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켈란은 어떻게 브랜딩을 키웠나
소비하는 제품에서 금융자산으로 진화한 위스키의 세계
7000만 원에서 36억 원으로, 가치를 증명한 시간
2005년 5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위스키 행사에서 '맥캘란 파인 앤드 레어 1926' 60년 숙성 제품이 7000만 원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가격이었지만, 이는 국내에도 위스키가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약 18년이 흐른 2023년 11월, 바로 그 7000만 원짜리 위스키와 같은 해에 증류한 또 다른 병(발레리오 아다미 라벨 버전)이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약 36억 원이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낙찰되었다. 7000만 원에서 36억 원으로. 이 경이로운 가치 상승은 단순히 '비싼 술'에 대한 화제를 넘어선다.
그렇다면 맥캘란은 어떻게 성장했기에 이러한 초고가 위스키 시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원래부터 맥캘란은 최고의 위스키로 군림했던 것일까?
2등에서 시작한 맥캘란의 역사
1823년, 영국에서는 스카치 위스키 역사에 이정표가 세워진다. 바로 '소비세법(Excise Act)'이 통과되면서 합법적인 위스키 증류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전까지 있었던 위스키는 대부분 몰래 만든 술, 즉 불법적인 밀주였으나, 이것이 정식 합법화로 바뀐 것이다. 이 법안 아래 1824년, 스코틀랜드 제1호 공인 증류소로 등록한 것이 바로 '더 글렌리벳'이었고, 같은 해에 면허를 취득한 맥캘란은 사실상 2등의 위치에서 역사를 시작했다.
맥캘란의 현저한 변화는 1892년 증류소를 인수한 로더릭 켐프(Roderick Kemp)에게서 시작된다. 그는 이전부터 사용되던 스페인산 셰리 캐스크 숙성을 브랜드의 확고한 원칙으로 삼았다. 당시 영국으로 셰리 와인이 담겨왔던 오크통을 위스키 숙성에 재활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켐프는 이를 맥캘란의 정체성으로 규정했다. 셰리 캐스크는 위스키에 풍부한 과일, 건포도, 초콜릿 뉘앙스를 부여하며 복합적인 풍미를 만드는데, 맥캘란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원칙을 고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맥캘란의 이 원칙은 20세기 중반 이후 셰리 캐스크의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스페인의 내부 사정과 1981년 스페인 법률 개정으로 셰리 와인을 병입 상태로만 수출하도록 규제하면서, 빈 셰리 캐스크의 영국 유입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는 셰리 캐스크 자체의 희소성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꾸준히 셰리 캐스크를 고집해 온 증류소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자연스럽게 맥캘란은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았던 원액 공급처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전 세계 위스키 시장의 90% 이상은 블렌디드 위스키가 차지했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다양한 증류소에서 생산된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 만드는데, 맥캘란의 주 역할은 바로 이 블렌디드 위스키 회사에 원액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페이머스 그라우스', '커티 삭' 등 최고급 블렌디드의 핵심 원액으로 공급되며 업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소비자들은 최종 제품의 이름만 알 뿐 원액 공급처인 맥캘란의 존재는 거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맥캘란의 이름은 '맥캘란-글렌리벳(Macallan-Glenlivet)'이었다. 이는 글렌리벳 지역에 있다는 지리적 의미와 함께, 제1호 공인 증류소인 '더 글렌리벳'의 후광을 입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독립과 독창성을 향한 대전환
이러던 맥캘란이 변화를 맞이한다. 1978년 방문자 센터를 열어 소비자와의 접점을 만들기 시작했고, 1980년에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린다. '-글렌리벳'을 떼어내고 정관사 'The'를 붙여 'The Macallan'으로 세상에 나선 것이다. 이는 빌려온 명성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이름과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위대한 독립 선언이었다. 이 결단을 통해 맥캘란은 자신의 뿌리, 즉 '맥캘란이라 불리는 땅'의 서사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독창성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생산 철학과 맛의 증명
이렇게 확립된 원칙은 독보적인 품질과 풍미로 증명되었다. 맥캘란은 두 가지 핵심 생산 철학을 통해 자사 제품을 차별화했다. 첫째, '유난히 작은 증류기(Curiously Small Stills)'에 대한 고집이다. 생산 효율성 대신, 증류액과 구리의 접촉을 최적화하여 풍부하고 과일 향이 응축된 원액을 얻는 방식을 택했다.
둘째, ‘100% 천연색(Natural Colour)’ 원칙이다. 스카치 위스키 법규상, 제품의 색상 일관성을 위해 캐러멜 색소(E150a)를 첨가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허용된다. 실제로 많은 증류소가 이 업계의 관행을 따르지만, 맥캘란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오직 캐스크와의 오랜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자연스러운 색상만을 고집한다.
이는 수십만 개의 오크통을 일관되게 관리하는 자신들의 캐스크 관리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의 표현이다. 더 나아가 소비자에게는 '순수성'과 '정직함'이라는 강력한 브랜드 가치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타협하지 않는 순수성은 맥캘란의 위스키를 단순한 공산품이 아닌, 각기 다른 역사를 지닌 유산으로 여기게 만들어 소장 가치를 극대화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철학이 빚어낸 맥캘란의 전통적인 맛은 셰리 캐스크의 영향을 통해 완성된다. 특히 유럽산 셰리 캐스크는 위스키에 말린 과일(건포도, 무화과), 스파이스(시나몬, 정향), 다크 초콜릿,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같은 묵직하고 화려한 풍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맥캘란의 클래식한 맛의 근간이며, 피트(Peat)향이 거의 없는 풍부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이것을 통해서 위스키 입문자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로컬의 가치를 증명한 콘텐츠 마케팅
새롭게 선언된 정체성은 소비자의 마음에 각인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1980년대에 시작된 전설적인 광고 캠페인 'The Macallan – The Malt'는 이 과업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 캠페인은 제품의 우수성을 직접적으로 외치는 대신, 위트와 품격이 담긴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 브랜드의 철학을 전달하는 콘텐츠 마케팅의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다.
먼저, 맥캘란은 자신들의 로컬, 즉 '땅'이 가진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맥캘란(Macallan)'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비옥한 땅'을 의미하는 게일어 'Magh'와 '성 필란(St. Fillan)'의 이름 'Ellan'이 합쳐진, 즉 '성 필란의 비옥한 땅'이라는 점을 알리며 이름 자체에 담긴 역사와 신성함을 부각했다. 또한 제품 포장에는 "숲이 우거진 언덕에 숨겨져, 전설적인 스페이강과 만나는 곳에 맥캘란의 본고장, 이스터 엘키스의 고택이 서 있다"와 같은 서정적인 문구를 넣어, 소비자들이 위스키 한 잔에서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의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클래식 악기와 함께 한 마케팅
나아가, 맥캘란을 최고급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한 광고에서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케이스에 맥캘란 병을 넣고 "Anything less would be a fiddle (이보다 못하다면 제대로 된 것(위스키)이 아니다/그저 그런 바이올린일 뿐이다)"이라는 중의적 카피를 사용했다.
또 다른 광고에서는 "롤스로이스, 해러즈 백화점, 맥캘란 그리고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브랜드이다"라는 카피라잇를 인용하며, 맥캘란을 자동차, 백화점, 악기 분야의 최고 명품과 동일선상에 놓았다.
이러한 비유와 스토리는 맥캘란을 '조용하지만 확고한 자신감을 가진 위스키'로 각인시켰고, 독립 선언을 소비자의 감성 속으로 파고들게 한 마케팅의 정수였다. 무엇보다 고급 자동차, 클래식 음악 애호가까지 맥캘란에 관심을 가지게 한 확장성 있는 마케팅이었다.
가치 패러다임 전환: 소비재에서 자산으로
독립 브랜드로 확고히 자리 잡은 맥캘란은 21세기에 들어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전략을 실행한다. 바로 2002년 시작된 '파인 앤드 레어(Fine & Rare) 컬렉션'을 통해 '대체 불가능한 희소성'을 창조한 것이다. '12년' 같은 숙성 연수 대신, '1926년'처럼 위스키가 증류된 '빈티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전략은 위스키를 단순한 소비재에서 시간이 담긴 역사적 유물이자 금융 자산으로 탈바꿈시켰다.
특정 연도에 한정 생산된 빈티지 위스키는 절대 재생산이 불가능하다는 본질적 희소성을 지닌다. 이 전략은 수집가와 투자자들을 시장으로 끌어들이며 맥캘란의 가격을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자산'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이야기가 연결하는 가치, 전략이 빚어낸 브랜드의 유산
결론적으로, 36억 원짜리 맥캘란 한 병의 가치는 단순히 오래된 술의 가격이 아니다. 그 안에는 확고한 품질 철학을 세운 역사적 결단, 거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정체성을 선언한 용기, 그 새로운 정체성을 소비자의 감성 속에 각인시킨 스토리텔링의 힘, 그리고 마침내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며 스스로를 대체 불가능한 자산으로 만든 치밀한 희소성 전략이 모두 녹아있다.
맥캘란은 한 병의 위스키를 파는 것이 아니라, 200년에 걸쳐 완성된 이 강력한 브랜드 서사를 세상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나는 36억짜리 위스키를 구매할 수도 없고, 마셔본 적도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맥캘란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맛있는 위스키를 넘어,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맥캘란의 이런 스토리만으로도 우리는 상대방과의 대화를 촉진하고,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스코틀랜드의 한 지역과 소통하는 또 다른 언어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최고의 브랜드란, 가장 좋은 제품을 넘어 가장 풍성한 이야기를 건네는 것일지도 모른다.
written by 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