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브랜딩 스토리
스카치 위스키의 라벨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숫자를 찾는다. 12, 17, 21, 30... 이 숫자는 단순한 아라비아 숫자를 넘어 위스키의 신분증이자 품질 보증수표와도 같다. 소비자들은 이 숫자를 통해 술의 가치를 가늠한다. 12라고 적혀 있으면 최소 12년 숙성, 30이라고 적혀 있으면 30년 숙성 원액을 썼다는 뜻이다. 만약 50년 숙성 원액에 10년 숙성 원액을 단 한 방울이라도 섞으면 그 위스키는 '10년 숙성'으로 표기해야 한다. 이것이 스카치 위스키의 엄격한 룰이자 타협할 수 없는 자존심이다.
그런데, 이 철칙을 비웃기라도 하듯 숫자 하나 없이 위스키 계의 지존(至尊)으로 군림하는 술이 있다. 바로 전 세계 스카치 위스키 판매 1위 브랜드, 조니워커의 최상위 라인업 '조니워커 블루라벨(Johnnie Walker Blue Label)'이다.
도대체 왜, 조니워커는 자신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최고급 위스키에 숙성 연수를 적지 않았을까? 그 탄생의 배경에는 '숫자'라는 단순한 표기가 담아낼 수 없는, '제도 그 너머의 가치'를 향한 전략이 숨어 있다.
식료품점에서 시작된 혁명, '조니'의 탄생
시계바늘을 200년 전으로 돌려보자. 조니워커의 역사는 스코틀랜드 킬마녹의 작은 식료품점(Grocery Store)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19세기의 위스키들은 단일 증류소에서 나온 싱글몰트 위주였는데, 품질 관리가 되지 않아 맛이 조악하고 들쭉날쭉하기 일쑤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창업자 존 워커(John Walker)는 식료품점에서 차(Tea)를 블렌딩하던 기술을 위스키에 접목하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여러 원액을 섞어 언제 마셔도 균일하고 훌륭한 맛을 내는 '블렌디드 위스키'는 그렇게 탄생했다.
브랜드 이름인 조니워커(Johnnie Walker)는 바로 이 창업자 존 워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존(John)의 애칭인 조니(Johnnie)를 사용하여 친근함을 더했고, 이는 훗날 전 세계인이 부르는 위스키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가 1867년 출시한 '올드 하일랜드 위스키'는 현대 조니워커의 모태가 되어 상업용 위스키의 표준을 정립했다.
선박 선장들을 엠버서더로 세우다
이후 1857년,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 알렉산더 워커는 산업혁명의 파도를 읽어냈다. 증기선의 발달로 대륙 간 이동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자, 그는 선박 선장들을 브랜드의 앰버서더(Ambassador)로 활용하는 천재적인 전략을 세웠다. 전 세계 항구를 누비는 '캡틴'들이 조니워커를 알리면서, 이 술은 스코틀랜드를 넘어 전 세계의 술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조니워커의 상징들이 탄생했다. 둥근 병 대신 고안된 사각형 병(Square Bottle)은 선박 운송 중 파손을 줄이고 적재 효율을 높였으며, 정확히 24도 기울여 붙인 라벨은 같은 크기의 글자라도 더 크게 보이게 만들어 진열장에서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장 중요한 상징은 스트라이딩 맨(Striding Man) 로고다. 1908년, 당대 최고의 만화가 톰 브라운이 점심 식사 중 냅킨에 슥슥 그린 이 그림은 창업자 존 워커가 지팡이를 들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초기에 과거를 의미하는 왼쪽을 보고 걷던 이 신사는, 시대가 변하면서 미래를 향해 오른쪽으로 걷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조니워커의 슬로건, 킵 워킹(Keep Walking) 정신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다.
무엇보다 영국 신사의 이미지를 그대로 부각 시키고 있다는 것. 조니워커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난 신사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숫자를 거부하고 컬러를 도입하다
1992년 탄생한 블루라벨은 숙성 연수 표기를 과감히 포기했다. "숙성 연수라는 제도의 틀에 갇혀, 위스키가 가진 진짜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는 것.
법적으로 숙성 연수는 사용된 가장 어린 원액을 기준으로 표기해야 한다. 마스터 블렌더가 최상의 풍미를 위해 60년 묵은 고숙성 원액에 활력을 더해줄 8년 숙성 원액을 아주 조금 섞는 순간, 그 위스키는 법적으로 '8년 숙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소비자는 '8년'이라는 숫자만 보고 그 술을 저평가할 가능성이 높다.
조니워커는 이 숫자의 딜레마를 거부했다. 표기법을 따르기 위해 맛을 타협하는 대신, 숫자를 지우고 19세기 위스키 특유의 풍미를 온전히 재현하는 길을 택했다. 디아지오가 보유한 1,000만 개 이상의 오크통 중, 오직 10,000개 중 1개(1/10,000) 꼴로 선별된 희귀 원액,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전설적인 증류소의 원액까지 블렌딩하여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필이면 왜 블루일까?
그렇다면 최상위 제품 이름은 왜 ‘블루라벨’일까. 여기에도 해상 무역 역사와 맞닿은 흥미로운 연결성이 있다. 19~20세기 초 대서양을 가장 빠르게 횡단한 여객선에 수여되던 영예의 타이틀이 ‘블루 리본’(Blue Riband)이다. 당시 영국의 큐나드 라인, 독일의 북독일 로이드 등은 자사 엔지니어링 기술이 세계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 천문학적 투자를 쏟아부었고 이들의 대서양 횡단 기록은 곧 국가의 자존심을 건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기록을 갱신한 배는 마스트에 파란 깃발을 휘날리며 항구로 들어왔는데, 조니워커는 이 타이틀에 영감을 받아 자신들의 걸작에 블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즉 블루라벨은 타협하지 않는 최고 퀄리티를 추구한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성의 '블랙'과 상징성의 '블루'
그렇다면 조니워커 블루라벨의 맛은 어떨까? 개인적인 취향을 담아 대표 프리미엄 제품인 조니워커 블랙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조니워커 라인업에서 두 제품은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블랙라벨(12년 숙성)이 스코틀랜드 전역의 원액을 블렌딩해 균일한 맛을 내는 '브랜드의 허리'라면, 블루라벨(NAS)은 희귀 원액을 통해 브랜드의 고급 이미지를 견인하는 '얼굴'이다.
맛의 지향점도 명확히 다르다. 블랙라벨이 피트(Peat) 향과 스모키함을 강조해 대중에게 강렬하고 남성적인 타격감을 주는 데 집중한다면, 블루라벨은 지금은 사라진 유령 증류소(Ghost Distillery)의 원액을 사용하여 복합적인 풍미와 부드러운 목 넘김을 구현하는 데 주력한다. 블랙라벨이 하이볼이나 온더락으로 즐길 때 빛을 발한다면, 블루라벨은 니트(Neat, 원액 그대로)로 마실 때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다층적인 향과 긴 여운(Finish)을 음미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즉, 블랙이 '일관성'을 무기로 시장을 넓혔다면, 블루는 '희소성'을 통해 숙성 연수 미표기(NAS) 제품이 가질 수 있는 프리미엄의 한계를 넘어서려 한 시도다.
관전 포인트: '싱글몰트'의 파도와 블렌디드 제왕의 응전
하지만 최근 10년 사이, 위스키 시장의 판도는 급격하게 변했다. 바야흐로 '취향의 시대'가 도래하며 개성과 희소성, 그리고 '수제(Craft)'의 가치를 내세운 싱글몰트 위스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맥캘란, 발베니, 글렌피딕 등 싱글몰트 강자들은 "섞지 않은(Single) 순수함"과 "오랜 시간(Age)"을 무기로 소비자를 유혹한다. 반면, 조니워커는 태생적으로 '블렌디드(Blended)' 위스키다. 여러 증류소의 원액을 섞어 대량 생산한다는 인식, 즉 '공산품'에 가깝다는 편견은 조니워커가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다. 수많은 몰트 위스키 애호가들이 "진정한 위스키는 싱글몰트"라며 블렌디드 위스키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조니워커의 행보는 지금부터가 진짜 관전 포인트다.
싱글몰트가 '개성'을 추구하는 독주자(Soloist)라면, 조니워커 블루라벨은 '조화'와 '궁극의 밸런스'를 추구하는 지휘자(Conductor)다. 싱글몰트가 특정 증류소의 날 선 캐릭터를 보여준다면, 블루라벨은 수십 개의 캐릭터를 지휘하여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같은 풍성함을 선사한다.
과연 조니워커는 거세게 불어오는 싱글몰트 열풍 속에서도 자신들이 지켜온 '블렌딩의 미학'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유행을 쫓는 대신 묵묵히 지켜온 일관성(Consistency)과 제도 너머의 가치, 그리고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킵 워킹(Keep Walking)의 정신이 깐깐해진 현대 소비자의 입맛을 계속해서 사로잡을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
이것이 이 거대한 '위스키 전쟁'을 즐기는 가장 흥미로운 방법이 될 것이다.
written by 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