에 심지어 '처녀'라고 박아놓고 한다는 말이 "오히려 여성특유의 섬세함으로 수사과정에서흔히 발생하는 인권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90년대 이후의 뉴스들을 찾을 수 있는 네이버 뉴스에 "여성 특유의"를 검색하면 지금도 1만건 가까운 기사가 나온다. 이젠 더 이상 어딘가에서 최초의 여성ㅇㅇ이 등장하는 시대가 아닌데도 그렇다. 그냥 굳어진 표현이다. 섬세함, 부드러움, 꼼꼼함, 세심함, 감성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반면 "남성 특유의"라는 검색어는 겨우 500건의 뉴스결과를 보여준다. 그나마도 뒤에 붙는 단어들은 '남성 특유의 피부패턴' '남성 특유의 묵직함'.....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전형적인 성역할 구분이라고 말하는 것도 창피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특성을 '여성 특유의 것'이라고 규정짓는 일을 멈춰야 하는 이유는 최소한 두 가지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이기 때문에 '최소한'이라고 토를 다는 것이다.
1. 실제로 여성 특유의 것이 아니다.
=이번 최순실 사태를 지켜보면서 경악한 것 중에 하나는 청와대 사람들의 꼼꼼함이었다. 특히 실수를 없애기 위해 모든 통화를 녹취한 정호성, 수백권의 수첩을 사용하며 대통령의 업무지시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기록한 안종범의 꼼꼼함은 놀랄만도 했다. 그건 그냥 그 사람들의 꼼꼼함이다. 남성인데 '여성 특유의 꼼꼼함'을 가진 게 아니고, 남성 특유의 꼼꼼함도 아니다. 그냥 꼼꼼한 거다.
=어떤 여성이 이것저것 재지 않고 질러버리거나 자기 마음 가는대로 행동해버리면 말괄량이다, 털털하다, 시원시원하다, 가끔은 상남자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반면 어떤 여성이 이것저것 재(?)고, 내가 이렇게 했을 경우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자세히 고민한 끝에 행동하면 부드럽고 자상하다고 얘기한다. 똑같은 여성인데도 '여성 특유의 세심함'을 가진 것은 후자뿐이라는 설명을 납득할 수 없다. 그냥 전자는 쿨하고 후자는 세심한 사람일 뿐인데 '특유'라는 단어가 들어가면서 어려워지는 것이다. 특유는 어떤 이들에게만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성질이란 뜻 아닌가.
2. 여성 특유의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얻는 이득은 없다.
=여성 특유의 감성적인 면... 그것은 어찌 보면 세상이 '남성 특유의 강인함과 냉철함'을 강요당한 남성들에게서 거세하려 했던 모습일 수도 있다. 역사 속의 수많은 남성 시인과 예술가들이 아름다운 세레나데를 불렀고 한없이 부드러운, 한없이 연약한, 한없이 혼란스러운 모습의 인간상을 그려왔다. 이런 특성들을 '여성 특유'라고 묶어놓는 것은 그런 특성을 갖지 '못한' 여성들, 그리고 그런 특성을 갖고 싶거나 가졌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남성들을 옥죄는 것일 뿐이다. 언론은 자신들이 여론형성의 기능을 한다고 우쭐해하지만 정작 이런 안좋은 습관들은 자주 되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여성 특유의 자상하고 부드럽고 꼼꼼하고 사려깊은 면. 이게 나쁜 특성들인가?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이 누구나 겸비하면 좋았으면 좋았지 절대 나쁠 수가 없는 특성들이다. 사실 나쁘게만 보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은 양쪽 모두를 엿먹이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 여성은 능력이 아니라 섬세함으로 이 자리에 있게 됐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 남성은 그동안 섬세함이라고는 눈 뜨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는 무딘 사람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더 이상 세상에는 여성이 진출해서 놀라울 법한 직업군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제는 '여성이 어떻게 이런 곳까지?' 라는 의문을 가질 일이 드물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그 여자가 일을 잘해서라기보다는 여자라는 아이콘이 되잖아. 시대가 바뀌는데 우리가 이렇게 앞서 나간다고 내세울 수 있는 옵션 하나 더 단 거야. 이제 우리 업계에도 좀 말랑말랑~ 하고 사근사근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미지 쇄신도 하고 말이야, 여성 고객들만 따로 좀 편하게 응대할 때 내보낼 수도 있어야지 않겠어?"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해석이었다면 이제는 그냥 업무적으로 충분한 (또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여성인 사람이 응당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왜 굳이 거기에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렇게 기여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사족을 붙여야겠는가.
#커버: 경향신문 1970년 1월 26일자. '여성'
대학을 졸업하는 숙녀 1년생을 위하여
직장에서 유능하고 칭찬받는 여성이 되려면 어떤 점을 미리 알아둬야 할까? 아직 우리 현실에서 직장을 갖게 된 여성은 선택된 여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중략) 남성동료에게는 직업인으로서 주어진 일처리에는 동등한 입장이 되어야 하지만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해주도록 노력할 것. (중략) 화장은 하지 않은듯한 화장이 오히려 신선하고 귀엽다. (후략)
여성 특유의 무언가를 강조한다는 것, 또한 남성 특유의 무언가를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감정노동의 강요'다. 성차별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빼고서도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표현한 말이다. 40~50년 전의 기사는 지금 보면 어떻게 일간지에서 대놓고 이런 말을 쓸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구석이 한 둘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현들도 10년 뒤에 다시 보면 처벌받을 감이 아니라고 확언하기 어려울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