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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Nov 14. 2017

망한 사진에 대하여

판타지 동화 같은 이중노출



망한 사진



필름카메라에 맛을 들이곤 한동안 디지털카메라와 필름카메라를 양쪽 어깨에 나눠 매고 다녔다.

이유는 필름만의 톤이 좋지만 '혹시나 내가 원하는 사진이 나와주지 않으면 어쩌지'에 대한 못 미더움 때문에. 그런데 어느 날은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던 사진이 나왔다.

나는 대체 무얼 얼마나 찍겠다고 배낭에, 배낭 안의 렌즈에, 카메라 두 대에(처음엔 세 대였다), 필름 몇십 개를 바리바리 싸들고 다닌 걸까?


이렇게 망한 사진을 찍으려고?


All photography is taken by Jisoo / Instagram@soologue



어깨가 무거운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면 여러 도시와 날짜의 이름표가 붙은 필름들이 가방 한 켠에 가득이다. 어떤 기념품보다 더 값어치 있는 뭉탱이들을 잔뜩 들고 현상소로 간다. 필름 현상과 스캔을 맡기고 받기 전까지의 그 초조함과 설렘이란..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산타의 선물을 여는 아이처럼 ZIP 파일을 푼다. 엄마가 주는 재미없는 책이거나, 아빠가 주는 요술공주 지팡이 둘 중 하나겠거니- 마음 졸이면서.


그런데 웬걸, 재미있는 책이었다.

짧은 탄식과 약간의 실망, 슬금슬금 기어올라가는 입꼬리가 느껴졌다.




판타지 동화 같았다






















필카를 사용할 땐 특정 필름을 구분하기 위한 나름의 룰이 필요하다. 나는 보통 다 쓴 필름 위에 헷갈리지 않도록 날짜와 장소를 적은 스티커를 붙인다. 그런데 열개가 넘는 필름과 열흘이 넘는 여행은 그 룰을 깨뜨렸다. 피곤한 여행 탓에 다 쓴 필름에 대한 라벨링을 깜빡한 것이다. 분명 실수였다. 그리고 헌 필름을 새 필름인 양 카메라에 넣고 서른 여섯번 셔터를 더 눌렀다.

얼마나 피곤했으면(게을렀으면) 여행지마다 이런 미스테이큰롤이 무려 서너 개가 넘을까.


나의 게으른 실수와 여러 가지 우연들이 만나고 만나서

서울 하늘엔 빠리의 개선문이, 비엔나 거리엔 엄마 얼굴이 걸렸다.





기대보다 아쉬웠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렇게 하나의 필름에 두 개의 상이 맺히는 것을 이중노출이라고 한다.

이중노출은 '현상해보기 전까진 결과물을 알 수 없는' 필름의 불확실성에 '어떤 상이 어떤 구도와 색감으로 조화될지 모르는' 불완전성 까지 더해져 모두 운에 맡겨야 한다. 필름 한 롤에서 건질 수 있는 사진은 겨우 대여섯 장뿐이었다.

이 매력적이고 불규칙한 망한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명확하게 존재하는 피사체를 포기하는 용기.

서른여섯 장의 망한 사진 중 더 심하게 망한 서른 장을 버리는 용기.














실수와 우연이 만든 이 사진들이 왜인지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예뻐하고 사랑하며 바라본 것들이 한데 담겨있기 때문이겠지-




빠리와 서울

비엔나와 엄마

덴마크와 인스부르크

브뤼셀과 한강

부다페스트와 내 짝꿍 그리고 미술관










All photography is taken by Jisoo / Instagram@soologue




나는 아직 망한 사진 대여섯 장을 위해 멀쩡한 필름 한 롤과 아름답던 피사체를 버릴 만큼 용감하지 않다. 

하지만 늘 새로운 필름을 넣을 땐 혹시 모를 판타지 동화를 기대하며 롤을 감는다.



 






ALL PHOTOGRAPHY IS TAKEN BY JISOO
Instagram @so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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