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송월의 패션과 김여정의 배
한동안 잊고 지냈던 모란봉악단 현송월 단장이 다시 언론 전면에 등장했다. 현송월과 작곡가 윤상의 투샷을 보고 있노라니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1, 2월이 기억난다. 남북 경색국면이 급격하게 완화됐다. 각급에서의 만남이 강둑 터지듯 몰려들던 시기였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가장 할 일 없던 부처였던 통일부가 역대급 풍년(?)에 일손이 부족해졌다. 나를 비롯해 많은 매체에서 통일부에 파견인력을 한둘씩 보내 놓는 통에 통일부 기자실이 북적북적 미어터진 겨울이었다.
어느 부서나 그렇듯, 통일부 역시 오래 출입하지 않으면 사안이 흘러가는 것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곳이었다. 오밤중에 갑자기 "내일부터 통일부 가라"하는 지시 하나만을 받고 바로 다음날 아침 광화문에 있는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한 나는 더더욱 (정신적으로) 길을 잃은 상태였다. 선배들은 걱정하지 말고 시키는 거나 잘 해달라며 상당히 부담을 덜어줬다. 고공취재와 분석기사는 선배들이, 자잘한 기사와 외곽 취재, 전문가 코멘트 따는 것 정도는 내가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자잘한 기사 하나가 현송월의 패션 기사였다. 1월 21일이었다. '북한판 소녀시대'라는 모란봉 악단의 현송월, 총살당했다는 낭설이 퍼졌던 바로 그 현송월이 삼지연관현악단이라는 이름도 처음 듣는 북한예술단의 수장 격으로 공연 장소를 답사한다며 내려온 바로 그 날이다. 평창동계올림픽 국면에서 처음으로 내려온 북한 대표단인 데다 스타성까지 높은 사람이니 취재 열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뉴스 채널에서는 동선 하나하나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잠시 중계를 멈출 때에는 하루 종일 누군가를 스튜디오에 불러앉혀놓고 현송월의 나이는 몇 살이니, 현송월의 패션은 어떤 스타일이니 하는 쓸데없는 대화를 나눴다.
'최룡해가 왔으면 룡해의 헤어스타일과 구두 가격 같은 걸 논하고 있었을까' 한숨쉬며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도 기사 지시가 떨어졌다. 현송월의 패션으로 박스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다. 오후 네 시경이었다. 지면 배치에는 산업부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었다. 패션업계가 산업부 나와바리이기 때문에 대충 적어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산업부 후배에게 물어보니 저희도 현송월이 걸쳐 입은 게 얼마짜리인지 알 수는 없단다. 물어본 내가 미안했다.
딜레마에 빠졌다. 비록 얼굴마담이라 할지언정, 현송월 단장은 북한의 예술단 수장 자격으로 내려왔다.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한다고 결정한 뒤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내려온 북한 인사다. 그녀의 말 한마디는 물론 의미 있다. 향후 북한 예술단의 공연 내용이나 형식을 전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과 동선 하나하나도 물론 의미 있다. 공연 장소 등을 암시하는 메시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송월의 패션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만일 그녀가 두른 것이 제대로 된 사치품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의미는 있다. 국제사회는 북한에 사치품 수출을 금지하는 다양한 경제제재를 걸어놓았기 때문에, 만약 그가 두른 것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값의 제품이라면 국제제재를 어긴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구두를 신고 무슨 머리를 하고 입술에 어떤 색을 발랐는지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게 과연 지면에 실을 가치가 있는 내용인가... 궁극적으로는 이것이었다. "현송월이 아주 나이가 많았더라면, 현송월이 남자였다면... 그래도 썼을 기사인가?" 그리고 내 생각에 대답은 'NO'였다.
동기들에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오후 네 시였는데,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투덜거리는 것 밖에 없었다. 물론 항의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항의할 자격이 없는 상태였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배, 현송월 패션 분석은 정말 기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이야기할 거면 "그러니까 이걸 이런이런 기사로 대체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아이디어 제시를 해야 하는데 당시 나에게는 그 능력이 부재했다. 겨우 마음을 다 잡은 것은 "모란봉악단도 일종의 걸그룹이잖아. 연예인 패션 기사라고 생각하면 눈길 가는 건 당연하니까. 마음 편하게 써~"라는 누군가의 한 마디 덕분이었다.
마감이 급한 대로 일단 내용은 찾아봐야 했다. 그녀의 패션 중에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목도리였다. 모피인 것은 확실한데 털이 상당히 길었다. 색은 검었고, 은빛 털도 섞여있었다. 저 정도 사이즈에 저 정도 털 길이면 담비나 토끼는 아니고 여우, 그 중에서도 은여우일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구글에 여우 목도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통 여우인 것으로 보였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한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가격대를 대략 검색했다. 같은 디자인은 없었지만 대략 수십만 원대에 판매되는 제품들이 눈에 띄었다. 사려면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대충 썼다. 어떤 온라인 기사에서는 촌스러운 디자인으로, 국내에서 보기는 힘들다 어쩌구 저쩌구 타령을 해놨지만, 거기까지 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과거 그녀의 에르메스 백 논란을 한 줄 걸치면서 국제제재 위반과 묶어보려는 뉘앙스만 덧씌워보았을 뿐이다.
여우 목도리를 검색한 쿠키가 남아서인지, 한동안 내 크롬 브라우저에는 어느 사이트를 가든 그 백화점 쇼핑몰의 여우목도리 제품 정보를 담은 광고가 구석탱이에 떠 있었다.
현송월 다음으로 온 방문자 중에서 가장 눈에 주목받은 것은 누가 뭐래도 김여정이었다. 남한 땅을 밟은 최초의 소위 '백두혈통'인 김여정은 모두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한국 언론에서 그녀의 모습을 근거리에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던 첫날이었다. (이전에는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에서 제공(?)한 것을 딴 저화질 사진뿐이었다.) 턱을 치켜든, 어찌 보면 다소 오만한 태도,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로운 표정 하나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물론 현송월이 왔을 때처럼, 그녀의 패션도 관심의 대상이긴 했다. 워낙 수수했던 탓인지, 그 정도는 덜 했다.
하지만 현송월과 달리 김여정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김여정의 '배'였다. 한 선배가 어느 날 아침에 올린 기사 발제에서 '김여정의 배가 나왔다'는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상당히 어안이 벙벙했다. 정말 북한 기사에 대한 생각이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이젠 하다 하다 몸매까지 보는 건가?'라는 황당한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것이 임신 가능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잠시 뒤 정신을 차리고 다음 문장을 읽은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결혼과 출산은 어찌 보면 가장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 체제는 혈통으로 이어진다. 김정은이 가장, 어쩌면 유일하게 아끼는 여동생의 남편 역시 그들에 범접할만한 권력을 의미힌다. 하물며 혈육은 어떻겠는가. 또한, 그렇게 아끼는 임신상태의 여동생을 비행기태워 남쪽으로 보냈다는 것은 김정은이 대놓고 의지 표명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고작 김여정의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를 보고 추측해야 했다. 물론 김여정 결혼설, 임신설은 그전부터 여러 정보라인들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혹은 육안으로) 확인된 것은 없었다. 하기사, 우리 통일부는 김정은 남매의 나이조차 정확하게 파악을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상당히 기분이 불쾌했다. 내가 써야 하는 기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기사에는 어쨌든 김여정이 '마른 몸매에도 불구하고' '잘 보면 배가 다소 나온 것으로 보였으며' '높은 구두에서 낮은 구두로 갈아 신은 것 등을 보아'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써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불현듯, 예전에 지하철을 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어쩌다 그 앞에 서있던 나의 배를 한 번 보고 내 표정을 한 번 본 뒤 "앉으실래요?"라고 물어봤던 적이 있던 것이다. (내 몸무게는 BMI 수치로는 정상체중을 밑돈다. 아마 연 무뚝뚝한 내 표정을 본 뒤 초기 임신부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다.)
현송월의 패션과 김여정의 배는 결국 모두 기사로 실렸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절대 발제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도 그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상당히 끌거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중요한 정보를 내포하는 것일 수 있다면 어쨌든 써야 하는 게 우리 역할이기도 하다. 물론 둘은 궤가 다르다. 현송월의 패션 같은 기사는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기사이고, 앞으로는 아마 점점 줄어들 종류의 기사일 것이다. 김여정의 배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절대 권력자의 유일한 혈육의 결혼과 출산을 이런 식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것들이 기사가 되는 이유는 두 사람이 북한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온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다른 나라의 여성이었더라도 그랬을까. 패션이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면 3년, 5년 뒤 우리는 과연 남성 정치인들의 패션에 담긴 의미와 각 아이템들의 가격도 구구절절 분석하고 해석하고 있을까. 김여정의 임신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면, 그리고 임신이 숨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김여정 일행이 한국에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러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임신을 공식화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인 것으로 알려졌다"에 그쳐야 하는가. (물론 세계일보가 김여정 본인 피셜 둘째 임신이 맞다고 '단독'을 달고 보도하긴 했다.)
어쩌면 여성의 패션이나 외모를 분석하는 기사를 보고 발끈하는 것은 그저 내가 예민한 것은 아닐까. 청와대 만찬에서 어떤 메뉴가 나왔는지와 같은, 그저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읽을거리와 비슷한 기사인데 그저 내가 색안경을 끼고 불쾌해하는 것인가.
기사가 되는지 안 되는지, 가치판단은 언제까지나 어려울 것만 같다.
#커버: 2018.1.23. V30. 통일부 기자실에서 본 경복궁역 사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