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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Mar 14. 2017

아침마다 대국민 오디션을.

포털뉴스는 예선전

"제 점수는요..."

일간지 기자들은 아침마다 오디션을 보는 기분이다. 온라인을 강화한 회사들은 실시간으로 하루에도 몇 번 씩이겠지만.


전날 쓴 조간용 기사는 다음날 새벽시간에 온라인에 올라간다. 그와 동시에 거의 네이버와 다음이라는 양대 포털의 뉴스페이지에도 올라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날 쓴 내 기사의 조회수가 궁금하다. 제 아무리 자기가 쓴 기사라고 해도 PV(페이지뷰)를 볼 순 없다. 네이버 '많이 본 뉴스'에 올라갔나? 오늘의 주요 뉴스에 있나? 모바일 웹 메인페이지에 떴나? 여기 없으면 PC버전 웹에는? 댓글이랑 좋아요는 얼마나 나왔지? 네이버에는 별로네, 다음에서는? 우리 회사 온라인 홈페이지에서는?

...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포털은 일종의 예선이다. 포털이 수십만개의 기사들 중에 내 기사를 메인에 노출해주냐 마냐에 따라 차이는 엄청나게 커진다.

일단 예선에 올랐다 싶으면 대국민 심사가 남아있다. 기사가 얼마나 화제가 되느냐가 관건이다. 페이스북은 대체로 좋아요의 개수가 댓글수보다 많지만 네이버는 반대다 .댓글이 수십배 더 많은 경우도 많다.

미담 기사를 제외하면 대체로 누군가에 대한 욕이 한바닥이다. 기사에서 비판하는 대상을 욕하거나(ex. 최순실 사태의 주역(?)들), 기자를 욕하거나(ex.기레기 새끼 돈 얼마나 처먹으면 이딴걸 기사라고 쓰냐), 이도 저도 아니면 자기들끼리 욕한다(ex. 성차별을 다룬 기사에서 남녀의 상호 혐오현상이 나타남). 어쩌면 네이버의 댓글란은 어디 하나 욕할 곳 없는 사람들이 한마디 내뱉을 수 있도록 마련된 것 같기도 하다.



왜 '많이 본 뉴스'에 집착하나

선정성의 노예, 제목으로 낚시질, 조회수에 목숨건다, 뉴스 가치보다는 노출에만 집착한다 등 수십가지 욕을 먹는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애쓰고 공들여 만든 기사를 아무도 읽지 않은 것 같을 때의 그 허탈함은 다소 난감한 기분으로까지 이어진다.


사회적으로 정말 의미있는 주제를 잡아서,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사실들을 드러내고,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방 팔방의 꼼꼼한 취재를 거친 뒤, 훌륭한 컨텐츠를 갖고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혹은 언론노출을 꺼려왔던 누군가를 인터뷰해서, 새로운 시각의 비판적 대안까지 제시하며, 동시에 읽기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치고 고치고 밤까지 계속해서 다듬었는데. 다음날 온라인에 보니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누가 읽기는 읽은 건지도 의심스럽다. 왜지? 이 의미있는 기사가 왜 나 하나만의 외침으로 끝나는 거지? 내가 너무 잠식되어서 못느꼈지만 사실은 나 홀로 주장하는 독선이었나? 취재원을 얼마나 힘들게 설득해서 쓴 기사인데, 왜 아무도? 읽지도 보지도 연락하지도 않는 거지? 정말 훌륭한 기사라면 누군가는 읽고 반응을 보여야하는 거 아닌가? 질문은 이어지고 이어져 결국 여기까지 온 뒤에야 끝난다. '나 이거밖에 안 되나?'


일반기업에서 내가 쓴 보고서를 내 상사들만이 읽고 평가한다면 내 기사는 내 상사들을 거쳐 온라인뉴스 편집자들을 거친 뒤에야 일반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큰 기사는 조회수 수십만건이 훌쩍 넘어간다. 사실 정말 조회수가 높은 것은 정치부 쪽의 재빠른 통신기사들이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한다. 빠른게 실력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토록 애써서 만든 기사는 완전히 땅속으로 묻혀버리는 반면, 그동안 재탕 삼탕에 더이상 우러나올 것도 없는 주제를 대충 현장 느낌 살려서 만든 뻔한 타사 기획이 괜히 댓글 수천개를 달아가며 화제가 되고 있으면 괜한 울분이 몰려올 때가 없진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 회사의 정말 의미있는 단독기사는 묻히고, '한 매체에 따르면'이라는 애매한 전제를 달아 그대로 베껴쓴 타사 온라인 기사가 오히려 가장 많이 본 뉴스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왜 그렇게 집착하냐고? 신문은 일기장이 아니고 학술지가 아니고 시집도 아니고 회원가입제로 운영되는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 글도 아니다. 우리는 읽히기 위해 쓴다. 내가 쓴 글이 많이 읽히고, 그 글이 어딘가에 영향을 미칠 때에야 비로기사는 생명력을 갖는다. 아무도 안 읽는 기사는 죽은 기사다. 사람들이 읽고 그 기사가 말하는 주제에 대해 공감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할 때에 기사는 살아난다.



이름과 얼굴을 걸고 일한다는 것

물론 누구나 읽는 글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내 글이 토론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욕 한마디 얻어먹기 싫어한다는 것은 모순된 바람이다. 나도 안다. 내 기사를 읽을 사람들이 바로 위의 상관 극소수 몇명이 아니라 수십 수백만명의 독자인 동시에 기사의 내용과 직접 연관이 있는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이해관계가 있는 또다른 거대한 집단들이라면 이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알면서도 쉽지 않은 이유는 내 기사에는 내 이름이 있고, 이메일 주소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내 기사를 읽으며 저작자의 이름 석자를 알 수 있고 여차하면 메일을 보내 100가지의 반박 50가지의 욕 1가지의 응원을 해줄 수 있다. 기자칼럼의 경우에는 사진까지 올라간다. 신문지면에는 조그맣게 들어가는 것이 왜 온라인에는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들어가는지. 사진이 올라가면 내 이름만 욕을 먹는게 아니라 얼굴까지 욕을 먹는다. 지나가다가 보면 어떻게 해줄것같은 위협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국민 오디션의 결과가 현피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막상 당한 사람들은 섬뜩하다고들 한다.


오히려 낯설고 신기한 것은 가끔씩 댓글지대가 청정한 모습을 볼 때다. 공감합니다, 라든가 이런 기사를 써주어서 좋다, 라든가 "기사가 소설같다고요? 현실은 이보다 더합니다"라는 업계 당사자들의 토로, 기사를 보고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내용들. 이에 더해 "혹시 돕고 싶은데 연락처를 알 수 있겠느냐"는 메일들이 더러 오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댓글들이 가득한 희귀한 모습을 보면

-더러움을 폭로하거나,

-우리 사회의 관심을 재분배하는 역할.

중 기사가 할 수 있는 일 중 적어도 두 번째 역할은 잘 해낸 거구나.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바꿔나가거나 응원해줘야하는 어두운 곳에 한줄기나마 빛의 구멍을 터주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힘을 얻는다.


어쨌든 내 이름과 얼굴을 걸고 일했다는 것. 잘하더라도 뿌듯함보다는, 못했더라도 부끄러움보다는 '여기에서 더 뒤로 물러나지 말고 앞으로만 간 사람으로 기억되자. 잘하자'는 다짐을 매번 더 하게되는 일이다. 그 다짐은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닌 수십, 수백만명 이상의 독자들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커버: 2017.02.28 서울시청 앞. V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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