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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Mar 04. 2020

술집, 홈술, 혼술의 역사

알고 보면 다양했던 술집과 홈술의 역사

고대 술집의 기원
인간은 농경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술을 빚어 왔다. 최초로 농경생활을 했다는 수메르의 역사를 보면 맥주를 빚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조뿐만이 아닌 판매에 대한 기록도 있다는 것. 즉, 술집에 대한 기록도 함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술집이 역사는 얼마나 오래되었고, 또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판매 철칙이 남아있는 바빌로니아 맥주집
기록상 최초의 술집은 기원전 18세기,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기록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외상값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60실라(1실라는 0.5ℓ)의 맥주를 외상으로 주면, 추수 때 곡식 50실라를 받으라는 내용 등이다. 또, 판매원이 맥주 양을 속여서 팔면 물속에 던져졌고, 승려(종교인)가 술집에 오면 화형에 처했던 기록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맥주 마시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당시 부유물도 많고, 벌레도 자주 빠져 빨대로 맥주를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술집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빌로나아아의 점토판 모뉴먼트 블루에 나타난 빨대로 맥주 마시는 모습.


바(Bar)에서 맥주와 와인을 팔았던 이집트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게 만들게 한 것은 맥주와 마늘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뜨거운 사막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시원한 맥주가 필요했고, 또 강장제로써 마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불되는 샐러리에 맥주 역시 포함된다. 이집트의 바(Bar)에서 맥주와 와인이 함께 판매되었는데, 맥주는 직접 만들었지만 와인은 주로 수입을 했다. 포도재배에 이집트는 기후가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나이오스는 이집트의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고, 와인과 비슷하게 사람들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등, 기분을 업시킨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 주정뱅이의 손을 불에 데게 하는 등, 과음에 대한 엄격한 분위기가 남겨져있는데 대표적으로 애니의 교훈(Papyrus of Ani)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과음으로 맥주를 토하는 여성의 모습. (이집트 테베의 무덤 내 벽화)


맥주를 많이 마시지 말아라.

좋지 않은 일을 입에 담게 된다.

자신이 하는 말이 뭔지 모르게 된다.

넘어져서 다치더라도

누구도 당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술친구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한다. 주정뱅이 나가버려!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간판 표시인 로마의 술집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화폐경제가 성장, 본격적으로 술집 문화가 번성하게 된다. 대표적인 문화는 함께 와인을 마신다는 것에서 유래한 심포지엄(symposium). sym(함께) + posis(마시다)로 함께 와인을 마시다란 뜻을 의미한다. 참고로 이 심(sym)이라는 단어는 많은 단어에서 볼 수 있는데, 교향곡의 의미를 가진 심포니(symphony)는 sym(함께)+phone(소리), 그리고 심벌(symbol)은 함께 묶었던 증표가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한다. 


로마는 건국 초기 맥주 중심의 나라였으나 기원전 168년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와인으로 바뀌었고, 한국의 주막과 유사한 숙박시설이 함께 있는 타베르나(taverna)라는 술집이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가져온 술의 신 디오니소스(로마 명 바쿠스)의 표시를 달아 다른 식당들과 표시를 달리 했다. 제공되는 메뉴는 사뭇 지금과 비슷하다. 대두가 들어간 죽, 삶은 돼지고기, 돼지 머리 꼬치, 장어, 올리브, 소시지, 어묵, 닭고기, 야채 마리네, 치즈, 오믈렛 등이다. 참고로 로마인은 하루에 3끼를 먹었는데, 점심을 가장 많이 먹었다. 로마 역시 농민이 많았고, 오후부터 가장 많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밤에는 어두워서 음식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지면 자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타베르나라는 로마식 주막은 영국에 가서 여관, 여인숙이라는 터번(tavern)이라는 용어로 바뀌게 된다. 


수도원 술집에서 시작한 프랑스, 르네상스 거치며 '카페'와 '카바레'로 발전
프랑스에 와인 문화를 심은 것은 역시 로마제국이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을 점령하면서 로마 군인들에게 포도나무를 심게 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멸망한 후에는 수도원이 포도밭과 와인 제조를 맡아 호황을 이루지만, 이러한 상황은 18세기에 완벽하게 무너진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 혁명이 그 이유였다. 기존의 왕, 귀족, 그리고 성직자의 권력을 없애고 평등을 추구했던 이 혁명은 결국 모든 수도원의 모든 영지를 몰수, 술집 기능은 철폐가 되고, 현대와 유사한 술집의 등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카페(caffe)'와 '카바레(cavare)'다. 카페 문화는 17세기 아랍에서 베네치아, 오스트리아를 거쳐 프랑스에 오게 되는데, 한국의 커피숍처럼 단순히 커피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닌, 증류주에 허브를 넣은 리큐르 및 와인까지도 다양하게 제공이 되었다. 음악과 술, 사교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카바레 문화는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곳은 카페 하우스를 유흥과 감각의 공론장으로 재창조한 공간이었으며,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진화했는데,  대표적인 곳 중 한 곳이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물랑 루주(Moulin Rouge)'였다.

프랑스의 유명 카바레 물랑 루즈. 사진 pixbay


기술의 발달로 술의 유통기한이 길어지면서 술은 더욱 취급하기 쉬워졌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술 판매를 쉽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레스토랑, 호텔 등의 외식 산업에 의한 주류 제공도 더욱 활기를 띠게 되고, 술집과 레스토랑의 구분은 더욱 사라지게 된다.

펍(Pub)은 원래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
영국의 전통적인 술집이라면 아마도 펍(pub)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펍의 역사는 의외로 길지 않다. 오래된 술집 문화는 영국의 맥주, 에일(ale)을 파는 에일 하우스(ale house)다.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이 고대 페니키아 인으로부터 배워온 술이었고, 5세기경에 시작한 앵글로족과 색슨족의 이주, 11세기의 노르만 족의 침공 등에도 그대로 유지된 문화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집안에서 여성들이 가양주 형태로 빚었으나 10세기 전후로 주막처럼 직접 빚은 술을 식당 형태로 판매하게 되는데, 그것이 에일 하우스다.

그리고 이곳의 주인은 술을 담당하는 여성이라는 의미로 '에일 와이프(ale wife)'라고 불렸다. 우리말로 하면 주모(酒母)인 것이다.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에일 와이프'는 한때 애주가들로부터 인기폭발인 경우도 있었지만, 알고 보면 질투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내 여자로 삼고 싶지만, 만인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맥주에는 지금의 홉(Hop)이 아닌 다양한 허브가 들어갔는데, 맛이 안정이 안 되고, 때에 따라서는 환각작용이나 몸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상한 물질을 만드는 마녀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무엇보다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남성에게 경계의식을 사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알고 보면 에일 와이프는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는 신여성이었고, 제조를 할 줄 아는 기술자였으며,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도 했다.


마녀 'witch'의 어원은 지혜롭다의 'wit'

이러한 배경을 담은 단어가 그대로 남아있다. 바로 마녀라는 뜻의 'witch'다. 이 단어를 살펴보면 바로 위트 'wit(기지, 익살, 지혜)'가 붙은 것을 알 수 있는 데 여기에 'ch(모으다)'가 붙었다. 한마디로 지혜를 모으는 사람이란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지혜롭다는 'Wise'도 맥락이 같다는 것. 'wit'에 'see'가 붙은 것이다.


결국, 흑사병이 본격 유행한 14세기부터는 에일 와이프가 마녀사냥을 당하게 된다. 질투와 미움, 그리고 약자에 대한 혐오까지 더해진 최악의 사건이었다. 당시 이 에일 와이프의 상징은 청소를 하기 위한 '빗자루'와 장터 등에서 눈에 잘 띄기 위한 검은색의 '긴 모자', 그리고 곡식을 훔쳐먹는 쥐를 잡기 위한 '고양이'였다.

위트 있그녀가 마녀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양한 에일 와이프 들의 모습. 마녀의 시작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19세기에 영국에도 월요병이 등장
그러면서 등장한 술집이 지금의 펍(Pub)이다. 흑사병이 지나가고 안정을 찾아갈 때쯤 살아남은 농민 및 노동자의 수입이 크게 오르게 된다. 일손이 부족해진 것이다. 원래 펍은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라는 마을의 공적인 공간. 우리말로 모두가 모인다는 도가(都家)와 유사한 의미이지만, 수입이 많아진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주류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19세기 들어서 주급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노동자들의 주말 휴식처가 되어간다. 과음이 많았던 당시의 음주문화에서 숙취는 두말할 것 없이 많았고, 덕분에 영국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성스러운 월요일(saint monday)’이라고 불리며 곧잘 쉬곤 했다. 한마디로 영국의 월요병이었다.


영국식 펍의 모습. 사진 pixbay


초대형 호프집을 좋아한 독일, 기원은 유럽의 30년 전쟁
독일의 술집은 유럽의 마지막 종교전쟁이라는 30년 전쟁 때, 거대한 집회장이 되었다. 넓은 공간으로 잡화, 식품, 은행업무, 군인 집합 장소 등 시장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술집이 장터고 장터가 술집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거대한 호프집 문화는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남부 독일은 이때까지만 해도 와인의 나라였는데, 16세기에 발행한 후빙하기와 30년 전쟁의 폐해로 포도재배가 점점 어려워지고, 18세기가 되면서 맥주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다.

때마침 16세기부터 양조장을 운영하던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haus)가 1897년 뮌헨에 양조장 직영 비어홀을 만든다. 3,000명이나 들어가는 세계에서 최대 술집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볼셰비키 혁명의 레닌이 다녀갔으며, 히틀러가 연설을 할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1944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건물이 무너지지만, 1958년 다시 재건축되고 지금에 이르며, 그리고 이곳이 한국 호프집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말한다. 참고로 호프란 정원 및 광장을 뜻하는 단어다.


호프브로이하우스. 출처 위키미디어


홈술, 혼술, 칵테일과 바(bar)를 유행시킨 미국의 금주법
미국은 1920년부터 1933년까지 금주법을 제정, 일절 판매, 유통, 제조할 수 없게 만든다. 당시 미국 내 맥주를 만들던 독일계 이민자들이 미웠던 것도 있고, 개신교의 영향으로 알코올을 최대한 멀리하려 한 것이다. 다만, 이 금주법은 술을 마시는 것은 위법이 아니었다. 즉, 가택에서의 소유와 음주는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집에서 술을 즐기는 홈술 문화가 커지게 된다. 즉 안 보이는 곳에서만 마시면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1층에 있던 바(Bar)는 지하로 숨으며 히든 바(Hidden bar), 밀주 판매바(Speakeasy bar)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금주법 시대였던 만큼 누구와 같이 술을 마신다는 것도 때로는 불편한 자리였다. 이렇다 보니 바에 앉아 혼자 마시는 '혼술' 문화도 커지게 된다. 당시 팔리던 술은 조악한 방법으로 만든 밀주들. 안 좋은 향이 나다 보니  바텐더들은 다양한 허브와 과일로 맛을 내기 시작했고, 칵테일의 발전은 또 여기서 한층 이뤄진다. 1차, 2차 세계대전 겪으면서 유럽에 미국의 바(bar) 문화를 전하면서, 유럽의 술 문화를 바꾼 것도 미국의 금주법이었다.

한국 술집의 변천
과거길에 늘 있던 조선의 주막은 18세 말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정조의 전왕인 영조의 경우는 재위 내내 금주령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풀리니 상업이 발전하면서 주막의 역할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서신을 전달하는 우체국, 전국의 주막을 다닐 수 있는 여행자 수표 발행 등 은행의 역할이다.


구한말의 선술집의 모습. 말 그대로 서서 마시고 있으며 서양의 bar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구한말이 되면서 전문 술집이 생기게 되는데, 대표적으로는 24시간 주막 '날밤집', 티켓 판매하듯 팔만 나와 잔에 술을 따라주는 '팔뚝집, 널빤지라는 바(Bar)와 같은 어원을 가진 '목로주점' 서서 마시는'선술집' 등이다. 그리고 60, 70년대 대폿집, 빈대떡집, 80년대 호프집, 경양식집, 학사주점, 민속주점, 90년대 소주방 등이 추억 속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서양은 2000년 전 술집 문화도 지켜오는데 우리는 대부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SNS의 발달로 인간관계의 피로함과, 먹고 마시는 취향조차 다양해다 보니 같이 있는 것이 번거로워진 부분이 있다. 함께 있으려면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까지 있으니 더더욱 사람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 홈술과 혼술이 유행을 하게 된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극복이 되면,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 지인, 동료들과 시원하게 한잔 하고 싶다. 외로이 혼술, 홈술보다는 그래도 사람이 그립다. 그때쯤이면 코로나 바이러스도 아련한 추억이 되어 있길 기대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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