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역사에 있어서 늘 무척 궁금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왜 영국에는 왜 유명한 와인이 없냐는 것이다. 영국은 엄청난 와인 소비국이다. 근현대의 와인 산업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450여 곳의 와이너리가 와인을 만들고 있다. 스파클링 와인의 수준은 꽤 높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비교하면 여전히 마이너다.
영국의 포도밭. 주로 영국 남부에 있으며 스파클링 와인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고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영국의 와인 제조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기후다. 포도재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늘 안개가 자욱하고, 비도 많이 오고, 날씨도 춥고 하다 보니 배수도 잘 안되고, 당도 높은 포도도 잘 생산이 안 되는 것.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다른 배경도 있다고 본다.
러셀크루가 주연으로 등장한 로빈후드에서는 숀코네리가 사자왕 리처드 1세로 등장했다. 출처 로빈후드
영어를 못하는 영국왕 사자왕 리처드 1세
바로 사자왕이라고 불리는 영국 왕 리처드 1세의 영향이다. 리처드 1세는 왕 재위 기간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낸 인물이다. 십자군 전쟁 때 워낙 많은 활약을 하다 보니 '사자의 심장을 가진 왕'이라고 불렸다. 통치에 대해서는 무능했으나 용감과 관용이라는 차원에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한마디로 중세의 전형적인 기사였던 셈.
그는 영국 왕인데 영국에 오래 살지 않았다. 8살 때 프랑스로 가버린다. 그리고 영국에는 겨우 6개월밖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에서 훨씬 오래 살았다. 즉, 영어를 거의 못하는 프랑스어만 쓰는 왕이라는 것. 그리고 이 시기가 딱 로빈후드가 나온 시기다. 러셀 크루가 주연인 영화 로빈후드를 보면 리처드 1세를 숀 코네리가 열연을 한다. 물로 영화에서는 영어를 쓰고 로빈 후드를 후원하는 등 영화적 상상이 가미가 된다.
리처드 1세 때의 앙주 제국. 붉은 색이 영국령. 파란색이 프랑스령. 출처 나무위키
프랑스 땅 30~40%를 지참금으로 가지고간 사자왕 리처드 1세의 어머니
리처드 1세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아키텐 영주인 '엘레노어르'라는 인물이다.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이혼하고 영국 왕 헨리 2세에게 시집간 대단한 존재다. 그의 아버지인 헨리 2세 역시 위로 올라가면 프랑스 귀족(노르망디 바이킹 계열)이다.
어머니는 영국 왕실로 시집가면서 혼수품으로 보르도 지역을 포함한 프랑스 서남부 지역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그리고 갑자기 영국 왕실은 지배 면적이 넓어진다. 영국입장에서는 흔한 말로 개꿀이었던 셈. 역사에서는 프랑스 서부와 영국이 하나가 되어 있었던 때를 앙주 제국이라고 부른다.
영국 왕실의 와인을 정하는 리처드 1세
리처드 1세는 즉위 후 영국 왕실의 와인을 정하게 된다. 당시에도 영국 본토에 와인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영국에서 제대로 살아 본 적도, 잘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영국 왕실의 와인을 프랑스 보르도 주변 와인으로 정해버린다. 당시만 하더라도 보르도는 영국령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 지역은 엄마의 땅이었다. 리처드 1세의 정체성은 영국인보다 프랑스인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왕실의 와인이었던 보르도는 백년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에 빼앗기게 되고, 이제는 국가 대 국가로 수입하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보르도 와인에 대한 애착은 그대로 이어진다.
어떻게 일국의 왕이 자국의 말을 못 하고 외국어만 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백년전쟁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왕실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리처드 1세뿐만이 아니다. 영국을 점령한 노르망디 공국 자체가 프랑스 신하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에는 프랑스어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고급 음식, 문화, 예술, 법률 등 고급 단어는 대부분 프랑스어에서 왔다.
음식 품목으로 대표적인 단어가 소고기'Beef', 돼지고기'Pork'다. 각각 프랑스어인 'boeuf'와 'Porc'에서 온 말이다. 소와 돼지를 농업의 본질로 본 농민들은 'Cow'와 Pig'라는 단어를 쓰고, 먹는데 본질을 둔 귀족은 'Beef'나 'Pork'를 쓰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농민들은 소나 돼지를 먹을 일이 지극히 적었을테니 말이다. 지금도 특히 -ion으로 끝나는 단어의 대부분은 프랑스에서 온 것이다. Action, Attention, Communication, informaiton 등이다.
영국의 문화형성에 지대적인 역할을 한 프랑스
가끔 보수적인 프랑스 사람들이 영어를 안 쓰려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은근히 영국을 무시한다고도 한다. 이것은 두 나라가 단순히 라이벌적인 관계가 아닌 영국의 문화와 문명 형성에 프랑스가 어마어마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그리고 와인까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