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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Jan 28. 2020

편집은 장인匠人의 일을 닮았다

대부분의 경우, 몹시도 티가 나지 않는 일.

공들여 수작업으로 해낸 일의 특징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은 15년에 걸친 사전 편집 프로젝트를 다룬 잔잔한 이야기다. 추천을 받자마자 일단 '다음에 볼 영화 리스트'에 저장해뒀다. 내가 현재 하는 일과 아주 조금 맞닿아있다는 생각에서였다.


2014년 개봉한 영화 <행복한 사전> 포스터


1995년부터 2009년까지, 누구도 지망하지 않는 사전편집부에서 단어를 하나하나 모아 3000만 개의 단어 풀이를 담은 사전 '대도해'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15년이 걸린 대도해 사전 프로젝트와 달리, 신문 지면 편집은 15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이 '손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는 일말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기사의 핵심을 제목으로 정리한다.

-지면의 레이아웃을 결정한다.

두 가지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기술적인 것들이 태반이다. 애초에 편집자의 존재감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지면은 시간이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다. 리 회사 사람들은 매일 낡아빠진 구시대적 편집 툴로,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것을 손으로 일일이 입력해 조정한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몇 남지 않은) 종이신문 독자들은 대부분, 지면을 볼 때에 그 점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손가락 꼽으며 글자 수 세기


이곳에서는 나이 많은 대졸자들이 종이를 노려보며 매일 손가락을 꼽는다. 제목에 글자 수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총 5개의 칼럼으로 이뤄진 신문 지면에서, 가장 큰 머리기사의 제목은 43포인트 고딕 쓴다. 3단짜리 톱은 15자  승부를 봐야 한다. 5단을 통가로지르는 제목은 25자까지 달 수 있다. (물론 3단 4단 5단 기사의 차이는 오로지 지면 기사를 볼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15자 제목. 말이 15자이지, 정말 짧다. 네 글자짜리 단어를 세 글자로 바꾸고, 안되면 한 글자짜리 한자(漢字)로 대체하기도 한다. 조사도 띄어쓰기도 여차하면 생략한다. 영 안되면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버리는 수밖에 없다. 인터넷 기사 제목들은 기사 분량에 관계없이 대부분 20~30자로 넉넉하다. 공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건 기사량뿐만 아니라 제목 분량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기사 내용을 크게 왜곡하지 않는 수준에서, 웬만한 수식어도 다 제껴야 한다. 저 제목은 결국 '함부로'를 날리는 대신, 글자 크기를 키웠다.






-0.20, -0.68, 0.20...


거의 모든 지면은 완벽한 네모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취재기자들이 만들어진 틀 안에 기사를 넣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대략적인 분량만 맞춰서 텍스트를 보내면, 그것을 틀에 맞춰 욱여넣고 늘리고 자르는 것은 편집자들의 몫이다.


애매하게 분량이 넘치면 몇몇 문단의 글자 간격(자간)을 좁힌다. 애매하게 분량이 남으면 좀 꽉 차 보이는 행들의 자간을 늘린다. 단축키를 누르면 뿅 하고 자동으로 기사 분량이 틀에 맞춰질 줄 알았던 나는, 처음 편집을 배울 때 이 부분에서 다소간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문제 되는 문단을 블록으로 잡아서 기본적인 자간 -0.2를 -0.3으로, -0.4로... 다 욱여넣어질 때까지 줄인다. -0.68쯤까지 갔는데도 넘치면 안 되는 것이다. 너무 많이 넘치면 몇 줄 자른다. 반대로 기사를 잡아늘려야 할 때도있다. 많이 모자란 게 가장 문제다. 사진을 키우거나, 취재부서에 기사를 더 써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조금 비슷한 것이다. https://www.philippehusser.com/the-bed-of-procrustes/




숫자가 뚝 끊기지 않도록


'가장 아무도 모를 것이 분명한' 부분은 바로 여기다. 기사에는 수도 없이 많은 숫자가 등장하는데, 이 숫자와 단위들은 한데 뭉쳐있어야 한다. 중간에 끊어져 다음 줄로 넘어가버리면 가독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400억 원이 배정됐다"라는 문장에서 숫자가 행 마지막 즈음에서 걸릴 때

400  / 억원이 배정됐다   나

40 / 0억 원이 배정됐다   로 끊어지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400억 원이 / 배정됐다    로 끊거나, 적어도

400억 원 / 이 배정됐다    까지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면을 어느 정도 완성한 다음, 인쇄해서 교열 파트로 보내면, 저렇게 중간에 끊긴 숫자들을 이어 붙이라고 일일이 빨간 사인펜으로 표시해서 보내준다. 어찌 보면 응당 그래야 할만한 작업인데,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디테일이다.


이밖에도 부제목의 간격과 위치, 단간(칼럼 사이에 두는 여백), 제목과 본문 간의 여백을 포함해 거의 모든 조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조판 작업을 하는 분들은 정말 손이 빠르다. 키보드 위에서 거의 반자동에 가까운 속도로 별 규칙이 없어 보이는 숫자들을 날듯이 입력하고, 지우고, 다른 숫자를 입력하고, 해결되면 넘어간다.





문자 그대로 '미세' 조정


지난여름 종합면을 맡았던 날, 지면을 강판하기 전 약 20분 동안 중간중간 뽑은 대장 세 장이다. 겉으로 봐선 1번에서 2번으로 갈 때에 '없던 제목이 생겼다'는 것 외에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2번 대장에서 3번 대장으로 넘어가며 달라진 것은 이런 것이다.


1. 제목에 문장부호가 많아, 일단 글자 크기를 줄여서 욱여넣었다. 하지만 메인제목은 웬만하면 줄이지 않는 편이 좋다니, 여-야 한자만 작게 쓰고, 나머지 43포인트로 도로 워서 타협했다.


2. 이해도를 놓이기 위해 부제목들의 간격을 띄웠다. 내용에 따라 두 덩어리로 나눈 것.


3. '다른 6명의 후보자'가 6과 명 사이에서 줄이 나눠지면서 가독성이 떨어졌다. '6명의'를 다 붙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미 자간을 한번 좁힌 줄이어서 무리다. 적어도 '6명'까지는 한 번에 읽히도록 자간을 다시 조정했다.

(좌) 비포 (우) 애프터






어찌 보면 전혀 근본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런 일들에 우리는 적잖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 부서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인, '지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안 하면 그제야 비로소 티가 나는 작업이니 '해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지우긴 힘들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딘가 과거에 멈춰있는 '생산직' 종사자가 된 기분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는 세상에서, 이런 작업들은 해봐야 온라인 독자들에겐 실제로 가닿을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완벽하게 짜넣었는지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각자의 디스플레이와 각자의 폰트로 각자의 해상도에 맞춰 내용물만을 넘기는 사람들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최종 목표는 물리적이고 불가역적인 인쇄물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문 가시지 않는다. 최신 프로그램들은 분명 이런 작업들을 모두 자동화한 기능이 있을 것이므로. 설령 없더라도 그런 기능을 만드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므로. 단지 그 프로그램을 사는 데 (기꺼이) 쓸 돈이 없을 뿐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편집은 여전히 중요할까,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이 작업을 할 사람이 필요할까,라고 묻는다면 그땐 "그렇다"라고 답하지 못하겠다.


외면할 수도 없고, 영원히 붙들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만드는 건 신문일까 신문지일까. 요즘 하는 고민 중 가장 답이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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