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를 뺏긴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이 받아낸 '달콤한 사탕'의 경제학
수도원이 근간이 된 유럽의 와인과 맥주 문화
유럽의 술 문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낭만적인 상상을 하곤 한다. 깊은 산속, 인적이 드문 고요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기도를 마치고 정성스럽게 포도를 으깨 와인을 만들고, 사순절의 긴 허기를 달래기 위해 '액체 빵'이라 불리는 맥주를 빚는 장면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마시는 최고급 샴페인 돔 페리뇽의 창시자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사였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맥주 양조장인 바이엔슈테판 역시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유럽 주류 역사의 뿌리가 십자가 아래에서 발효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상당부분 사라진 수도원의 와인과 맥주
하지만 낭만을 걷어내고 현실의 등기부 등본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우리가 아는 전설적인 와이너리와 유서 깊은 양조장들 대다수는 더 이상 수도원의 소유가 아니다. 근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각국의 정부와 세속 권력은 이 거대한 '성스러운 자산'을 강제로, 혹은 반강제로 몰수해버렸다. 그렇다면 과연 수도사들은 순순히 자신들의 포도밭과 양조장을 내주었을까. 그럴 리 없다. 십자가를 든 성직자들도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치열했다. 결국 국가는 이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명분'이라는 채찍과 '경제적 보상'이라는 당근을 동시에 제시해야만 했다. 이것은 단순히 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 근대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자본 이동과, 신의 자산을 두고 벌어진 국가와 교회의 치열한 '빅 딜'의 역사다.
수도원은 어떻게 와인과 맥주의 제국이 되었나
수도원이 와인과 맥주의 제국이 된 배경에는 신앙심을 넘어선 냉혹한 경제 논리가 숨어 있다. 중세 유럽에서 술은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종교적 필수품이자 식량이었으며, 무엇보다 가장 안전하고 가치 있는 금융 자산이었다. 중세 봉건 사회의 영주와 왕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살생을 저질렀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을 엄습한 것은 지옥불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였다. 당시 세계관에서 영혼을 구원받고 연옥의 고통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회와 수도원에 재산을 기증하는 것이었다. "이 비옥한 포도밭을 하느님께 바치니, 죽은 나를 위해 영원히 기도해 주시오." 이러한 기증 문화가 수백 년간 이어지면서, 수도원은 유럽 최대의 지주이자 부동산 재벌로 성장했다. 특히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포도밭으로 만드는 것은 수도사들의 노동이자 기도였기에, 수도원의 영토 확장은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절대으로 끊기지 않았던 와인의 수요
또한 가톨릭 미사에서 와인은 사제의 축성을 통해 예수의 피인 성혈로 변하는 성스러운 존재다. 즉, 수요가 끊길 일이 없는 확실한 소비처가 보장된 상품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와인은 완벽했다. 밀이나 보리는 쥐가 먹거나 습기에 썩기 십상이지만, 알코올로 변환된 포도는 오크통 속에서 몇 년이고 보관이 가능했다.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맛과 가치가 상승하기도 했다.
수도사들은 일찍이 와인이 썩지 않는 화폐임을 깨달았다. 특히 부르고뉴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이나 시토회 수도사들은 토양을 분석하고 품종을 개량하여, 성직자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최고급 와인을 생산해냈다. 기도하는 손이 빚어야 진정한 보혈이 된다는 믿음은 와인의 부가가치를 천정부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견고하던 수도원의 와인 제국에 1차 균열을 낸 것은 14세기의 흑사병이었다. 포도를 재배하던 농노들과 관리하던 수도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면서, 노동 집약적인 포도밭 관리가 불가능해졌다. 결국 수도원은 땅을 쪼개어 소작을 주거나, 성장하는 도시의 부르주아들에게 일부를 매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국가가 개입하기 전, 민간 자본이 와인 산업에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교회의 자산을 빼았다
본격적으로 교회의 자산이 국가로 넘어간 결정적인 계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당시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전 국토의 약 10퍼센트에서 15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흉년과 세금에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수도원의 거대한 와인 창고는 더 이상 신의 축복이 아니라 탐욕의 저장고로 보였다. 혁명 정부와 뒤이어 등장한 나폴레옹은 파탄 난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가장 손쉬운 먹잇감을 선택했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국가 소유로 한다는 선언과 함께 수백 년간 내려온 수도원의 포도밭, 와이너리, 양조장은 하루아침에 국유화되었고,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잘게 쪼개져 경매에 부쳐졌다. 부르고뉴의 명품 포도밭들이 오늘날 모자이크처럼 수십 명의 주인에게 쪼개져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땅을 뺏긴 교회의 반발은 거세졌다. 나폴레옹은 통치를 위해 교황 비오 7세와 담판을 지었다. 1801년 맺어진 정교협약에서 나폴레옹은 아주 실용적이고 교활한 사탕을 제시했다. 그는 교황에게 이미 몰수해서 팔아버린 교회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영구히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되돌리려 하면 내전이 일어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프랑스 정부가 전국의 모든 주교와 신부에게 공무원에 준하는 월급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교회는 생존을 위해 이 굴욕적인 제안을 받아들였다. 성직자들은 거대한 토지 소유주에서 국가의 녹을 먹는 월급쟁이로 전락했지만, 혁명의 광풍 속에서 신분과 생계를 보장받았다. 이 시스템은 1905년 정교분리법으로 폐지될 때까지 100년간 지속되었다.
알자스 지방이 예외가 된 이유
흥미로운 점은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알자스-모젤 지방만큼은 유일하게 그 흔적이 남아 성직자들이 공무원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역사적 아이러니에 있다. 프랑스가 정교분리법을 제정하던 1905년 당시, 이 지역은 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해 독일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고, 1차 대전 이후 프랑스로 반환된 뒤에도 지역적 반발을 우려해 나폴레옹 시대의 법을 예외적으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지금도 이 지역 신부님들은 월급을 받는다.
프랑스와 정반대의 길을 걸은 벨기에
프랑스의 바로 옆 동네인 벨기에는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결론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벨기에는 타협의 나라답게 국가와 교회의 관계도 아주 독특한 공존 방식을 택했다. 벨기에 역시 나폴레옹 시대에는 프랑스 영토였기에 교회 재산이 몰수당하고 성직자가 월급을 받는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1830년 벨기에가 독립할 때, 그들은 혁명을 통해 독립했지만 종교 정책만큼은 구관이 명관이라 여겼다. 벨기에 건국자들은 사회적 안정을 위해 헌법에 아예 성직자의 월급은 국가가 지급한다고 못 박아버렸다.
교회 재산을 돌려주지 않는 대신, 국가가 교회의 생계를 영구히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벨기에 교회는 프랑스처럼 국가와 싸우지 않고, 국가 재정이라는 든든한 보호막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벨기에 신부님의 월급은 세금에서 나온다. 국가가 월급을 주니 교회는 생존 걱정이 없어졌다. 하지만 수도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추가적인 자선 활동을 위해 맥주 양조를 멈추지 않았다. 벨기에의 그 유명한 트라피스트 맥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다. 국가에 의존하는 교구 성직자와 달리, 봉쇄 수도원은 스스로 노동하여 먹고산다는 규율을 지키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품질의 맥주를 빚었다. 즉, 벨기에의 맥주 문화는 국가가 보장해 준 기본적인 생존권 위에서, 수도사들이 영적 자립을 위해 쌓아 올린 고귀한 탑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 교회가 부자인 이유
독일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1803년 제국대표회의 주요결의라는 거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부동산 소유권 이전 사건이었다. 나폴레옹에게 라인강 서쪽 영토를 빼앗긴 독일 영주들은 보상을 요구했고, 제국은 동쪽에 있는 교회와 수도원 땅을 뺏어서 가지라고 허락했다. 이때 수많은 수도원이 강제로 해산되었고, 그들이 소유했던 양조장들은 영주나 국가의 소유로 넘어갔다. 대표적인 예가 바이엔슈테판과 호프브로이다. 수도사들이 운영하던 이 양조장들은 1803년을 기점으로 바이에른 왕가의 소유가 되었고, 현재는 바이에른 주립 국영 양조장이 되었다. 수도사는 쫓겨나고 공무원과 기술자들이 맥주를 빚게 된 것이다.
독일 정부는 프랑스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끈질긴 보상책을 내놓았다. 우선 땅을 뺏은 대가로 매년 보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놀랍게도 독일 정부는 200년이 지난 21세기 지금까지도 매년 수억 유로 이상의 보상금을 가톨릭과 개신교에 세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헌금 걷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겠다며 국세청이 대신 걷어주는 교회세 시스템을 도입했다. 독일은 소득세의 8퍼센트에서 9퍼센트를 국가가 원천징수해서 교회에 전달해 준다. 국가는 땅을 가져갔지만, 교회에게는 마르지 않는 현금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준 셈이다. 덕분에 독일 교회는 부동산을 잃었음에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종교 단체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전략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는 상황이 더 복잡했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 전체를 몰수당한 교황은 스스로를 바티칸의 포로라 칭하며 1870년부터 1929년까지 무려 60년 가까이 이탈리아 정부와 대화조차 거부했다. 이 지루한 싸움을 끝낸 건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자 무솔리니였다. 그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교황의 지지가 절실했고,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파격적인 딜을 제안했다.
무솔리니는 바티칸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과거에 뺏은 땅값으로 막대한 현금과 국채를 일시불로 지급했다. 이 돈은 훗날 바티칸 은행의 종잣돈이 되어 교황청의 재정적 자립을 도왔다. 현대 이탈리아는 더 세련된 방식으로 교회를 지원한다. 오토 페르 밀레라 불리는 이 제도는 국민이 납부하는 소득세의 0.8퍼센트를 종교단체나 사회복지에 기부하게 하는 제도다. 납세자는 세금 신고서의 체크박스에서 가톨릭 교회를 선택할 수 있다. 묘미는 선택하지 않은 기권한 세금의 배분 방식이다. 기권표는 국고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사람들의 비율에 따라 배분된다. 대다수가 가톨릭을 선택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전체 0.8퍼센트 세금의 약 80퍼센트 이상을 가져가는 구조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
스페인의 몰수전략은 와인 산업에 축복
스페인은 19세기 내전으로 인한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가장 과격한 방식으로 교회 재산을 처분했다. 1836년 재무장관 멘디사발이 주도한 데사모르티사시온 정책을 통해 스페인 정부는 수도원의 토지, 특히 알짜배기 포도밭을 강제로 몰수하여 경매로 팔아치웠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목적을 위해 와인을 만들던 수도사들은 쫓겨나고, 그 자리를 돈 냄새를 맡은 신흥 부르주아와 상인들이 채웠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약탈이 스페인 와인 산업에는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수도원의 폐쇄적인 양조 방식 대신, 자본가들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품질을 개량하고, 프랑스 보르도의 선진 기술을 도입했으며, 철도를 깔아 수출길을 열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스페인 리오하 와인의 기반은, 역설적이게도 수도원의 담장이 무너지고 상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다져진 것이다. 스페인 교회 역시 현재는 이탈리아와 유사한 세금 할당제를 통해 재정을 보전받고 있다.
자비가 없었던 영국의 수장령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결과가 나타난 곳은 영국이다. 1536년, 헨리 8세는 로마 교황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창설하면서 수도원 해산령을 내렸다. 헨리 8세는 대륙의 국가들처럼 교회와 협상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수도원들은 헨리 8세와 이혼 문제로 정면충돌하던 로마 가톨릭의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입장에서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적군의 기지였다. 따라서 자비도, 협상도 없었다. 그는 수도원을 철저히 파괴하고 재산을 왕실로 귀속시킨 뒤, 귀족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겨 전쟁 자금을 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귀족이 그에게 충성한 것은 당연한 것. 이를 통해 왕권까지 강화했다.
이때 중요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 수도원은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박과 술을 제공하는 복지 시설 역할을 했다. 하지만 수도원이 사라지자 당장 여행자들이 묵을 곳과 마실 술이 없어졌다. 이 틈새시장을 파고든 것이 바로 민간 업자들이 운영하는 퍼블릭 하우스, 즉 펍(Pub)이다. 헨리 8세의 탐욕이 의도치 않게 맥주를 성직자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기고, 영국의 펍 문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영국 성공회는 자산운용사?
그렇다면 가톨릭을 몰아내고 국교가 된 영국 성공회는 과연 어떻게 생존해 나가고 있을까. 모든 것을 잃고 시작한 영국 성공회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 변해야 했다. 국가의 직접적인 세금 지원도, 독일 같은 전용 세금 제도도 없었기에 그들은 헨리 8세의 약탈에서 살아남은 자산을 굴려야 했다. 오늘날 영국 성공회는 교회 위원회를 통해 주식, 부동산, 삼림 지대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거대한 자산 운용사처럼 움직인다. 런던 도심의 쇼핑몰과 알짜배기 땅의 주인이 바로 교회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잃어버린 십일조 대신 치밀한 투자 수익률로 성직자들의 연금을 지급한다. 영국의 술 문화가 펍이라는 비즈니스로 발전했듯, 영국의 교회 역시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가장 세속적인 방법으로 성스러움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치열한 거래의 역사 - 수도원의 포도밭과 맥주, 그리고 세금
결국 수도원의 와이너리와 양조장이 국가와 민간의 손으로 넘어간 과정은 단순한 강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체제인 종교 권력과 신체제인 국가 및 자본 권력이 충돌하고, 파국을 막기 위해 서로의 목을 조르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악수를 하는 치열한 거래의 역사였다.
프랑스는 월급으로, 벨기에는 헌법으로, 독일은 세금 징수권으로,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세금 배당으로, 그리고 영국은 시장 경제로의 편입으로 각자만의 해답을 찾았다. 우리가 오늘날 마시는 와인 한 잔, 맥주 한 모금 속에는 이처럼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욕망, 그리고 치밀한 경제적 계산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술의 주인이 수도사에서 국가로, 다시 자본가로 바뀌었을 뿐, 그 붉고 황금빛 도는 액체가 가진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관련 출처
와인의 역사 | 휴 존슨 | 21세기북스
맥주의 역사 | 야콥 블루메 | 이마고
세금의 세계사 | 오자키 마사히로 | 21세기북스
교황의 은행가들 | 제럴드 포스너 | 뜨인돌
펍, 영국의 스피릿 | 조희창 | 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