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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Mar 13. 2022

영국, 프랑스의 백년전쟁, 그리고 와인

프랑스 와인 발전사

중세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전쟁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황과 유럽 제후들의 이권이 맞아떨어져서 침략전쟁으로 전락한 ‘십자군전쟁’(1096~1272), 다른 하나는 유럽 패권을 노리던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1337~1453)이다.


이 중 백년전쟁은 당시 유럽사회의 기반이었던 봉건주의를 무너트리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에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일깨워줬다. 즉 근대 국가 기틀을 마련해준 것이다.


당시 유럽은 국가와 민족이라기보다는 영주, 귀족, 왕족으로 나뉜 세계였다. 영국 왕도 자신이 프랑스 귀족이라고 생각했으며, 프랑스 왕 역시 영국을 프랑스 산하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영국 왕실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소고기를 뜻하는 비프(Beef)와 돼지고기인 포크(Pork)가 대표적이다. 소는 카우(Cow), 돼지는 피그(Pig)로 발음되지만, 귀족들이 먹는 고기에만 프랑스어로 불리고 그게 고착된 것이다. 하지만, 100년(정확하게는 116년)간 처절한 전투를 통해 영국은 영국인과 다른 프랑스인, 프랑스는 프랑스인과 다른 영국인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정체성이 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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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산지를 두고 싸운 전쟁

흥미로운 것은 이 백년전쟁이 술을 두고 싸운 전쟁이기도 하다. 백년전쟁은 스코틀랜드 왕위, 프랑스 왕위 계승,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 지역) 지배권을 놓고 싸운 전쟁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포인트가 바로 와인 주산지 보르도(Bordeaux) 지방을 놓고 벌인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백년전쟁 당시 보르도는 프랑스 땅이 아닌 영국 땅이었기 때문.


프랑스왕, 영국왕을 모두 남편으로 뒀던 여인

영국은 1066년에 노르망디 공국에 정복을 당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르망디 공국과 합쳐지면서 프랑스 서쪽의 알짜배기 땅 아키텐 지방을 가져간다. 1152년 프랑스의 아키텐 영주인 엘레노어가 영국 왕 헨리 2세와 결혼하면서 결혼 지참금으로 이 땅을 영국에 줬다. 게다가 엘레노어는 원래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 그는 프랑스 왕과 이혼을 하고 10살이나 어린 헨리 2세(당시 19세로 왕자 신분)와 결혼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영국이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양국 감정 다툼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엘레노어와 헨리 2세의 결혼으로 영국은 앙주 제국이라고도 불리며 프랑스보다 더 큰 땅을 가진다. 엘레노어가 영국에 준 아키텐 지방에는 보르도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프랑스에 땅을 계속 빼앗기고, 백년전쟁 직전에는 보르도 지방만 남게 된다. 결국 보르도 지역에 대한 분쟁이 백년전쟁의 대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보르도 지방은 영국의 젖줄이었다. 보르도 지방에서 나오는 와인을 통해 영국은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였고, 이는 영국 전체 재정에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보르도 지방이 달갑지 않았고, 결국 술을 놓고 116년간 양국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게 된다.


백년전쟁을 담은 당시의 모습


양국의 전쟁으로 사과 발효주 시드르로 유명한 노르망디, 샴페인으로 유명한 샹파뉴, 브랜디로 유명한 아르마냐크, 고급 와인으로 유명한 부르고뉴 지방까지 모두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한마디로 백년전쟁은 술 주산지들의 전쟁이었고, 이들 지방을 가져간 프랑스는 전쟁 이후 프랑스 술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프랑스의 부르고뉴, 잔다르크를 죽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다. 2019년에는 2013년 빈티지 제품이 3800만원에 거래됐다. 이 로마네 콩티 외에도 이 지역의 와인은 늘 ‘고급스러움’이 따라붙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와인 부르고뉴의 로마네 꽁띠


바로 수출로 성장한 보르도와 반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와인은 꾸준히 영국으로 수출됐다. 그렇다 보니 보르도 와인은 대량 생산되고 규격화됐다. 와이너리가 소유한 포도밭도 굉장히 넓어 와인 업계 대기업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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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부르고뉴 지역 와이너리는 대부분 작은 밭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수제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제조 수량도 많지 않아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포도 품종도 레드 와인은 피노 누아(Pinot Noir), 화이트 와인은 샤르도네(Chardonnay)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즉, 유사품을 만들기도 어려운 환경이다. 그래서 프랑스 대표 고급 와인 산지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 부르고뉴 지역은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를 배신한 곳이다. 이곳을 통치하던 부르고뉴 공국이 바로 주적인 영국 편에 섰던 것. 그것도 백년전쟁 영웅인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영국에 팔아넘겨 그를 화형에 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 샤를 6세와의 마찰로 영국과 손잡고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지방에 속한 동레미(Domremy)란 마을을 침범한다. 이곳은 잔 다르크의 고향으로, 이 전쟁으로 그녀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이후 잔 다르크는 16세에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2년 동안 오를레앙 성을 포위한 영국군을 무찌르며 랭스(Reims) 지역 등을 탈환한다.


샤를 7세 즉위식을 한 곳이 바로 샴페인의 고장 샹퍄뉴

이 랭스가 바로 샴페인으로 유명한 샹파뉴(Champagne) 지역이다. 이곳은 프랑스 왕 대관식을 진행하는 랭스 대성당(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곳. 도팽(왕세자 직위) 샤를이 즉위식을 통해 샤를 7세가 된 곳도 이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대관의 도시(La Cite Des Sacres)’ 또는 ‘왕들의 도시(La Cite Des Rois)’라고도 불린다. 이곳의 술 샴페인이 축제와 파티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이유에 대해 행사를 진행했던 도시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화형당하는 잔다르크. 영국군보다는 부르고뉴군에게 사로잡힌 것이 컸다. 

잔 다르크는 여러 차례에 걸쳐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샤를 7세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그의 인기가 너무도 커 샤를 7세와 귀족들은 그를 견제한다. 결국 왕실의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전투에 나간 그는 부르고뉴 군에게 사로잡힌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실에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고 하지만 프랑스 왕실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단물은 다 빼먹었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부르고뉴는 잔 다르크를 영국에 팔아버린다.


이후 영국과 부르고뉴가 주축이 된 재판에서 그는 마녀로 선고받고 화형을 당한다. 그를 죽음으로 몬 것은 부르고뉴였지만, 실질적으로 그를 죽인 것은 바로 프랑스 왕실이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이 된 것. 임진왜란 시절, 이순신 장군을 질투한 선조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프랑스에는 잔다르크, 영국에는 딸보 장군

프랑스에 잔 다르크가 있다면 영국에는 누가 있었을까? 백년전쟁 당시 잔 다르크의 라이벌이었으며,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프랑스를 궁지로 몬 인물, 영국의 아킬레스로 불리던 존 탤벗(John Talbot) 장군이다.


영국군 총사령관이었으며, 프랑스 귀족을 포로로 잡았다. 무엇보다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있던 오를레앙 포위 전에서 프랑스를 절체절명 위기까지 빠트린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잔 다르크.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탤벗 장군을 처절한 전투 끝에 물리치고, 포로로 사로잡는다. 탤벗 장군은 4년여 포로생활을 한 뒤 포로교환으로 다시 영국군 품에 돌아간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백년전쟁 마지막 전투이자 와인 산지인 보르도 탈환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르도는 영국 최후 보루와 같은 곳이었다. 이미 200년 넘게 지배를 하고 있던 곳이었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대부분 영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던 시대. 하지만 1451년 이 지역마저 영국은 프랑스에 빼앗겨 버린다. 이러한 상황에 영국 왕실에 보르도 시민들마저 프랑스로부터 이 지역을 탈환해 달라는 요청이 온다. 영국이 진다면 자신들의 고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탤벗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해 영국군은 원정을 떠난다.


이 과정에서 보르도 시민들은 프랑스 수비대를 내쫓고, 영국군을 열렬히 환영한다. 이 당시 보르도인의 정체성은 프랑스인보다는 영국인에 더 가까웠다. 또 프랑스 왕실이 잦은 전쟁으로 와이너리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한 것도 한몫했다.


와인이 된 탈보 장군

이후 백년전쟁 마지막 전투가 이뤄진다. 보르도에서 약 50㎞ 떨어진 카스티용이란 곳에서 벌어진 카스티용 전투(Battle of Castillon). 당시 잔 다르크를 사로잡고 죽음으로 몰아낸 부르고뉴는 영국을 배신하고 다시 프랑스 왕조와 연합해 이곳으로 함께 쳐들어온다. 결국 최후까지 결전한 탤벗 장군은 70세 나이로 이곳에서 전사한다. 무려 40년 가까이 전장에서 보낸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와 영국의 116년간 전쟁은 마무리가 된다. 와인으로 시작해 와인으로 끝난 백년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샤토 탈보. 탈보 장군의 이름을 가져온 와인이다

하지만 보르도인은 자신들의 고향을 탈환해 주러 온 탤벗 장군에 대한 고마움을 남기고자 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그의 이름을 넣은 와인 샤토 탈보(Chateau Talbot)다. 2002년 당시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그의 연인과 함께 마신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와인이다. 보르도 최고급으로 꼽히는 그랑 크뤼 4등급에 속한다.


결국 술로 시작한 술로 끝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하지만 영웅은 이렇게 술 이름으로 남게 되고, 이 와인은 보르도 최고 와인 등급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적인 와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보르도 와인을 발전시킨 네덜란드인

1453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300년여간 영국의 지배를 받던 보르도 지방은 프랑스 왕가에 귀속한다. 백년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보르도는 봉건사회에서 나름대로 자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프랑스 왕가에 귀속되고, 프랑스 왕가가 절대 왕정으로 가는 과정에서 보르도는 오히려 영국령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결국 1458년부터 1675년까지 프랑스 왕가의 지배에 꾸준히 저항한다. 반골 기질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고객은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보다는 북유럽 쪽 시장을 개척하기로 한다. 북해·발트해 연안의 독일 여러 도시가 뤼베크를 중심으로 상업상의 목적으로 결성한 동맹인 한자동맹과 거래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상인이 보르도에 정착한다. 당시 한자동맹에는 런던도 있었다. 즉, 영국으로 수출이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다시 이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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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보르도 와인 인기가 높아지면서 와인 생산량이 부족하기 시작한다. 땅은 한정돼있고, 그러자 보르도인은 자신들의 와인을 팔아주는 네덜란드 상인에게 부탁한다. 여기서 네덜란드인다운 발상이 튀어나온다. 바로 간척이다. 대서양으로 연결된 지롱드강의 늪지대 주변을 매립하자는 것이었다. 원래 백년전쟁 당시 이쪽은 강을 바라보는 요새가 있던 곳. 이 요새가 있는 곳들이 이제는 포도밭이 됐다. 이렇게 메워진 충적토는 포도재배에 최고였다. 물이 빠져나가자 자갈 토양이 드러났고, 이는 배수가 잘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와인 산지가 바로 메독이다.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무통 로칠드까지 특급 와이너리가 있는 곳은 이렇게 탄생했다.


보르도 5대 특급 와인. 왼쪽부터 샤토 오브리옹, 샤토 마고, 샤토 라뚜르,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무통 로칠드
지금의 와인과 달랐던 보르도 와인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보르도 와인은 지금과 무척 달랐다. 15~16세기 이전 와인은 클라렛이라고 해 선분홍색의 로제 와인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1533년에 장 드폰택이 보르도 남쪽 그라브 지역에 와이너리를 만들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샤토 오브리옹이다. 이곳에서 진한 붉은색, 흔히 이야기하는 보디감 있는 와인을 만들었고, 그 결과 17세기 이러한 모습이 보르도 와인 스타일로 굳어진다.


보르도의 클라렛 와인. 중세 시대에 즐겨 마시던 와인 스타일과 유사하다. 숙성기간이 거의 없어 포도맛 그 자체에 가깝다. 


이곳 와인은 클라렛 와인에 질린 영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덩달아 보르도 와인이 최고 와인으로 부상한다. 즉, 지금의 보르도 레드 와인 스타일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메독 지역을 중심으로 6000여개 와이너리 중 톱 1%인 61개 와이너리를 선출한다. 이러한 점이 보르도 와인을 유명하게 한다.


결국, 지금 보르도 와인을 만든 것은 백년전쟁의 전후 영국에서의 소비, 네덜란드인으로 시작한 간척 사업, 그리 마케팅 기법, 그리고 프랑스의 재배환경이 더해서 만들어졌다. 와인은 단순한 프랑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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