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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Nov 11. 2017

아이슬란드는 모든 순간이 고백할 타이밍

내가 정말 프로포즈할 수 있을까


모든 관계에 있어서 '누가 먼저'는 늘 중요하다. 대개 '누가 먼저'에 따라 싸움의 잘잘못이 가려지고, 사과의 순서가 정해지고, 마음 씀씀이의 넓고 좁음이 드러나더라. 

'엄마가 먼저 소리 질렀잖아!', '니가 먼저 소리 지르게 했잖아!'. 

엄마와 친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연인 사이에서 '누가 먼저'란 특히 더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작년 5월 늦은 밤, 그에게 분홍색 장미 한 다발을 받으면서 우리가 지켜왔던 동아리 선후배 관계는 깨졌다.


남들과 다름없는 썸을 한 달 정도 타고, 누가 먼저 넘어야 할지 모르던 선은 그가 먼저 넘어주었다. 그렇게 다시는 친한 오빠 동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관계를 만들고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삶으로 들어왔다.

동아리 내에서 그는 과묵하지만 과묵하고, 가끔 재미있는 것 같다가도 과묵하고, 지적이고 차분하고 깔끔한 이미지의 남자 사람이었다. 우리 엄마는 병문안 온 오빠를 처음 보고는 '반듯하게 참 잘 큰 애 같다'고 했다. 많은 주변인들은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고 나는 그것에 헛웃음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말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에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방문객-정현종) 그의 어린 시절 상처는 고스란히 나에게로 왔다. 


외로움과 불안함, 사랑이란 감정의 의심과 무력감, 그로 인한 방어기제까지 함께 왔다. 내가 했던 이전 연애들과 같이 '누가 먼저'를 운운하며 재어보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걸 반복하기에 그는 너무 약했다.


나는 사랑하는 그와의 시간에서 '누가 먼저'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그 다짐은 내가 먼저 프로포즈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왠지 신여성이 된 느낌도 나쁘지 않은게 참 나답다고 흐뭇해하면서.



우리의 첫 은반지, 한화 2만원



주머니에 있는 반지를 몰래 만지작 거리면서 달리는 창 밖을 보는데 이건 뭐 언제 반지를 꺼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었다. 무어라 말해도 다 성공하지 싶었다. 

생각해보니까 뭐라고 말할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슬란드라는 극적인 힘에 가볍게 올라탈 생각만 했다.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눈앞에 모든 생각을 멈추게 하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아이슬란드에서 자란 아이들은 산을 초록색으로 칠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위아래로 존재하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걸 빼면 자연에 대한 고정관념을 통째로 뒤집을 수 있는 곳이 아이슬란드였다.












여섯 시간 정도 운전하는 동안 열 여섯번 정도 날씨가 바뀌고 공기 색깔이 바뀌고 온도가 바뀌었다.

이런.. 아이슬란드는 레이캬비크를 벗어나고부터 모든 순간이 고백할 타이밍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나 극적인 나라에서 하는 프로포즈가 참 작아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이쯤되면 흔해빠진 오로라


한국에서부터 이고 지고 온 텐트를 펼쳐 첫 캠핑을 하는 날 밤에도 오로라가 떴다.

 

생각보다 훨씬 더 추운 날씨에 호호 떨면서 컵라면을 먹다가 어디 별은 없나?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희미한 춤추는 빛이 있었다. 당장 랜턴 불을 껐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하늘은 일렁이고 있었다.

하늘에 파도가 친다면 이런 것 아닐까.





라면 먹다 우연히 오로라를 본 등잔 밑 바보 두 명은 한참 동안 고개가 아파야 했다.

그래도 싸다, 라면에 정신팔려서 오로라를 놓칠 뻔 한 바보들아.



하루 종일 설레는 창 밖으로도 모자라 이렇게나 쉽게 막 나타나 주는 오로라라니

더더욱 모르겠다.

언제가 때일까,

내가 정말 프로포즈 할 수 있을까.



Photography is taken by Jisoo / Instagram@so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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