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와인은 반역의 와인이었다

프랑스 왕실이 보르도 와인을 멀리했던 이유

by 명욱


와인의 여왕, 그러나 왕의 식탁엔 없었다

우리는 흔히 보르도를 ‘와인의 여왕’이라 칭한다. 흔히 말하는 보르도 5대 와인들, 샤토 라피트(Château Lafite), 라투르(Latour), 마고(Margaux) 같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명품 와인들이 즐비한 곳이니, 당연히 프랑스의 역대 왕들도 이 와인을 가장 사랑했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가격도 모두 한 병에 100만 원이 넘는 초고가 와인이다. 마치 루이 14세의 화려한 베르사유 연회장이나 나폴레옹의 식탁 위에 붉은 보르도 와인이 넘쳐났을 것이라는 상상은 꽤나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보인다.


보르도 5대 와인.jfif 보르도 5대와인이라고 불리는 와인, 샤토 오브리옹,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뚜르,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마고


하지만 역사의 뚜껑을 열어보면 진실은 정반대다. 프랑스 왕실의 공식 연회주나 왕이 애음했던 술의 리스트에서 보르도는 늘 ‘이방인’이거나 ‘반역자의 술’이었다. 왕들은 샹파뉴(샴페인)를 터뜨리거나, 르와르 계곡의 화이트 와인, 혹은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를 마시며 건강을 챙겼다. 도대체 왜 프랑스 왕들은 자국 최고의 와인 산지이자 가장 큰 부를 창출하는 보르도를 그토록 미워하고 경계했을까? 그 배경에는 백년전쟁부터 대혁명, 그리고 나폴레옹 3세의 부활에 이르는 피와 세금, 그리고 끊임없는 반역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딸보.png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보르도 카스티용 전투. 이곳에서 그는 보르도 지방 영주인 영국인 탤버트는 전사를 한다. 그리고 후에 그를 기리는 와인인 샤토 딸보가 등장했다.


보르도는 300년간 영국 왕실에 충성했던 지역이었다

보르도가 왕실 와인이 될 수 없었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태생적 불신’ 때문이다. 보르도는 지리적으로는 프랑스 땅이었으나, 정서적으로는 파리보다 런던에 가까운 도시였다.


백년전쟁이 끝나기 전인 1154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300년 동안 보르도는 프랑스 왕이 아닌 영국 왕(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토인 아키텐 공국이었다. 당시 보르도 상인들에게 영국 왕은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라 최고의 VIP 고객이었다. 영국 왕실은 보르도 와인(Claret)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주는 파격적인 혜택을 주었고, 런던의 귀족들은 물처럼 보르도 와인을 마셨다. 보르도의 경제적 번영은 전적으로 영국과의 무역에 달려 있었다. 파리의 왕이 보기에 보르도는 "말만 프랑스인이지 속은 영국인인 장사치들"이었다.


보르도를 핍박했던 프랑스 왕실

흥미롭게도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1453년 보르도 카스티용에서 일어났다. 물론 프랑스가 이겼다. 그리고 보르도가 프랑스령으로 귀속되었을 때, 보르도 시민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이 아니라 점령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승리자 샤를 7세는 보르도를 ‘되찾은 고토’로 대우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적국’처럼 다루었기 때문이다.


샤를 7세는 즉각적이고 가혹한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 그는 보르도의 자치 의회인 ‘쥐라드(Jurade)’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쥐라드는 영국 통치하에서 보르도 상인들이 스스로 도시를 다스리던 자유의 상징이었다. 둘째, 그는 보르도 시민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리는 동시에, 프랑스 전역에 적용되던 토지세인 ‘타유세(Taille)’를 징벌적으로 부과했다. 셋째, 가장 굴욕적인 것은 ‘샤토 트롱페트(Château Trompette)’라는 요새의 건설이었다. 이 요새의 목적은 외부가 아니었다. 바로 내부의 보르도 시내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샤를 7세의 통치 기간 동안 보르도 와인 무역은 꽁꽁 얼어붙었고, 시민들은 파리에서 온 관리들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야 했다. 왕실에 대한 보르도의 뿌리 깊은 불신은 이때 싹텄다.


루이 11세의 실용주의

샤를 7세가 채찍을 휘둘렀다면, 뒤를 이은 ‘거미 왕’ 루이 11세는 당근을 내밀었다. 그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아버지처럼 감정적으로 보르도를 짓밟아서는 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보르도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프랑스 경제의 핵심인 와인 무역이 망가지고, 국고가 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루이 11세는 보르도 상인들을 달래기 위해 파격적인 세금 완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영국 시절 보르도가 누렸던 관세 혜택을 대부분 복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472년 보르도 와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안인 ‘보르도 와인의 특권(Privilège du vin de Bordeaux)’을 승인했다.


이 특권의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전까지는 보르도 상류 지역(Haut-Pays, 가이약이나 베르주라크 등)의 와인이 보르도 항구를 통해 수출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즉, 보르도 상인들이 자신의 와인을 가장 좋은 가격에 먼저 다 팔고 난 뒤에야 다른 지역 와인을 취급하게 해 준 ‘독점적 특혜’였다. 루이 11세의 이 유화책 덕분에 보르도는 다시금 경제적 활력을 되찾고 왕실에 순응하는 척했지만, 그들의 충성심은 어디까지나 ‘이익’에 기반한 것이었다.


프랑스 고등법원.jpg 브레타뉴지역에 있는 고등법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당한 행정적 권력을 누리던 곳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보르도의 자치구인 고등법원, 프랑스 왕실에 이빨을 드러내다

이 시기부터 보르도의 권력을 이해하려면 ‘고등법원(Parlement de Bordeaux)’의 존재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루이 11세가 설립을 허가하고 후대 왕들이 키운 보르도 고등법원은, 단순히 재판만 하는 사법부가 아니었다. 왕의 칙령을 등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행정·입법적 권한을 가진 강력한 지방 자치 기구였다.


이곳의 판사들은 대부분 돈으로 관직을 산 ‘법복 귀족(Noblesse de robe)’이라 불리는 신흥 귀족들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대대로 거대한 포도밭(Château)을 소유한 대지주였다는 사실이다. 즉, 보르도 고등법원은 ‘와인 자본가들의 정치 기구’였다. 그들은 법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주머니 속에는 항상 포도원 장부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포도밭과 와인 무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왕의 명령이라도 불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보르도와 파리의 갈등은 단순한 지역 감정이 아니라, ‘거대 와인 자본’과 ‘중앙 집권 권력’의 구조적 대립이었다.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폭발한 것은 ‘태양왕’ 루이 14세 때였다. 어린 왕과 섭정 마자랭이 30년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보르도를 쥐어짜자, 보르도 고등법원은 ‘프롱드의 난(1648~1653)’을 일으키며 왕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이때 보르도에서는 중하류층 시민로 구성된 급진 과격파인 ‘오르메(Ormée)’가 등장해 도시를 장악하고 왕실 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심지어 영국의 크롬웰에게 "우리를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달라"고 편지를 쓸 정도로 파리를 증오했다. 이에 루이 14세는 즉각 해상 봉쇄령을 내렸다. 배가 뜨지 못하자 보르도 항구 창고에 쌓여있던 수만 통의 최고급 와인은 뜨거운 여름을 지나며 출하되지 못해 모조리 시어빠진 식초가 되어버렸다. 와인 상인들은 줄도산했고, 포도밭은 왕실 군대에 의해 불타거나 땔감으로 쓰였다.


고등법원의 몰락하자 절대왕정이 시작되다

난이 진압된 후의 결과는 처참했다. 루이 14세는 보르도 시내의 샤토 트롱페트 요새를 더욱 크게 증축하고 대포의 포구를 시민들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프롱드의 난 실패는 곧 고등법원의 몰락을 의미했다. 루이 14세 이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왕들은 귀족과 고등법원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한 루이 14세는 보르도를 비롯한 전국의 고등법원을 철저히 짓밟았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간언권(Droit de remontrance, 왕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고등법원이 입을 다물고 식물인간이 되자, 비로소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절대왕정의 시대가 열렸다. 보르도의 와인 귀족들은 숨죽인 채 납작 엎드려야 했다. 당연히 루이 14세는 보르도 와인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에게 보르도 와인은 ‘반역도의 술’이었다. 대신 그는 충성스러운 귀족들이 바치는 샹파뉴를 즐기다가, 말년에는 주치의 파공의 권유로 부르고뉴 와인을 마셨다.


좀비처럼 되살아난 고등법원의 권력

루이 14세가 죽고 1715년 루이 15세가 즉위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귀족들을 찍어누르던 태양왕이 사라지자, 억눌려 있던 고등법원의 힘이 다시금 강해지기 시작했다.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은 오를레앙 공작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고등법원의 ‘간언권’을 부활시켜 주었다. 이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었다. 힘을 되찾은 보르도 고등법원은 다시금 왕의 정책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보르도 와인에 짧은 봄날이 찾아오기도 했다. 왕의 총신이자 보르도 지역 총독이었던 리슐리외 공작(Maréchal de Richelieu)이 파리로 돌아와 ‘샤토 라피트(Château Lafite)’를 왕에게 바치며 "젊음의 샘"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은 라피트를 즐겨 마셨지만, 이는 일시적인 유행이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 부활한 고등법원과 왕실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프랑스대혁명, 파리 성벽이 와인을 가로막다

루이 16세 시대에 이르러, 부활한 고등법원과 왕실의 300년 앙숙 관계는 마침내 ‘와인 세금’이라는 뇌관을 건드리며 대폭발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진짜 도화선은 빵이 아니라, 어쩌면 파리 시내를 둘러싼 흉물스러운 성벽이었다.


혁명 5년 전인 1784년, 왕실은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징세청부업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파리 시내를 삥 둘러싸는 ‘징세청부업자의 벽(Mur des Fermiers généraux)’을 쌓기 시작했다. 총길이 24km, 60개의 관문이 있는 이 거대한 장벽의 목적은 방어가 아니었다. 파리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에 ‘통행세(Octroi)’를 걷기 위함이었고, 그 핵심 타깃은 파리 시민들이 물처럼 마시는 ‘와인’이었다.


“파리를 둘러싼 성벽이 파리를 신음하게 만든다(Le mur murant Paris rend Paris murmurant).”


당시 파리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이 벽 때문에 보르도 와인의 가격은 폭등했다. 파리 시민들은 술값이 비싸져서 분노했고, 보르도의 와인 상인들은 최대 소비처인 파리 시장이 막히자 파산 위기에 몰렸다. 보르도의 거상들과 포도밭 주인들은 확신했다. “왕정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비즈니스는 영원히 세금의 노예가 될 것이다.”


혁명을 설계한 와인 자본 - 보르도 지롱드파

1789년 대혁명의 막이 오르자, 보르도는 더 이상 변방의 반항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의 ‘설계자’이자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섰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지롱드파(Girondins)’다.


지롱드파라는 이름 자체가 보르도가 위치한 ‘지롱드(Gironde) 강’에서 유래했다. 이들의 핵심 멤버인 베르뇨(Vergniaud), 귀아데(Guadet), 장소네(Gensonné) 등은 모두 보르도 출신의 변호사이자 지식인이었지만, 그들의 강력한 후원자는 보르도의 거대한 와인 자본과 무역상들이었다.


지롱드파가 원한 혁명은 단순했다. “자유 무역(Laissez-faire)과 사유 재산의 보호.” 그들은 왕실이 독점하던 관세 권한을 철폐하고, 내 포도밭에서 만든 와인을 전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팔 수 있는 ‘상업 공화국’을 꿈꿨다. 그들은 파리의 과격한 빈민(상 큘로트)들이 설치는 것을 싫어했고, 지방의 권리를 옹호하는 연방주의를 주장했다. 혁명 초기,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며 프랑스를 이끈 것은 바로 이 계산 빠르고 우아한 보르도의 엘리트들이었다.

당통과 자코뱅의 등장: "부르주아의 목을 쳐라"

하지만 혁명은 보르도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파리의 민중을 등에 업은 자코뱅파(산악파)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의 거두 조르주 당통(Georges Danton)을 주목해야 한다. 프랑스 혁명을 이끈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통은 명백한 지롱드파의 적(敵)이었다. 그는 파리의 코르들리에 클럽을 이끌던 산악파의 거두였으며, "대담함, 다시 한번 대담함, 언제나 대담함!"을 외치며 민중 봉기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지롱드파가 세련된 정장 차림으로 의회에서 법과 자유 무역을 논할 때, 당통과 급진적 혁명파의 리더였던 로베스피에르는 파리의 뒷골목에서 "와인 팔아 배부른 보르도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며 민중을 선동했다. 자코뱅에게 지롱드파는 왕만 없앴지 자기들끼리 귀족 놀이를 하려는 ‘부르주아 반혁명 분자’일 뿐이었다.


결국 1793년, 당통이 방조하고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쿠데타로 지롱드파는 몰락했다. 보르도가 낳은 천재적인 웅변가 베르뇨를 비롯한 22명의 지롱드파 지도자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보르도의 와인 자본이 꿈꾸었던 ‘자유로운 상업 공화국’의 꿈은 공포 정치의 피비린내 속에 잠겨버렸고, 보르도의 포도밭은 주인 잃은 땅이 되어 황폐해졌다. 혁명은 보르도에게 ‘자유’를 주기보다 ‘피’를 요구했다.


부르봉 왕조가 아닌 나폴레옹 가문이 살린 보르도 와인

왕실에서 외면받고 혁명의 피바람을 맞았던 보르도 와인이 진정한 ‘황제의 와인’으로 등극한 것은 나폴레옹 3세 때였다.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며 전 세계에 프랑스의 국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그는 보르도 상공회의소에 명령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와인 리스트를 가져오라.”


이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설적인 ‘1855년 메독 등급(Grand Cru Classé)’이다. 샤토 라피트, 라투르, 마고, 오브리옹 같은 와인들이 1등급부터 5등급까지 줄 세워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등급의 기준이다. 왕이 마셔보고 "맛있다"고 한 순서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지난 수십 년간의 ‘시장 거래 가격’이 기준이었다. 보르도 와인은 왕실이 외면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영국, 네덜란드, 미국으로 수출되어 명성을 쌓고 있었고, 시장에서 형성된 그 높은 가격이 곧 품질의 증명서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보르도가 왕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시장(영국 등)을 통해 증명해 온 가치를 공식적인 ‘황제의 칙령’으로 인증해 준 셈이다.


소외가 만든 세계의 황제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보르도 와인은 철저하게 파리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다. 샤를 7세는 억압했고, 루이 14세는 대포를 겨눴으며, 혁명 정부는 단두대를 세웠다. 하지만 보르도는 왕실의 사랑을 구걸하는 대신, 넓은 바다 건너 세계 시장을 선택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가 수여한 등급은 왕실이 하사한 선물이 아니라, 보르도가 실력으로 쟁취한 ‘상업의 승리’에 대한 확인증이었다. 왕관을 쓰지 못했기에 오히려 자생력을 길러 세계의 황제가 된 것. 이것이 300년의 붉은 전쟁 끝에 보르도 와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짜 저력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보르도 와인 한 잔에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시장을 개척해 온 상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녹아 있다.




출처

《와인의 역사》, 현암사, 로드 필립스 (Rod Phillips)

《프랑스사》, 김영사, 앙드레 모로아 (André Maurois)

《시민들 1 : 프랑스 혁명 연대기》, 크로노스, 사이먼 샤마 (Simon Schama)

《와인, 역사를 빚다》, 21세기북스, 장 홍

《파리, 역사로 걷는 도시》, 21세기북스, 임승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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