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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Mar 23. 2020

짧게 보는 고대 와인의 역사

조지아부터 로마시대까지


인간은 언제부터 술을 만들었을까? 일반적으로 와인(과실주)은 기원전 8000~6000년, 맥주(곡주)는 6000~4000년 전후로 언급한다. 와인이 맥주보다 빠른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당과 수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과일은 공기 중의 효모만 들어가면 바로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에 비해 맥주 등의 곡주는 곡물 속의 전분을 당으로 바꿔야 하는 당화(糖化)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동양에서는 누룩이고, 서양에서는 맥아다. 이 둘의 역할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곡물 등을 입으로 씹어서 달게 만들게도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여주인공이 이러한 방법으로 술을 만든다. 잉카에도 있으며, 동양의 경우에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오키나와의 민속주로 등장하는데 15살 이하의 여성이 만들었다고 해서 미인주라고도 불렸다. 그렇다면 기록상 가장 빨리 와인을 만든 곳은 어디였을까?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일까?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 있는 조지아. 출처 위키미디어


유럽 와인의 발상지는 조지아

기록상 가장 유력한 와인의 발상지는 조지아(Georgia)다. 러시아어로 그루지야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노아의 방주가 안착했다는 터키의 아라라트산에서 멀지 않다. 무엇보다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서쪽으로는 흑해와 접하고 있다. 한마디로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에 있는 나라다.


이곳을 와인의 발상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크베브리(Qvevri)란 와인 전용 항아리가 조지아의 코카서스 산맥에서 발견되었기 때문. 동시에 포도 씨앗도 발견되며, 당시 꺾꽂이로 포도나무를 재배한 모습도 있었다. 이러한 흔적이 발견된 곳은 무덤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와인이 의식용으로 사용된 듯하다고 추정했다. 


조지아의 와인 전용 항아리 크베브리. 계란 모양으로 사람이 들어가서 청소할 만큼 크다. 출처 위키미디어


유적을 탄소측정기로 계측해보니 기원전 약 8000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기존의 최고(最古) 기록은 기원전 5000년 전의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견된 것.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조지아의 와인 제조 방법은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며, 2017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에 의해 가장 오래된 와인의 발상지로 인정을 받게 된다. 여기에 와인(wine)이라는 단어도 조지아어 ‘그비노(ghvino)’에서 왔다는 것도 연결고리가 두텁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증명했다.


조지아의 전통적인 양조법은 우리의 장 문화와 사뭇 비슷하다. 항아리를 땅속에 묻고 술을 발효, 숙성시키는 것이다. 포도를 포도 압착기에서 짜서, 포도즙과 ‘차차’(chacha)라고 불리는 포도껍질, 줄기, 씨를 모두 크베브리 안에 담는다. 꼼꼼하게 밀봉한 후 5개월~6개월 동안 숙성하면 조지아의 와인이 나오게 된다. 주로 세속적 또는 종교적 행사와 의식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용하는데, 조지아인들은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 밀봉된 크베브리를 개봉해서 와인을 대접하는 등, 와인 저장고는 집안에서도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땅속에 묻힌 와인 저장용 항아리 크베브리. 와인 저장고는 조지아인에게 신성한 곳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 조지아

이러한 문화를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조지아가 아르메니아와 더불어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다. 당시 서 조지아의 이베리아 왕국의 마리안 3세가 기독교를 공식적인 왕국의 종교로 확립하는데, 이때가 317년~330년 사이로 보고 있다. 로마의 경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허용하고, 380년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 물론 로마가 기독교를 허용했기에 조지아도 가능했겠지만, 어찌 되었건 로마에 비해 약 50년 이상 빠른 것이다.

오래된 와인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기독교(그리스 정교)를 지켜오면서 함께 발달했던 것이다. 또 백인을 뜻하는 코카시안(Caucasian)이라는 단어는 이 조지아가 있는 코카시아 산맥을 뜻하는 것이다. 즉 백인 혈통의 중요한 뿌리 중 하나이다. 기독교 국가가 된 이후에 조지아인은 포도나무로 된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고대 조지아의 와인 제조법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기원전 5000년부터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1000년 후에는 이집트로도 전해진다. 즉, 그리스, 로마로 직접 알려지기보다는 지금의 중동, 이슬람, 이집트가 중심이었다.


얄타 회담 당시의 영국의 처칠 수상,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조지아 와인을 알린 스탈린

조지아 와인이 서방세계로 알려진 계기는 다름 아닌 소련의 스탈린 덕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패전이 농후한 국가의 관리를 위한 흑해의 얄타에 모인 회담 만찬장에서 스탈린이 조지아 와인을 추천한 것이다. 스탈린이 조지아 와인을 추천한 것은 간단했다. 그가 러시아 본토 출신이 아닌 이 조지아가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상당수의 조지아 와인이 러시아로 수출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에 직접적으로 와인을 알린 페니키아

와인 문화가 그리스, 로마에 널리 퍼진 것은 현재의 레바논에 기점을 둔 지중해 연안 주변의 페니키아인이다. 레바논에서 만든 와인은 당대 너무 유명해서 페니키아의 도시 이름인 비블로스에서 유래한 비부라인이라는 단어가 고급 와인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코냑 정도 되겠다. 코냑은 술 이름이 아닌 프랑스의 지명이기 때문이다.   

페니키아인의 무역 루트. 지중해를 놓고 로마와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이후 페니키아에서 그리스로 와인이 전파되자, 그리스에서는 주로 물을 타서 마셨다. 원액 그대로를 마시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의 상류층이 그리스 북쪽에 사는 슬라브 계열의 스키타이의 원액 음주 문화를 혐오해서 생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대 그리스어로 와인을 크라시(κρασί)라고 하는데, 이것은 혼합이라는 뜻이다.

페니키아인 알파벳. 이후 로마 및 영어 알파벳의 기원이기도 하다.

와인에 물을 타는 것이 아닌, 물에 와인을 타는 것이다.

이후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기원전 168년)함에 따라 와인은 자연스럽게 로마로 이어진다. 여기에 로마제국의 확대에 따라 현재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 등 내륙 지방에도 물을 타서 마시는 와인 문화가 생긴다. 당시 와인은 포도과즙이 농축된 단 맛이 강한 술이었다. 현재는 위스키 및 증류주를 마실 때 알코올 도수를 낮추거나 마시기 편하게 하기 위해 물을 섞지만, 이때는 와인의 단맛을 줄이기 위해 물을 넣었다. 이러한 형태는 술의 개념보다는 주스라는 개념에 가까웠는데, 경수가 많은 유럽의 경우 물 자체가 맛이 없었던 만큼, 좀 더 마시기 편하게 와인을 넣어주기도 했다. 즉,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신 것이 아닌, 물에 와인을 타기도 한 것이다. 우리 것에 비유하면 홍초와 같은 느낌이다.


카르타고 본토에서 싸운 자마 전투. 2차 포에니 전쟁을 종식시킨 마지막 전투다. 참고로 포에니는 페니키아인이라는 의미다.


멸망한 카르타고, 로마에게 와인 제조법 전래

로마의 와인 문화를 더욱 불 붙인 것은 실은 영원한 경쟁국, 한니발의 모국인 카르타고였다. 그것도 단순한 문화만 전파된 것이 아닌 제조 매뉴얼이 강제적으로 전수되어 버린다. 페니키아인은 카르타고에서 포도재배를 발전시켰는데, 기원전 500년경에 카르타고의 마고(Mago)라는 학자가 포도재배 및 와인 제조에 관한 내용을 28권의 서적으로 기록했다.  카르타고가 로마에 의해 멸망한 3차 포에니 전쟁 이후, 이 책은 로마의 정치가인 마르크스 포르키스 카트 켄소리우스(Marcus Porcius Cato Censorius) 의해 그리스, 로마어로 번역이 되어, 와인 제조법은 이베리아 반도 등 지중해 전체로 퍼지게 된다.


고대의 농법 그대로 이어지는 포도 재배 및 와인 제조

카르타고의 마고가 쓴 내용은 지금도 상당히 지켜지는 내용이 많다. 기후와 지형에 의해 빈야드(포도 과수원)를 형성하는 것과, 일조량이 좋은 경사지에 포도밭을 조성하라고 되어 있으며, 포도 종류와 포도의 특성을 파악, 다양한 포도를 넣어 와인을 빚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꺾꽂이를 통한 포도나무 번식과, 송진을 넣어 특유의 향이 나며 보존성을 늘렸고, 암포라라는 표준적인 와인 용기를 만들었다. 보존성의 증대 및 표준적인 와인 용기는 결국 수출이라는 산업으로도 발전하게 된다. 결국 페니키아 인의 와인은 고대 이집트 및 지중해 연안의 각지로 수출되었고, 송진을 코팅하여 코팅하여 와인의 산패를 막은 기술은 지금도 그리스 와인의 레치나(retsina)의 원형이 된다. 레치나는 그리스어로 송진을 뜻한다.


로마에서 꽃 피운 포도 제조와 와인

포도재배와 와인 만들기는 로마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로마의 작가인 콜르메라(Columella)는 서기 65년에 로마의 포도재배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농업론(De Re Rustica)이라는 12권의 서적에 정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포도나무 사이의 알맞은 간격과 와인 종류에 따른 적합한 생산지 들, 포도 농사에 필요한 일꾼의 수, 그리고 버팀목 세우는 방법 등이다.


버팀목을 통해 줄기를 낮은 곳에 잡아 놓는다. 이를 통해 사람 손으로 포도 수확이 용이해진다.


특히 버팀목 세우는 방법은 사람의 손이 닿는 높이에서 포도를 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로써, 높은 포도나무에 올라갈 필요가 없어졌으며, 이것에 의한 위험성도 최소한으로 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의 영토가 서유럽으로 확대되면서 로마의 포도재배도 늘어나고, 지금도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스페인의 리호아, 독일의 모젤,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 론 지방에서도 포도 재배가 시작되었다. 로마의 포도재배농가는 급한 경사면에 포도재배를 이상적으로 생각했는데, 이유는 차가운 공기가 사면을 타고 내려온 후, 협곡 아래에서 머물기 때문이다. 차가운 공기는 포도재배에 일시적으로 좋은 영향도 주지만, 너무 많으면 포도의 광합성에 필요한 온도를 빼앗는 등, 동절기의 서리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부르고뉴 로마네 꽁띠 포도밭. 역시 경사진 비탈길에 있다


이미 3세기에 와인용 오크통 등이 개발

그리고 3세기경에 로마에서는 오크통에 와인을 담는 기술이 생기게 된다.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는 너무 무거웠고 잘 깨졌기 때문이다. 오크통의 경우는 나무로 되어있는 만큼 가볍고, 나무의 맛도 와인 속에 들어가니 맛이 더 풍부해졌다. 이때부터 현대의 와인 제조 기술이 하나씩 적립되어간다.


중세 유럽의 경우, 포도의 재배와 와인의 양조를 주도한 곳은 기독교의 수도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와인이 자신의 피라고 호칭한 것으로 와인은 기독교의 성찬식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다만 이 시대의 와인은 의식으로 마시는 것이었고, 마구 마시는 것은 죄로서 처벌받았다. 중세 후기에 와서야 와인이 일상의 음료가 되고, 12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저술된 의학서 ‘살레르노 양생학’에서는 좋은 와인의 선택 및 와인과 건강에 대한 고찰이 기록되어 있다. 또 브루고뉴 와인이 유명해진 것도 이 시기다. 르네상스 시대 오락과 음주가 발전하면서 17세기 후반 양조 및 저장의 기술, 또 유리병의 제조법이 향상하면서 와인의 생산과 유통은 비약적으로 확대된다.


와인의 고대사를 논했지만 어디까지나 서양 중심이야기일 뿐, 일본의 경우 1만 5천 년 전의 항아리에서 포도 씨가 발견되었고, 중국의 경우 세계 4대 문명이라는 황하강 유역에서 9천 년 전에 술을 빚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즉 앞서 이야기 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서양 와인의 역사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동양과 서양 중 누가 더 빠르냐라는 것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어차피 인간은 술을 저장성 좋은 음료(알코올 함유로 인해 변질이 늦음)로 사용해왔고, 결국 발견의 차이일 뿐이지, 본질적인 역사는 농경생활의 시작과 함께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술은 농업의 역사와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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