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과 종이의 느낌을 구현하다
엄연한 기계인데 '기계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특이한 기계. mechanical keyboard를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한 것이리라. 하지만 확실히 가전제품이 아닌 '기계'의 강렬한 아우라를 내뿜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벽돌을 드는 듯한 충격적인 묵직함. 키보드에게서 무게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플라스틱과 플라스틱과 플라스틱과 금속 회로의 조합 아니던가. 그런데 무겁다. 정말로 1kg가 넘는다. 키들을 지지하는 상판은 언뜻 손이 닿을 때마다 차가운 감촉이 든다. 금속이었다.
-연필로 쓰는 듯한 서걱거림. 매끄럽거나 딱딱하거나 뻑뻑한 느낌을 모두 벗어나 '서걱서걱'거리는 소리를 구현했다. 종이의 소리, 나무의 소리에 다가가진 못하지만 종이의 '느낌', 나무의 '느낌'에 가까워지는 산뜻한 마찰력이 키 하나하나를 누를 때마다 살아난다. 청축 키보드처럼 맑고 청량한 사운드 대신, 미숫가루같은 약간의 탁하면서도 시원한 느낌. 유리잔 안에 얼음을 가득 탄, 약간 진한 농도의 미숫가루 음료를 담아 흔들었을 때의 소리와 느낌. 페이지 다운 페이지 업 키가 엄연히 있지만 여러 칸을 한 번에 건너뛰는 대신 서걱임을 한번 더 느껴보고자 방향키로 한 칸씩 한 칸씩 삭삭 내려온다. 이게 더 재밌다.
-공중부양한 키들. 언젠가 아득히 쳐본 기억이 있는 타자기의 바로 그 높이. 어쩐지 검은색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들같은 느낌도 든다. 질서정연하다는 점만 빼면 다도해(多島海)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트북의 키들은 납작한 주인의 몸통에 짓눌려서 앉았다 일어날 공간도 없다. 이 타자기같은 것들은 손가락을 꽤나 깊이 눌러야만 한다. 운동에 비유하면 그냥 스쿼트와 점프스쿼트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싶다. 해(?)발 고도를 따지자면 노트북의 키보드가 움직이는 폭은 0mm~1mm 이지만 이 키보드는 5mm~15mm이다. 비로소 2D가 아닌 3D로 자판 하나하나가 살아났다. 보이지 않지만 만져지는 바닥면과 매끄러운 옆면, 빛나는 전면까지 직육면체가 손끝으로 만져진다. 부터 심연으로 손가락이 깊이 빨려들어갔다 순간 경쾌하게 튕겨나오는 느낌은 마치 흔들리는 빨간 불꽃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만 둘래야 그만 둘 수가 없는 타격감.
-노출콘크리트 인테리어가 지금처럼 유행하기 전, 실내에 콘크리트나 파이프, 온갖 전선들이 그대로 노출되어있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보였다. 가려져야 할 것이 가려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한편으로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더 간결하고 솔직해보일 수 있는지, 얄팍한 합판이나 싸구려 페인트칠보다 오히려 견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놀라운 의문을 품곤 했다. 그 때의 의문을 다시 품게 된다. 키패드도 없고 사이드가드도 없다. 키에서 곧바로 뚝 떨어진다. 상판은 조금의 여유도 없이 오로지 자판들을 위한 공간 외에는 싹둑 베어낸듯 정확한 크기다. 스페이스바 아래에는 대놓고 길쭉한 금속이 드러나있다. 사용자에게 전면 노출되어있는 키들을 보자면 솔직한 게 매력이다.
-빛이 난다....기계에서 빛이 난다. USB를 연결하는 순간 '팟' 하고 들어온 이 은은한 흰색 조명에 몸둘 바를 몰랐다. "세상에 빛이 난다니!"라고 잠깐 마음속으로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매끄럽고 새까만 각각의 자판은 유광과 무광 그 사이, 검은색 키들은 아주 적당한 은은함으로 이 작고 수많은 조명들을 조금씩 반사해줬다. 인쇄한 글자가 자판 위에 간신히 묻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으로 사출한 반투명 플라스틱 아래에서 은은하게 조명이 배어나온다. 잔뜩 모든 것이 낡아보인다. 약간은 두껍고 촌스러운, <STARWARS>나 쓰면 딱 어울릴법한 구식 폰트의 영문, 그리고 한글97에나 등장할 것 같은 꽤나 낡은 서체의 한글, 도스(MS DOS) 화면에서나 볼 수 있을듯한 기가 막힌 특수기호와 숫자. 빛나는 타자기의 아우라를 마구 내뿜는다.
한성 기계식키보드 GO187LED VIKI 갈축(brown switch)
사진: 2017.1.14. V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