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윤주모의 폭탄주 '혼돈주'의 정체

넷플릭스가 소환한 100년 전의 풍류와 술의 인문학

by 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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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넷플릭스 유튜브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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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OTT를 뜨겁게 달군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가 화제다. 1류 셰프들과 재야의 고수들이 계급장을 떼고 오직 ‘맛’으로 승부하는 이 전장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요리가 아닌 ‘술’이었다.

방송에 출연한 윤주모 님이 선보인 이 술은 시각적으로도 강렬했지만, 그 이름은 더욱 묘했다. 바로 ‘혼돈주(混沌酒)’. 조선의 폭탄주라 불리는 이 술은 이름 그대로 마시는 사람을 혼돈에 빠트려서가 아니라, 술의 정체성 자체가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탁주인가 하면 청주 같고, 발효주인가 하면 증류주 같은 이 오묘한 술. 그런 의미에서 혼돈주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과학, 그리고 폭탄주의 인문학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화면 캡처 2026-01-08 101125.jpg 소주와 막걸리의 레시피가 기록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1분간의 기다림, 레이어(Layer)의 미학

막걸리와 소주를 섞는 혼돈주의 제조법은 1924년 발간된 조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936년도의 증보판에는 확실히 보이나 개인적으로 1924년도 원본에는 아직 확인이 안된 상태. 또 조선후기 양주방에 기록된 혼돈주는 소주는 넣지 않는 발효주의 일종으로 나온다)

핵심은 막걸리와 소주의 만남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회식 자리에서 보는 ‘소맥’처럼 젓가락으로 쳐서 거품을 내며 섞는 방식이 아니다. 옛 문헌은 이렇게 전한다.


"혼돈주는 찹쌀로 빚은 막걸리에 소주를 타서 먹는 것이다. 좋은 소주 한 잔을 좋은 막걸리 반 사발에 따르되, 가만히 한 옆으로 일 분 동안 따르게 되면 소주가 밑으로 들어가지 않고 위로 말갛게 떠오른다. 이때 마시면 다 마시기까지 막걸리와 소주를 함께 마실 수 있게 된다."


핵심은 천천히 따르는 것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1분 동안 천천히 따르는 것’이다. 콸콸 붓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따라 막걸리 층 위에 소주 층을 띄우는 기술이다. 이는 현대 칵테일 기법인 ‘플로팅(Floating)’과 유사하다. 입술에는 독한 소주가 먼저 닿지만, 목 넘김 끝에는 부드러운 막걸리가 감싸주는 구조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질감의 조화를 혀끝에서 천천히 음미하는 풍류의 술인 셈이다.


취하기 위함인가, 보존을 위함인가

그렇다면 선조들은 왜 굳이 막걸리에 독한 소주를 섞었을까? 당시 소주는 지금의 희석식 소주와 달리 알코올 도수 35도가 넘는 독주가 많았다. 여기에 막걸리를 섞으면 20도가 훌쩍 넘는 술이 된다. 문헌에서 "아무리 술이 센 사람도 다섯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경고한 이유다.

윤주모.png 윤주모가 소주를 내리는 모습. 출처 넷플릭스


하지만 여기엔 선조들의 지혜로운 ‘방부 기술’이 숨어 있다. 발효주(막걸리, 청주)는 도수가 낮아 기온이 높은 여름에는 쉽게 상한다. 이때 도수가 높은 증류주(소주)를 섞어주면 알코올 농도가 높아져 저장성이 획기적으로 좋아진다.


이것이 바로 여름(夏)을 무사히 지나는(過) 술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과하주(過夏酒)’의 원리다. 재미있는 사실은 서양에도 이와 똑같은 원리의 술이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의 셰리(Sherry) 와인, 포르투갈의 포트(Port) 와인이 바로 그것이다. 와인(발효주)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브랜디(증류주)를 섞어 만든 ‘주정 강화 와인(Fortified Wine)’은 결국 조선의 혼돈주, 과하주와 이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다만, 바로 저장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문헌 맥락을 본다면 마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윤주모는 어떻게 소주를 만들었나?

방송에서는 출연자가 흙으로 빚은 소줏고리를 이용해 소주를 내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과정은 과학적이면서도 매우 시적인 메타포를 담고 있다.


원리는 끓는점의 차이다. 물은 100도에서 끓지만, 알코올은 약 78.3도에서 끓는다. 술을 끓이면 알코올이 먼저 기체가 되어 올라가고, 이 기체가 차가운 얼음(냉각수)이 담긴 윗부분에 닿으면 다시 액체가 되어 똑똑 떨어진다. 우리는 이 과정을 "소주를 내린다"라고 표현한다. 불을 때서 구워낸 술이라 하여 소주(燒酒)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 과정을 이슬이 맺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소주는 끓인 김(氣)을 받아서 만드는 것이다. (중략) 시루 위에 솥을 얹고 물을 부어 차가운 기운을 만나게 하면, 김이 올라가서 솥 바닥에 닿아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이것이 마치 이슬(露)이 맺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소주를 이슬이라고도 말을 하는 것이다. 또 비가 내리는 원리와도 같다. 땅의 열기로 증발한 수증기가 찬 공기를 만나 비가 되듯, 끓어오른 술의 기운이 소주가 되어 내린다. 비 오는 날 막걸리나 소주가 생각나는 건, 어쩌면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자연의 순환인 비를 닮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산업혁명의 노동주에서 조선의 풍류까지

엄밀히 분류하자면 혼돈주는 ‘폭탄주’의 일종이다. 술과 술을 섞었기 때문이다. 반면 술에 탄산수나 주스 등 음료를 섞으면 ‘칵테일’이라 부른다. 위스키에 탄산수를 넣은 하이볼은 칵테일이고, 소주에 맥주를 섞은 소맥은 폭탄주다.


폭탄주의 기원은 다소 거칠다. 산업혁명 시절, 증기기관차나 공장의 보일러실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극심한 더위와 피로에 시달렸다. 일을 마치고 펍(Pub)으로 달려간 그들은 갈증 해소용 맥주와 빨리 취하기 위해 맥주를 마시고, 그 다음에 위스키를 마셨는데, 이를 증기기관 기술자들이 마시다보니 ‘보일러 메이커(Boilermaker)’라 불렀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때 술잔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잠수함을 잡는 폭뢰(Depth Charge)와 같다 하여 ‘폭탄주’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하지만 조선의 폭탄주, 혼돈주는 결이 다르다. 방송에서 윤주모 님은 프리미엄 막걸리(우곡생주)와 증류식 소주, 그리고 붉은 복분자주를 더해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을 만들어냈다. 이는 전라도 지방의 전통 방식인 ‘삼색주(三色酒)’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예술에 가깝다.


노동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마구잡이로 섞던 서양의 폭탄주와 달리, 맛과 향, 그리고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고려해 층을 쌓아 올린 조선의 혼돈주. 술을 섞는다는 행위는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철학은 ‘취함’이 아닌 ‘조화’에 있었다.


다섯 잔을 넘으면 혼돈이 오는 술

오늘 저녁, 냉장고 속 막걸리와 소주를 꺼내 조용히 나만의 혼돈주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단, 1분 동안 천천히 따르는 정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잊지 말자. 옛 문헌의 경고처럼, 이 아름다운 술도 다섯 잔을 넘기면 진짜 ‘혼돈’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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