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의 와인에서 예수의 피까지, 인류를 지배한 '희생과 구원'
해당 글은 종교를 가진 분들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학자들이 그들의 시각으로 분석한 글이니 '이러한 역사적 맥락도 있다' 정도로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는 평등을, 붓다는 자비를 말했는데 왜 사회는 불평등했을까?
디오니소스의 와인에서 예수의 피까지, 인류를 지배한 '희생과 구원'의 알고리즘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모순(Paradox)을 꼽자면, 단연코 종교와 권력의 관계일 것이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고, "신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불교의 붓다 역시 철저한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며 "모든 생명은 존귀하며,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며 자비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이 두 종교의 공통점은 태생적으로 혁명적 평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가장 평등과 자비를 외쳤던 이 두 종교가, 중세 유럽과 동아시아 봉건 사회에서 가장 엄격한 신분제와 불평등을 옹호하고 유지하는 강철 같은 옹벽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지배계급은 평등의 교리를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뒤틀어 왕과 귀족의 지배를 정당화했을까?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서 피지배층은 왜 혁명 대신 순응을 택했을까?
이 거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예수가 오기 훨씬 전, 와인의 신이 춤추던 고대 그리스의 극장으로 먼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배의 기원은 디오니소스와 희생양(Scapegoat)의 미학
중세 기독교가 피지배층을 통제한 심리적 기술은 사실 그들의 독창적인 발명품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지혜, 바로 비극(Tragedy)과 와인(Wine)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는 와인의 신이자 광기와 축제의 신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와인을 마시며 집단적인 황홀경을 느꼈고, 이 제의에서 비극(Tragoedia)이 탄생했다. 비극은 어원상 '염소(Tragos)의 노래(Oide)'라는 뜻이다. 즉, 신에게 바치는 희생양(Scapegoat)을 의미한다.
희생양을 통한 정화(Catharsis), 그리고 민주주의 그리스인들은 무대 위에서 비극적 주인공이 처참하게 몰락하고 파멸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대표적으로 오이디푸스를 보자.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왕이 된 지혜로운 영웅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그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황야로 떠난다.
사진 설명: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게 된 후 스스로 눈을 찌르고, 딸 안티고네의 부축을 받으며 테베를 떠나는 장면(Antoni Brodowski, Oedipus and Antigone (1828))과 방랑 끝에 아테네 근교 콜로누스 숲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오이디푸스(Fulchran-Jean Harriet, Oedipus at Colonus (1798))
관객들은 영웅의 처절한 몰락을 지켜보며 공포와 연민을 느꼈고,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의 찌꺼기를 씻어냈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Catharsis, 정화)다.
놀라운 점은 이 '정화'의 기능이다. 그리스에서 이 비극은 사회적 비평의 장이었다. 시민들은 영웅의 몰락을 통해 권력의 오만함을 비판했고, 갈등을 해소했으며, 이는 그리스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이 문화가 어떻게 유대 땅의 예수에게까지 이어졌을까?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 이 둘을 연결한다.
강력했던 그리스 헬리니즘 문화, 유대 문화로 스며들다
거대 제국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면서, 그리스의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는 이집트, 가나안,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유대 사회 역시 수백 년 동안 이 강력한 그리스 문화의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성경 원문을 연구할 때 영어, 독일어, 라틴어, 히브리어는 물론 헬라어(그리스어)를 필수적으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약성경 자체가 헬라어로 쓰였으며, 당시 유대인들은 히브리 사고방식에 그리스의 철학적 개념을 융합해 냈다.
즉, 기독교가 그리스의 '비극'이나 '희생양 메커니즘'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유대 문화의 토양 속에 헬레니즘이라는 거름이 뿌려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의 리믹스: 비평을 거세하고 복종을 심다
중세 교회는 이 헬레니즘의 유산 위에서 그리스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계승했다. 다만 그 목적지를 '민주주의(비판)'에서 '봉건제(안정)'로 바꾸었을 뿐이다.
교회는 예수를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비극의 주인공이자, 궁극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말한다. 중세 교회의 십자가상(Crucifix)을 보면 그곳엔 화려한 왕관을 쓴 왕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며 처절하게 매달린 '고통받는 신'이 있다.
철학자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십자가에 달린 신의 형상은 고통받는 민중들이 자신의 무력함을 '거룩함'으로 포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노예 도덕'의 상징이라고 분석했으며,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십자가상의 예수는 고통받는 인간이 자신의 아픔을 신에게 투영한 결과물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위로한다고 통찰했다.
"저명한 역사학자 요한 하이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당시 민중들은 삶의 비참함을 견디기 위해 피 흘리는 예수의 고통에 깊이 몰입했고, 그 거룩한 비극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매일 영주에게 수탈당하고 고통당하던 농노들은, 교회라는 극장에 들어가 피 흘리는 예수상을 보며 그리스인들처럼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볼 수 있다.
"신의 아들조차 저렇게 고통받았다. 나의 이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예수를 닮아가는 가장 성스러운 과정이다."
교회는 예수의 가련함과 처절함을 강조함으로써, 농노들의 비참한 현실을 종교적 수행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황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등, 농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반면, 흑사병이 창궐하기 전까지만 해도 농노의 반란은 거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섭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림설명: 장 프랑수아 밀레 - 《이삭 줍는 여인들》추수가 끝난 밭에서 남겨진 이삭이라도 주워야 연명할 수 있는 최하층 빈민을 그렸다.
비판의 화살을 '사회'에서 '나'에게로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그리스 비극이 고통의 원인을 탐구하며 사회적 비판(민주주의)으로 나아갔다면, 중세 기독교는 고통의 원인을 '나의 죄(Sin)'로 돌렸다.
그리스인은 비극을 보고 토론장으로 나갔지만, 중세 농노는 비극(예수의 고통)을 보고 고해소로 들어갔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교회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민중의 분노를 체제(왕/귀족)가 아닌 내면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평등을 말하는 종교가 불평등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던 최고의 심리 기술이었다.
서양의 통치 기술: 신학(Theology)으로 권력을 요리하다
심리적 정화 작업이 끝났다면, 이제는 논리적 복종이 필요하다. 지배자들은 바울의 서신을 인용해 통치의 헌법을 완성했다.
"모든 권력은 위로부터": 왕권신수설의 헌법
그들이 찾아낸 최고의 무기는 사도 바울의 편지, 바로 로마서 13장 1절이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이 구절은 중세 천 년을 지배한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의 뿌리가 되었다. 힘으로 왕이 된 게르만의 야만적 군주들은 이 논리 하나로 '신이 임명한 대리인'이 되었다. 왕에게 반역하는 것은 단순한 하극상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신성모독이 되었다.
불평등을 질서로: 사회 유기체론
"그렇다면 평등하다는 성경 말씀은 뭡니까?"라고 묻는 이들을 위해 교회는 사회 유기체론을 내밀었다.
"이 세상을 보라. 몸에는 머리가 있고, 팔이 있고, 발이 있다. 왕과 교황은 머리요, 기사는 팔이며, 농노는 발이다. 발이 머리가 되려 하면 그 몸은 죽는다."
이 비유는 치명적일 만큼 효과적이었다. 불평등은 이제 차별이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몸을 살리기 위한 신성한 역할 분담(Vocation)으로 둔갑했다. 농노가 평생 허리를 굽혀 밭을 가는 것은 비천한 노동이 아니라, 신이 부여한 거룩한 소명을 수행하는 종교적 예식이 되었다.
내세의 대반전: "죽으면 네가 왕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것이 투여된다. 바로 내세(Afterlife)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너희 가난한 자들은 천국을 소유할 것이다."
이 말은 현실의 불평등을 뒤집어엎으려는 에너지를 미래로 유예시켰다. "지금 50년만 고생하면, 영원한 시간 동안 왕처럼 살 수 있다." 이 강력한 희망 고문 앞에서 농민들은 혁명의 깃발 대신 기도의 묵주를 들었다.
지식의 독점, 그리고 와인(Dionysus to Jesus)
하지만 교회가 말(Logic)로만 세상을 지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디오니소스의 유산인 '와인'과 '지식'을 독점한 당대 최고의 실력자 집단이었다.
로마 제국 멸망 후, 야만의 시대에 유일하게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았던 계급은 성직자와 수도사뿐이었다. 그들은 고대의 모든 지식(법률, 의학, 천문학)을 수도원 도서관에 가두고 독점했다. 왕들이 법을 만들려면 수도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 수도원 학교들은 훗날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등으로 발전하며 오늘날 대학(University)의 기원이 된다. 즉, 지성의 산실조차 교회의 통제 하에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와인은 디오니소스의 피이자 광기의 상징이었다. 중세 교회는 이 와인을 예수의 피(성혈)로 변모시켰다. 성스러움의 상징이 된 와인은 미사에 필수적이었고, 이를 생산하는 것은 수도원의 핵심 과업이 되었다.
수도사들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기치 아래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흙(Terroir)을 연구했다. 그들은 로마의 선진 농업 기술을 가진 농업 과학자들이었다.
오늘날 수천만 원을 호가하며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로마네 콩티(Romanée-Conti)는 원래 생 비방(Saint-Vivant) 수도원이 소유하고 관리하던 포도밭이었다. 돔 페리뇽 같은 수도사가 샴페인의 제조법을 발전시킨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최고급 와인은 신에게 바치는 정성이자, 동시에 교회의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동양의 거울: 붓다와 왕, 그리고 업(Karma)
시선을 동쪽으로 돌려보자. 한국과 일본, 중국 역시 기독교 대신 불교라는 운영체제로 사회를 통제했다. 서양과 놀랍도록 닮은꼴이다.
왕즉불(王卽佛): 왕이 곧 부처다
동양의 왕들은 서양의 왕권신수설 대신 왕즉불 사상을 채택했다. 왕이 곧 살아있는 부처라는 논리로 왕권을 신격화했다. 신라 진흥왕이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 칭하고, 일본 천황이 불교의 수호자가 된 이유다.
업(Karma)의 정치학: "네 탓이다"
서양이 '원죄'와 '내세'로 불평등을 정당화했다면, 불교는 '윤회와 업'을 사용했다.
"왕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덕으로 왕이 되었고, 노비는 전생의 죄업으로 노비가 되었다."
이 논리는 서양보다 훨씬 잔인하고 정교했다. 현재의 비참함이 사회 구조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민중은 혁명 대신, 다음 생을 위해 현생의 고통을 묵묵히 갚아나가는 길을 택했다.
호국불교: 칼을 든 승려들
고려의 팔만대장경, 일본의 도다이지 대불. 이것들은 단순한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국가적 위기 때마다 불교는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친다"는 호국불교의 기치를 내걸고 체제를 수호했다. 서양의 십자군처럼 동양의 승병들도 기꺼이 창을 들고 왕조를 지켰다.
프랑스, 교황의 영원한 '보디가드'이자 '장녀'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이 모든 시스템의 정점에 있던 나라 프랑스를 보자. 프랑스는 "가톨릭교회의 맏딸"이라는 별명답게 교황청과 가장 끈끈한 정경유착을 맺은 나라였다.
프랑스는 역사적 고비마다 교황의 목숨을 구했다.
8세기, 이슬람 세력이 파죽지세로 유럽을 삼키려 할 때,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이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그들을 막아냈다. 기독교 문명의 수호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게르만족인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위협할 때, 피핀과 샤를마뉴가 알프스를 넘어 그들을 정벌하고 땅을 교황에게 바쳤다(이것이 교황령의 시초가 된다). 그래서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에게 서로마 제국의 황제의 관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의리(?)는 근대까지 이어진다. 19세기에 이탈리아 통일군이 로마를 점령하려 할 때, 최후까지 바티칸을 지킨 군대 역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이었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직후에야 비로소 이탈리아는 로마를 합병할 수 있었다.
이 헌신의 대가인가, 프랑스 왕실은 교황으로부터 절대적인 통치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수도사들이 일궈낸 그 비옥한 포도밭들은 프랑스 귀족 문화의 정수가 되었다.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 때 탄생한 와인 '샤토뇌프 뒤 파프(교황의 새로운 성)'는 이 정교 결탁의 가장 향기로운 증거다. 프랑스 와인의 명성은 교황청이라는 거대한 뒷배경 없이는 불가능했다.
신화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질문
영원할 것 같던 이 '신성한 불평등'의 성벽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가 급감하자, 사람(노동력)이 귀해졌다. 농노들은 "신의 뜻"보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토대가 흔들리자,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 "사제 없이도 신과 만날 수 있다"며 영적 계급을 파괴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 부르주아와 민중은 왕의 목을 베고, 그동안 내세로 유예시켰던 '평등'을 현실로 소환했다. 일본 역시 19세기 메이지 유신을 통해 불교의 힘을 빼고 근대 국가로 나아갔다.
현대의 우리는 무엇에 지배당하는가?
중세 기독교와 동양의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 비극에서 차용한 희생과 정화의 메커니즘, 신학적 논리(왕권신수설/업설), 압도적 실력(지식/와인/기술)이라는 삼박자를 갖춘 완벽한 통치 시스템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와인을 마시며 비극을 보고 민주주의를 토론했다. 반면 중세인들은 교회에서 예수의 피(와인)를 마시며 비극을 보고 복종을 다짐했다.
이제 왕권신수설은 사라졌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신분제가 사라진 21세기, 거대한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는 현대판 신화는 무엇일까?
"가난은 너의 노력이 부족한 탓(현대판 업설)"이라 말하는 능력주의가, 혹은 자본이라는 새로운 신이, 과거의 교황과 붓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와인 잔을 기울이며, 디오니소스에서 예수로 이어진 그 붉은 액체 속에 담긴 천 년의 지배 역사를 곱씹어 본다.
참고문헌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민음사/책세상 등)
조르주 뒤비, 『세 위계』 (문학과지성사)
휴 존슨, 『와인의 역사』 (살림)
톰 스탠디지, 『역사 한 잔 하실까요?』 (돈키호테 / 구제: 식스 글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