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 남스페인 로드트립
처음 스페인을 떠올렸을 땐 머릿속에 가우디 밖에 없었다.
스페인을 다녀온 지금의 나는 지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기대했던 바르셀로나는 왜인지 모르게 아쉬웠고
진짜 스페인스러운 스페인은 바르셀로나를 벗어나서야 볼 수 있었다고.
우리에겐 가장 스페인스럽던 안달루시아(Andalusia).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바르셀로나마저 기꺼이 포기하고 더 오래 머무를걸, 싶었던 안달루시아. 이 낯선 곳을 짧고 굵게 대충 지나며 찍은 사진으로나마 남스페인에 대한 사적인 예찬을 해보려 한다.
안달루시아는 스페인의 남쪽 지방을 일컫는 지명으로 지중해를 끼고 있고, 우리의 일정상으론 바르셀로나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안달루시아만을 위한 일정은 3박 4일로 무척 짧았다. 그 유명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도 가지 못했고 말라가의 피카소도 둘러보지 못했지만, 우리에게 안달루시아 곳곳은 충분히 구석구석 강렬했다. 도시에서 도시로 향하는 도로들은 정말 서부영화에서 보던 감성 그 자체.
이 로드트립의 루트는 미리 정하지 않은 채 말라가에서 차를 빌려 서쪽으로 달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처음 머무른 도시는 푸엔지롤라(Fuengirola).
말라가에서 서쪽으로 20분 정도 떨어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를 낀 작은 소도시다. 당일 잡은 숙소는 큰 수영장 하나, 더 큰 남쪽 유럽 바다 하나를 끼고 있는 호텔이었다. 테라스가 전부 바다를 향해 있어서 해가 뜨는 시간부터 달빛이 내리는 새벽까지 스페인 남해를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급하게 잡은 숙소가 너무 좋을 땐, 공유를 해야 한다!
푸엔지롤라 숙소 추천
Hotel IPV Palace & Spa
성수기 9월 주말 기준 1박에 2인 조식포함 약 18만 원
(공식 사이트에서 예약 시 더 저렴한 듯)
문학에서만 보던 '눈부시게 시린 바다'는 바로 이런 바다였다.
안달루시아에서도 남쪽 코스트라인을 따라 늘어선 도시군을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이라 칭하는데 '태양의 해변'이라는 뜻이라 한다. 코스타 델 솔은 유럽인들의 유명 휴양지로 빛나는 해변들이 줄지어 있고, 여기서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코스타 델 솔의 비치들은 태양의 해변답게 어딜 가나 예쁘다니, 루트에 맞는 바다 구경을 하는 게 베스트.
우리는 이곳 호텔 풀 바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을 위해 동네 언덕을 오른 것 외엔 오로지 바다에만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종일 걸어 다니다 넘어온 곳이라 휴식이라기엔 이마저도 짧은 하루바다였다. 파도가 들이치는 모래사장 앞쪽엔 모래 대신 돌멩이가 깔려있어 물이 치고 나갈 때마다 차랑차랑 소리가 났다.
다음날 향한 곳은 안달루시아의 대표적인 하얀 마을 미하스(Mijas).
안달루시아 지역에는 언덕 위에 자리하는 여러 개의 하얀 마을(pueblos blancos)이 있다. 흰 회벽에 반듯한 네모 모양 집들로 이뤄진 마을은 그리스 산토리니를 연상시킨다. 언덕 위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마을들은 무어인들이 스페인을 지배하던 시절 지어놓은 요새형 도시라고 한다. 도시를 향하는 구불구불한 길목에선 하얀 벽돌과 오렌지빛 지붕, 고동색 토양이 대비된 색다른 풍경을 만난다.
미하스는 깨끗하고, 밝고, 아기자기한 도시였다. 점심 먹고 쉬어가기 좋은 곳.
생각보다 단체관광객이 여러 팀 보였고, 오랜만에 아시아인들도 더러 보였다.
날이 덥고 우리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미하스를 구석구석 걸어 다니며 돌아보진 않았다. 대신 전망대에 올라 적당한 태양과 바람을 맞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차로 동네 한 바퀴를 돈 후에 곧 론다로 출발.
안달루시아가 대충만 보아도 강렬한 이유는 도시에서 도시로 뻗어 난 도로들이 전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산이라고 하기엔 그보다 작은 동산을 넘고, 숲이라고 하기엔 탁 트인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차를 타고 달리는 모든 길이 예뻤다. 아메리칸 컨트리 음악을 더하면 바랜 화면의 서부영화 느낌 그대로. 또 락을 더해 속도를 올리면 스트리트 레이싱 액션 감성이 나온다.
멀리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황토빛 토양과 작고 동그란 초록 뭉텅이들. 올리브나무와 밀밭. 창문 바로 옆엔 고개를 완전히 꺾어 올려야 끝이 겨우 보이는 뾰족한 침엽수. 물 빠진 그린색에 수십 가지 종류의 나무들. '올리브 그린색'이 왜 올리브 그린색으로 명명되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정말 올리브 그린색이 있네.
이곳만의 지역색은 확실히 뚜렷했다.
중간중간 쉬어가는 뷰포인트들이 있는데 어디에 내려도 아깝지 않은 시간이라 여러 번 올랐다 탔다 반복했다.
열심히 달린 론다(Ronda)는 해가 넘어가고서야 도착했다. 달리던 도로는 차도 얼마 없고 한가했는데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도시가 작아서인지 바르셀로나보다도 많은 것 같은 한국인들.
저녁 먹으러 가는 길, 숙소로 돌아오는 길, 꽉 찬 보름달을 끼고 론다의 밤을 걸었다.
그 유명한 누에보다리(Nuevo Bridge).
어두운 탓인지 내려다본 다리 밑은 깊이감 없이 아득했다. 저렇게 높은 아치를 어떻게 만들었으며, 그 위에 도시는 또 어떻게 올렸을까. 다리와 어우러진 자연이 경의롭다가, 또 사람이 경이로워지는 순간이다.
여행을 다니면 자주 만나는 순간.
누에보다리는 한때 감옥으로 쓰였다고 한다. 3유로를 내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열어주는데 크게 볼 건 없지만 낮은 천고에 까마득한 다리 아래를 보면 그 중압감을 느낄 수 있다.
해가 들고 새가 날고 바로 아래 물이 흐르는 낭떠러지에 숨 막히는 풍경의 감옥이라니. 얼마나 못된 짓을 하면 이런 곳에 가두었을까.
낮에 본 론다의 풍경은 밤이랑 사뭇 달랐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정겨운 시골 느낌.
들어가 보지 못한 투우장에서 발길을 겨우 돌려 론다를 떠났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세빌인데, 자동차 여행답게 천천히 루트를 즐기기로 한다.
그렇게 달리던 중 들르게 된 자하라(Zahara De Le Sierra)와 시리게 푸른 호수. 호수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저수지(Zahara-El Gastor Reservoir).
처음엔 이 이름 모를 옥색 물을 끼고 달리다가 여러 번 멈췄다. 다시 지도를 보고, 다시 멈추고. 마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어서 물속 끝까지 빛나던 호수. 아니 호수 아니고 저수지.
스페인의 뜨거운 9월엔 여기저기서 수영을 한다. 정말 뛰어들어가고 싶었는데 청결에 유난히 강박적인 나의 여행 메이트가 극구 반대하여 아쉽게 실패.
저수지는 주차장과 함께 오픈되어있고 낚시도 가능하다고 써있었다. 여기 사는 물고기들은 비늘이 투명할지도.
자하라 도시 끝에 올라오니 호수를 낀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더 높은 요새가 있는데,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충분히 담을 수 있다. 이렇게 생겼구나. 다시 보아도 예쁘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거의 한 낮이어서 모든 도시가 문을 닫았다. 청소하고 쉬는 그 동네 언니오빠들 모습만 보면서 고픈배를 잡고 떠나야 했다.
역시 로드트립의 묘미는 시간 계산은 적당히 하고 정처 없이 찻길에 서있는 것인데, 자하라 근처에서 2킬로를 오는데 두어 시간이나 허비해(투자해) 버려서 세빌까진 서지 않고 달려야 한다. 점심을 못 먹었다는 핑계가 있기 마련이지, 배마저 고프지 않았다면 세빌까지 하루를 꼬박 썼을 거다.
전날과 같이 해가 뉘엿해질 때쯤 세빌(Sevilla)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만나 짐을 풀고 지도를 건네받으니 시간이 얼마 없었다. 세빌에서 리스본으로 떠나야 하기까지 고작 하루. 어두운 밤을 빼면 하루마저 되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맛집 같은걸 찾아 들어가고 어쩌고 할 겨를 없이 그냥 되는대로 걷다가 사람이 많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오랜만에 보는 유럽 도시의 화려함. 세빌에 와서야 클래식한 고딕 양식이 눈에 띈다. 차분하고 정돈된 느낌이 이제껏 보아왔던 작은 도시들과는 달랐다. 당연히 성당은 문을 닫았고, 그 유명한 세비야 성당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장으로 걷는다. 가는 길목 중간중간 플라멩코 버스킹과 마차를 끈 마부들이 로맨틱한 밤거리를 완성시켰다. (눈가리개 한 말은 조금 안됐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자연중화적인 도시들을 지나 짧고 굵은 안달루시아의 끝을 장식하는 마지막 도시 세빌, 세비야. 클래식컬하고 도시스러운 세빌은 대충 달린 로드트립의 우아한 마무리로 딱 적당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불빛으로 물든 세빌이 다음날 오전에 맞은 세빌보다 훨씬 더 좋았다. 오빠는 환한 세빌을 더 길게 즐기지 못함을 아쉬워했지만 나는 되려 낮의 세빌에 살짝 실망하여 이곳의 밤만 기억하려 한다.
안달루시아의 마지막 아침은 적당한 빵과 오렌지 주스로 먹었다. 그 유명한 대성당도 알카사르도 메트로폴 파라솔도 못 봤지만 새벽과 아침나절 강변을 걸었고, 플라멩코 버스킹을 봤고, 말굽소리에 밤 도시를 골목골목 걸었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늘 다시 와야 할 아쉬운 이유를 남겨놓는 여행지가 더 아련한 법이다.
안달루시아 여행을 계획하는 여행자들에게는 꼭 캠핑카를 빌릴 것을 추천한다. 우린 하지 못한 것. 아쉽지만 다음에 꼭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우리에겐 여전히, 스페인의 기억은 바르셀로나보다 짧고 굵은 안달루시아가 강렬하다.
All photography is taken by #RX100M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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