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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Mar 05. 2022

와인과 코냑 산업을 이끈 네덜란드스토리

무역과 상업의 귀재 네덜란드인

주식회사의 태동. 네덜란드에서 시작하다


우리는 자본주의란 경제 시스템 안에 살고 있다. 재화의 사적 소유권 인정, 그리고 매매, 양도, 소비 및 이윤의 처분 등을 개인에게 일임하는 제도다. 이것을 통해 가격, 투자, 분배 등이 균형을 맞추며 시장경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13세기 이슬람,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움직임으로는 16세기 신대륙 발견과 신항로 개척, 나아가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산업혁명 이후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을 담당하는 산업은 뭘까? 아마도 주식시장일 것이다. 한국에서만 거래되는 하루 평균 금액은 약 20조 원. 매일 LG 전자를 100%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거래되고 있으며, 한 달 총액으로는 삼성전자, 5~6개월만 모으면 미국 애플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바야흐로 엄청난 돈이 거래되고 있는 시장이다.


1726년 암스테르담의 동인도 회사 조선소. 이때까지만 해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대 주식회사였다.출처 위키피디아


주식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콘텐츠는 당연히 주식회사다. 가장 많이 거래되는 것이 회사의 주식이기 때문이다. 주식회사는 말 그대로 주주가 비용을 투자하여 만든 형태. 많은 자금을 투자한 주주는 큰 권한을 가져가고, 소액을 투자한 주주의 권한은 작아진다. 정치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모두가 한 표지만, 자본주의 속 기업은 민주주의와는 다소 결을 달리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합리적, 나쁘게 이야기하면 매몰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식회사, 나아가 증권거래소 등을 만든 나라는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미국, 영국 등을 생각하지만, 이들은 원조가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나라, 자전거를 엄청나게 사랑하며, 북유럽 금융의 중심지로 알려진 네덜란드다. 


청어덕분에 생긴 주식회사


네덜란드가 주식회사를 만든 계기는 간단하다. 청어 사업 덕분이었다. 원래 이 청어는 주로 발트해에 서식하면서 한자 동맹의 번영을 이끌었다. 하지만 회유성 어종인 청어는 서식지를 북해로 바꾸면서 발트해의 한자 동맹은 존재감을 낮추고 청어라는 수혜를 얻은 네덜란드가 떠오르게 된다. 이어 청어로 쌓은 부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까지 하게 된다. 물고기 하나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당시 16세기 네덜란드 인구는 약 100만 명. 그중 30만 명이 이 청어잡이에 종사할 정도였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청어 통조림 스르수트뢰밍. 소금에 절인 후에 저장하면 1년 이상 버텼다. 이것으로 네덜란드는 부국의 기틀을 마련한다. 
뉴욕은 원래 뉴암스테르담이다

청어로 자본이 생긴 네덜란드는 이어 대항해시대에 맞춰 스페인, 영국과 신대륙 진출(?) 경쟁을 해야 했다. 그래서 거대한 자본이 있는 회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선박 회사들을 합병시킨다. 그리고 각각의 선주가 투자한 만큼 지분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이렇게 모인 자본으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에 자금 줄을 대는 중앙은행, 주식을 가지고 거래를 할 수 있는 증권거래소가 차례차례 세워진다. 지금의 뉴욕이 원래는 뉴암스테르담이었다는 것. 그리고 월스트릿은 원래 월(성벽)이 있는 성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네덜란드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럽 술 발전에 지대적인 역할을 한 네덜란드

흥미로운 것은 이 네덜란드인이 유럽의 술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와인, 코냑, 맥주, 그리고 그 유명한 진까지 다 섭렵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은 유럽 술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었을까?


와인 중개 무역을 담당하다.

1453년 영국과 프랑스의 116년 동안 지속된 백년전쟁이 보르도 지역의 카스티용(Castillon戰鬪) 전투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끝난다. 보르도 지역이 마지만 전투가 된 이유는 이곳이 300년 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 그래서 당시 보르도 사람들은 프랑스인이 아닌 영국인의 정체성이 더 강했던 시기라고 본다. 즉 이곳 만큼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영국과 대륙에서 영국을 내쫓겠다는 프랑스 왕실이 벌인 최후의 전투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이 보르도 지역을 끝까지 탐낸 이유는 간단했다. 영국 왕실의 공식 와인이 바로 보르도 와인이었기 때문이다. 선정한 인물은 사자왕 리처드 1세(Richard I, 1157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 당시 그는 영국인이었지만 프랑스 귀족이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보다 프랑스를 더 사랑했던 왕이었다. 


영국은 한 때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이라고 불리며 프랑스 서부의 반 이상을 차지할 때가 있었다. 노르망디, 브르타뉴의 북쪽 지역은 물론 스페인 바로 아래까지 지배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프랑스에게 빼앗겨 백년전쟁 직전에는 보르도 지역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보르도를 떠난 영국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네덜란드인이었다. 정치 분야가 아닌 경제 분야였다. 백년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교역이 애매해진 상황.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을 통해 상업인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네덜란드가 보르도 와인의 중개 무역을 담당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백년전쟁 이후에도 보르도 와인은 자연스럽게 런던으로 갈 수 있었다.

프랑스 보르도 지도. 상단 핑크빛 지역이 메도크다. 지롱드강 좌안으로 네덜란드인이 만든 간척지 포도밭이라고 볼 수 있다. 
보르도 최고 와인 산지 '메도크 지역'을 만들어 내다


보르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는 아마도 메토크(Medoc)를 이야기할 것이다. 프랑스 보르도 5대 와인이라고 불리는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뚜르, 샤토 마고, 샤토 오브리옹 중, 샤토 오브리옹을 제외한 나머지 4곳이 모두 메토크에 있다. 이 메도크는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지롱드 강변 하구에 위치한다. 흥미로운 것은 모두 이 지역이 500년 전만 해도 단순한 갈대밭이었다는 것. 하지만 세계 최고의 간척 기술을 가진 네덜란드인이 들어오면서 이 지역의 포도밭으로 변신한다. 바다를 땅으로 만든 것뿐만이 아닌 강하구를 세계 최고의 밭으로 만든 것이었다.


보르도 5대 와인이라고 불리는 유명 와인. 샤토 오브리옹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제품은 네덜란드인이 만든 메도크 지방에서 생산된다.
와인을 압축해서 팔아먹다. '코냑의 탄생'


네덜란드인은 단순히 와인에만 머물지 않았다. 와인을 압축해서 팔아먹었다. 바로 와인 증류주 코냑의 탄생이다. 코냑은 프랑스의 지역 이름. 이곳에서 나오는 대표 증류주가 브랜디였고, 자연스럽게 코냑은 지역명보다 술 이름으로 유명해진다. 


코냑 지방 역시 보르도와 마찬가지로 강으로 대서양까지 연결이 된다. 프랑스 중서부를 흐르는 샤랑트강이다. 네덜란드인은 샤랑트 강의 하구인 라로셸(La Rochelle)에서 주로 소금을 거래했다. 당연히 와인도 품목에 있었는데, 풍미가 약하고 조금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이 있었다. 저장에 문제가 있었고 늘 클레임이 끊이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바로 와인을 증류하는 것. 


증류를 하니 당연히 알코올 도수는 높아졌다. 하지만 총량은 적어지고, 도수가 높아지니 상할 염려가 사라졌다. 그래서 선착장에서 하역 후에 물을 추가해서 와인처럼 팔았다.마치 무거운 파일을 압축해서 이메일로 보내는 것과 같은 효과였다.  네덜란드인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기였다. 



대표 코냑 중 하나인 헤네시. 프랑스 회사지만 설립자는 아일랜드인이었다.
이미 그들은 알았다. 투트렉 마케팅이 좋다는 것을


네덜란드인은 좋은 와인은 좋은 와인대로 열심히 팔았다. 대표적으로 루아르 계곡의 질 좋은 와인 및 보르도 와인이다. 즉, 고가의 와인은 그대로 팔되, 품질이 낮은 와인만 증류주로 팔았다는 것. 이른바 투트랙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코냑은 그대로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당시 영국은 위스키 산업이 확산되지 않아 세계 최고의 코냑 소비처이기도 했다. 


전쟁에 정신없던 17, 18세기의 유럽. 줄타기를 잘한 네덜란드


코냑이 번성을 하기 시작한 17~18세기에는 유럽은 구교와 신교, 부르봉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 영국과 프랑스의 미대륙 및 인도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실질적인 세계 대전이라고도 이야기하는 30년 전쟁은 물론 합스부르크 왕조와 프랑스가 패권을 놓고 다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 등 끝이 없어 보였다. 


이럴 때 네덜란드 특유의 상인 정신으로 이 둘 사이에서 멋진 줄타기를 하며 비즈니스를 성공리에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영국과 네덜란드의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52년부터 1674년까지 3번에 걸쳐, 그리고 1780부터 1784년까지 지속적인 분쟁이 발생한다. 하지만 한 번도 본토를 침략한 적도 없고, 또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네덜란드의 귀족 윌리엄 3세를 왕으로 초빙까지 한다. 전쟁은 전쟁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였다. 그것이 네덜란드인이다. 


코냑 지방은 1651년 프랑스의 적을 무찌르는 데 공헌을 한다. 이에 루이 14세는 코냑 지방에서 나오는 와인과 증류주에 부과되는 세금을 면제해 준다. 이 경제적 이점을 살려 코냑은 주변 지역을 뛰어넘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게 되면서 수출품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의 무역 중심지가 된다. 


한 때 부르고뉴 공국령이었던 네덜란드


참고로 네덜란드는 1384년부터 1482년까지 부르고뉴 공국령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은 봉건 시대. 절대왕정 시대가 아닌 영주와 왕의 계약 관계가 유지되던 때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내에서 최고급 와인을 만드는 지역. 어쩌면 이때 네덜란드인은 부르고뉴를 통해 와인의 가치를 알지 않았나라는 생가도 해 본다. 이때부터 부르고뉴 와인이 피노누아로 통일, 고급화 시대를 발돋움하려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사라지는 네덜란드인

코냑 수출이 네덜란드인이 실질적인 독점을 한 것에 불만을 가진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은 18세기 들어와서 슬슬 코냑 산업에 진출을 한다. 돈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수출에 용이하게 샤랑트 강 코냑 지역에 증류소를 만든다. 이때 생긴 메이커들이 지금도 대표 코냑 회사로 알려진 마르텔, 헤네시, 레미 마르텡, 마테르 등이다. 그래서 지금도 코냑의 이름에는 영국식 이름이 많이 쓰인다. 


코냑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덕은 근처에 양질의 오크통을 수급할 수 있는 오크나무 재배지인 리무쟁 지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군함용으로 재배했던 오크나무지만 무역이 성할수록 오크나무통으로 활용이 되었다. 


프랑스인은 코냑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수출용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오크통에 넣고 수출을 했고, 저장용 오크통도 많이 필요했다. 오드비와 코냑의 정체성이 결정 난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이 오크통에 숙성한 코냑은 오크 숙성을 하지 않은 프랑스 증류주 '오드비(Eau de Vie)'와 차별화를 가져갔다. 


현재 코냑 소비 1위는 중국, 미국, 영국, 그리고 그 다음이 프랑스 정도다. 원조라고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수출에 중점을 두는 산업인 것이다. 


원래 맥주는 흑맥주와 유사한 색이었다. 보리를 굽다보니 모두 어두운 색이 되어버린 것. 그런데 영국에서 보리를 간접 가열을 통해 밝은 색의 맥주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페일 에일.
맥주 산업에도 기여하다


맥주의 원료를 이야기하면 기본적으로 보리(맥아), 물, 홉(hop)을 이야기한다. 홉을 넣는 이유는 그 자체가 천연방부제 역할을 하며 보존기간을 늘려주기 때문이다. 또 홉에서 나오는 다양한 향이 맥주의 맛을 상쾌하게 해 주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원래 홉은 맥주 원료의 마이너한 품목이었다. 그 대신 그루트(Groot)라고 하여 다양한 허브를 넣은 것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대세였다. 하지만 그루트 전매권을 가진 한자 동맹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바이에른 공국(Herzogtum Bayern)은 1516년 보리와 물과 홉으로만 맥주를 만들라는 칙령을 내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라인하이츠게보츠(Reinheitsgebot), 우리말로 맥주 순수령이다. 


그리고 17세기 영국과 교역이 많았던 네덜란드는 이 홉이 들어간 맥주를 영국에 알리게 된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홉을 사용하지 않은 영국의 맥주에 홉이 들어가게 되고, 버튼 온 트렌트(Burton-on-Trent)  지역에서 맥아를 직화로 굽지 않아 맑은 색을 내는 페일 에일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페일 에일을 독일 뮌헨 출신의 제들 마이어와 빈에서 온 안톤 드레허가 몰래 자국으로 가져와 라거 맥주 공법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제들 마이어는 옥토버페스트의 대표 맥주인 슈파텐 (Spaten Munchen)을 만들게 된다. 


슈파텐은 칼폰 린데라는 과학자를 지원했고, 칼폰 린데는 냉장고를 발명하게 된다. 이제부터 드디어 맥주를 제대로 시원하게 마시는 문화가 퍼진 것이고, 더운 여름에는 저온 발효가 어려워 여름에 문을 닫았던 맥주 양조장이 4계절 양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이 라거 효모가 체코의 플젠 지방에 전해지고, 이를 통해 나온 것이 필스너 맥주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카스, 하이트, 버드 와이저 등은 모두 이 필스너 맥주이며, 이때 유리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지금처럼 유리잔에 맥주를 마시는 문화가 커지게 된다. 이로써 이전까지 쾌쾌한 색이었던 맥주가 황금빛 골드색으로 바뀌면서 현대의 맥주 문화가 드디어 생기게 된다.


진열장에 전시 중인 진(gin). 네덜란드가 만들고 영국이 보급했다. 출처 위치피디아
진(gin)을 발명한 나라


1660년 실비우스라는 네덜란드 의사는 이뇨작용을 돕기 위해 약술을 하나 만든다. 몸에 빠른 흡수를 시키고자 주니퍼베리를 맥주에 넣어 증류한 술로 초기에는 약국에서만 판매했다. 이 술은 영국의 명예혁명 덕분에 영국으로 강제 진출하게 된다. 명예혁명은 유혈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붙어진 이름. 당시 의회와 대립하던 제임스 2세가 프랑스를 망명을 가고, 뒤를 이어 네덜란드 귀족인 윌리엄 3세가 영국의 국왕이 된 것이다. 


결국 네덜란드의 진은 자연스럽게 영국으로 강제 진출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런던 진. 일반적인 진은 노간주나무 열매 대신 향료도 넣고 설탕을 넣는 진도 있다. 그런데 런던 진은 드라이한 맛을 자랑해서 맛이 깔끔했다. 영화 007에 등장하는 마티니나 진토닉 등이 대표적인 진으로 만든 칵테일이다.


술은 돈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나라라고 불린다. 당양한 인종은 물론 종교, 그리고 의료, 젠더 문제까지도 관용적인 편이다. 대항해시대의 식민지 정책은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로컬의 종교를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들이 관용적(?)일 수 이유는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 돈이 잘 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럽의 술 비즈니스를 이끈 이유는 '술은 좋은 비즈니스'이기 때문. 네덜란드인이 전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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