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나이브하지 않은, 실험적 정부
201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웠던 대규모 실험은 핀란드의 기본소득실험(Basic Income Experiment)이었을 것이다. 선진국, 또는 선진국을 바라보는 나라들은 모두 이 실험의 성패에 이목을 기울였다. 정부는 실패하기를, 국민은 성공하기를 바라는 실험이었다. 핀란드는 2년짜리 실험을 더이상 연장치 않기로 했고, 각 국가의 정부들은 "기본소득실험의 실패"라고 외쳤다. 핀란드는 "실험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성공"이라고 주장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 논란으로 갈팡질팡하는 한국에, 핀란드는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KELA(사회보장국)의 사회복지제도 전문가인 Marjukka Turunen의 프레젠테이션 시간은 거의 토론시간에 가까웠다.
실험은 핀란드의 독특한 정책 운영방식 중 하나다. 기본소득실험은 문자 그대로, 파급효과를 알지도 못하는 정책을 전국적으로 일시에 도입하는 게 아니라 일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다.
기본소득실험은 '복지제도에 드는 행정비용이 너무 많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핀란드의 사회복지제도는 1930년대 국민연금제도를 도입하면서 수십년간 쌓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혜택의 가짓수가 40가지가 넘는다. 복지대상자들이 한 달에 얼마를 쓰는지 알기 위해 영수증을 일일이 제출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조건별로 액수를 계산해 어떤 연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지를 걸러야 한다. 이 작업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일자리가 있었다가 없어지기도 하면서 소득도 계속 바뀐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문서를 갖와서 또 다른 양식에 맞춰 신청서를 적어내야 한다.
기본소득 실험에 들어간 예산은 2000만 유로다.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에 들어가는 비용과 행정비용(일년에 2~300만유로)를 합치면 '똔똔'이다. 어차피 들어가는 돈이 똑같다면, 뭐하러 이렇게 복잡해야만 하는 걸까. 우리나라에서 아동수당을 상위 10%에도 지급해야하는지 논란이 일었는데 이와 비슷하다. 이 모든 걸 단순화해 '큰 그림을 그려보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하고자 했다. 기존정부 실업연금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노동의지를 꺾는다"는 점이었다. 켈라가 특히 주목한 것은 파트타임 노동자였다. 이들이 만일 자기사업을 시작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태로 일하게 된다. 일단 정규직 울타리 밖으로 벗어난 이상, 다시 어딘가에 고용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실업급여든 무엇이든 받으려면 "난 정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모든 근거를 들어 정부를 설득해야한다. 결국 이들 입장에서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느니 아예 백수로 사는 게 나은 셈이었다.
기존의 (거의) 모든 사회보장시스템을 하나로 합쳐서, 모든 사람에게 균일금액을 지급해보자는 아이디어는 그렇게 시작됐다. 정부는 전국의 25~58세 실업자 중 2000명을 무작위로 뽑아 2017년 1월부터 2년간 기본소득 560유로를 일괄 지급했다. 문자 그대로 랜덤이었다. 지원신청도 받지 않았고, 뽑힌 사람이 거절할 수도 없었다. 사고를 당하거나 외국을 나가지 않는 이상 무조건 받아야했다. 지역도, 성비도 맞췄다. 비교를 위해, 프로필이 비슷하고 규모는 더 큰 컨트롤 그룹도 뽑았다. (켈라에서 만든 기본소득실험 소개영상)
켈라의 프로젝트팀이 찾아헤메던 메커니즘은 '일할 의욕을 고취시키는 복지제도'다. 기존제도에서는 실업급여를 받던 사람들이 굳이 일자리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소득이 늘어나면 급여가 줄기 때문이다. 완전히 백수가 되어야 가장 많은 실업급여를 받는다. 복지가 늘면 사회가 방만해진다는 주장에서 펼쳐지는 전형적 이유다.
하지만 기본소득실험은 목적 자체가 다르다. 단순히 빈곤층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를 높여준다(freedom of people)는 점에서 차별화됐다. 구직활동을 통해 직업을 얻어서 추가 소득이 생겨도 기본소득은 기본소득대로 받는다. 바로 이것이 고용을 촉진시킬 거라고 내다봤다.
기본소득은 좀 더 넓은 차원의 복지정책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일자리를 구할 힘이 생기는 거죠. 이건 정말 좋은 점이에요. 그들은 당장 직업을 얻지 못하더라도 한 달에 333유로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알잖아요. 이 돈은 심지어 내 카드값과 모든 공과금이 나가기 전에 미리 들어와요. 월말까지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어요. 아주 큰 마음의 안정을 주는 거예요."
실험 대상들의 개인정보는 모두 비밀에 부쳐졌지만 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기본소득 실험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까지 막진 않았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자.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자유와 정신적 평화이기도 합니다. 모든 걸 끊임없이 계산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 거리로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부모님을 모실 수도 있게 됐어요. 부모님은 연금을 받기에는 아직 나이가 부족해서 병원 한 번 가려면 1만유로가 들어요"
"이제야 내 공부(또는 사업)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켈라 측은 기본소득이 단지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한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됐다'고 보고 있다.
기본소득실험은 핀란드 국내에서도 상당히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이 압도적이었다. 우리나라같으면 '사회적 갈등'이 제1의 고비가 될 만한 과업이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극복했느냐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상당히 심플하다. 수년동안 전 사회에 걸쳐서 토론했고, 이 실험을 해야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뤄졌다. 그게 전부라는 것이다. '상대를 설득할 의지'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설득당할 준비'도 되어있는 토론자세(혹은 국민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실험을 좋아하는 이 정부는 2년동안 실험을 하겠다고 계획했었고, 예정대로 2년만에 마치기로 했다. 더 이상 연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을 놓고 전세계 정부와 언론은 핀란드의 기본소득실험이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정책입안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질문: "어떤 결과가 나오면 성공이라고 보냐"
대답: "이미 성공했다"
애초에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확대적용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전국으로 확대한다면 예산이 얼마나 들 것이냐고 묻자 "우리도 모른다. 원하지 않기 때문에 계산해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들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철저한 샘플링으로 2000명의 실험대상자를 선정한 것이었다. 덕분에 이들은 방대한 연구자료를 축적했고, 정책결정자들이 2년간 격렬하게 토론하게 만들었다. 기존 예산에서 크게 돈을 더 들이지 않으면서도, 이보다 더 정교한 최신 경제 분석 자료를 확보한 나라가 전세계에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가성비가 좋은 실험이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핀란드는 그야말로 이제 시작인 것이다. 이들의 분석작업은 실험이 끝난 뒤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핵심은 "기본소득이 당신의 다른 소득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나"를 묻고, 이들이 다시 경제활동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할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복지와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귀중한 데이터가 될 것이다. 핀란드는 이미 다음에는 무엇을 실험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물론 이들도 "사람들이 아무도 일을 하고싶어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희망적이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에게 '일을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야죠. 정보와 경험이 많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더 쉬워집니다. 이 사람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그 길로 나아가게 될 거예요."
이 낙관적인 태도를 우리는 단순히 나이브하다고 폄하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단순히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치밀하고 철저하다.제도를 본격 도입하기 전 무려 2년에 걸친 정교한 실험과 다시 1년간의 분석, 그 실험에 앞선 수 년간의 사전 연구와 전 사회적인 토론. 이건 일단 무엇이든 도입부터 해보고 싸우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건 많이들 지나친다.
세상에 취지 자체가 나쁜 제도가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는가. 좋은 제도이지만 간과했던 허점과 부작용에 압도되는 것이다. 까라면 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기본소득실험에서 내가 감명받았던 부분은 '기본소득'보다는 '실험'이었다.
*참고/켈라 홈페이지에서 기본소득실험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https://www.kela.fi/web/en/basic-income-experiment-2017-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