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유스티아누스대제, 와인세로 성소피아성당을 설계

잠들지 않는 황제의 술잔, 성 소피아를 빚어내다

by 명욱


술잔 하나에 담긴 역사는 때로 거대한 제국의 운명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고 서유럽이 긴 암흑의 터널로 접어들던 시기, 동쪽의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은 찬란한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 중심에는 ‘잠들지 않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있었고, 그의 손에는 검 대신 와인 잔과 법전이 들려 있었다. 과연 그는 어떻게 포도주라는 붉은 액체를 이용하여 무너져가는 제국의 위상을 재건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 하나인 성 소피아 대성당을 쌓아 올렸을까?


Hagia_Sophia_(228968325).jpeg 성소피아 대성당. 저 4개의 기둥와 같은 탑(미나레트)는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서유럽과 동로마의 다른 와인 문화

서기 395년, 지중해를 호수처럼 거느리던 로마 제국은 거대한 몸집을 감당하지 못하고 동과 서, 두 개로 쪼개졌다. 그로부터 채 100년이 지나지 않은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허무하게 멸망했다. 서로마의 멸망은 단순히 황제가 사라졌다는 정치적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로마가 수백 년간 구축해 온 치안, 도로망, 그리고 거대한 시장 시스템이 붕괴했음을 의미했다.


와인 산업 입장에서 서로마의 멸망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포도나무는 묘목을 심고 와인을 생산하기까지 최소 3년에서 5년의 평화가 담보되어야만 열매를 맺는 작물이다.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이 이어지던 서유럽에서 포도밭은 가장 먼저 불타없어지는 대상이었다. 도적 떼가 창궐하는 도로 위로 무거운 와인 오크통을 나르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문명의 등불이 꺼져가던 서유럽에서 와인이라는 불씨를 지켜낸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과 단절된 폐쇄적인 공간, ‘수도원’이었다.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에서 가톨릭교회는 유일하게 기능하는 사회 조직이었다. 성경에 "포도주는 내 피니라"라고 명시되어 있었기에, 매일 미사를 집전해야 하는 사제들에게 와인은 기호품이 아니라 생존 필수품이었다.


베네딕토회를 비롯한 수도원들은 높은 돌담을 쌓고 외부와 차단된 채 그들만의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췄다. 지식인 계급이었던 수도사들은 낡은 로마의 농업 서적을 필사하며 포도 재배 기술을 보존하고 개량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규율 아래, 척박한 땅을 개간해 신에게 바칠 와인을 빚었다. 즉, 중세 초기 서유럽에서 와인은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술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높은 담장 안에 숨겨진 성스러운 물건, 성물(聖物)로 변해버린 것이다.


유스티아누스 대제.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산비탈레 성당에 모자이크로 그려져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동로마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시선을 동쪽으로 돌리면 사정은 정반대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시스템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황제의 권위는 건재했고, 강력한 행정력과 법치, 그리고 지중해 무역로를 장악한 해군 덕분에 물류는 막힘없이 흘렀다. 이곳에서 기독교는 서유럽처럼 유일한 피난처가 아니라, 제국을 지탱하는 통치 이념이자 화려한 문화의 일부였다.


덕분에 종교는 로마 고유의 향락적 생활양식과 기묘하게 공존할 수 있었다. 알고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이 아닌 로마 제국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동로마라는 이름은 후대 역사학자들이 붙여준 이름인 것 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로마의 와인 문화가 살아있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동로마의 시민들은 수도원의 엄숙한 종소리 대신 시장의 활기찬 소음 속에서 살았다. 콘스탄티노플 거리 곳곳에는 ‘카필리아(Kapileia)’라 불리는 선술집이 성행했다. 이곳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었다. 정치가 토론되고, 상인들이 무역 계약을 맺고, 퇴근한 관료들이 하루의 피로를 푸는 현대적인 ‘와인 바’이자 사교 클럽이었다.


중세 초기 서유럽의 영주들이 무너진 치안 속에서 내 땅을 지키기 위해 이웃과 사적 전쟁(Feud)을 벌여야 했다면, 동로마의 귀족들은 제국의 관료제와 용병 시스템이라는 보호막 아래 있었다. 그들 또한 장군으로서 전장에 나갔지만, 그들의 포도밭은 법과 행정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대규모 포도 농장을 경영하며 ‘와인 재테크’에 열을 올릴 수 있었다. 흑해 연안과 에게해의 섬들에서 생산된 최고급 와인은 제국의 자랑이었으며, 황제조차 자신의 직할지에서 나온 와인을 팔아 국고를 채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동로마 사람들에게 와인은 종교적 도구를 넘어선 거대한 비즈니스 아이템이자,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상의 음료였다.

Justinien_527-565.svg.png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절의 영토. 잃었던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다. 이때 로마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보호를 받는 상황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잠들지 않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야망

이 풍요로운 동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인물이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다. 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잠들지 않는 황제(The Sleepless Empero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밤낮으로 집무실을 지키며 로마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몰두했다.


그의 업적은 실로 방대하다. 옛 로마의 영토였던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수복하여 지중해를 다시 로마의 호수로 만들려 했고,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로마의 법률을 집대성하여 법학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했다. 무엇보다 그는 니카의 반란으로 불타버린 수도를 재건하며,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칠 정도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 소피아 대성당(Hagia Sophia)’을 건축했다. 거대한 돔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이 건축물은 동로마 문명의 정점이자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영광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끊임없는 정복 전쟁, 수십 년간 이어진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 방대한 관료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되었다. 그렇다면 이 워커홀릭 황제는 어떻게 재정을 충당하고 제국을 운영했을까? 그 해답 중 하나가 바로 제국의 특산품, ‘와인’이었다.


와인을 지배하는 자가 제국을 지배한다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와인은 단순한 낭만이나 취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법(Law)’이자 ‘세금(Tax)’, 그리고 ‘외교(Diplomacy)’라는 냉철한 통치 수단이었다. 그는 와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제국의 안팎을 통제하고 경영했다.


첫째, 와인을 ‘법’으로 규정하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최대 업적인 『로마법 대전』에는 흥미롭게도 와인에 대한 소유권과 거래 규칙이 매우 상세히 담겨 있다. 당시 법학자들에게는 "누군가 타인의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다면, 그 와인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소유권 분쟁이 중요한 논제였다.


이에 대해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원재료인 포도는 포도밭 주인의 것이지만, 그것을 가공하여 전혀 새로운 성질의 물질인 와인으로 변화시켰다면, 그 제조 기술과 노력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와인 산업이 단순 농업을 넘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고도의 제조업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황제는 상인들이 와인에 물을 섞어 팔거나 매점매석하는 행위를 법으로 엄격히 규제했다. 이는 단순한 소비자 보호 차원이 아니었다. 제국의 핵심 세수원인 와인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국가의 수입을 안정화하기 위한 고도의 경제 정책이었다.


둘째, 성 소피아를 재건한 ‘액체 금’.

지금의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의 웅장한 돔과 화려한 모자이크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돌 하나하나에는 동로마의 와인세도 스며들어 있다. 당시 동로마의 와인은 현대의 반도체처럼 전 세계로 팔려나가는 최고급 수출품이었다. 특히 달콤하고 도수가 높은 동로마 와인은 보존성이 좋아 원거리 무역에 적합했다.


황제는 와인 무역에 고율의 관세와 소비세를 매겨 국고를 채웠고, 그 돈으로 용병을 고용해 영토를 넓히고 대리석을 사들여 성당을 올렸다. 백성들에게 와인은 ‘마시는 즐거움’이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에게는 제국을 운영하는 연료이자 ‘액체 금’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 축적된 동로마의 막대한 부는 제국을 지키는 힘이기도 했지만, 훗날 서유럽의 가난한 기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동경하고 끝내 약탈하게 되는 원죄가 되기도 한다.


셋째, 야만인을 길들이는 ‘소프트 파워’.

군사력만으로는 사방의 적을 모두 막을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와인을 고도의 외교 무기로 사용했다. 춥고 척박한 땅에 사는 북방의 슬라브족이나 유목민, 혹은 서유럽의 야만족들에게 동로마의 세련되고 달콤한 와인은 거부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황제는 이들에게 최고급 와인을 하사품으로 주며 동맹을 맺거나, 제국의 편으로 회유하는 미끼로 활용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사절단을 위해 화려한 황실 연회를 열고, 보석이 박힌 금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시각과 미각을 압도했다. "우리는 너희와 차원이 다른 문명국이다"라는 메시지를 와인 한 잔으로 전달하며, 칼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문화적으로 굴복시킨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문화 외교와 다를 바 없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황후 테오도라와 이중적인 술잔

공식 역사서인 정사(正史)와 달리,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야사(野史)를 다룬 프로코피우스의 『비사(Secret History)』에는 와인이 조금 다르게 묘사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본인은 비교적 금욕적이고 업무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었으나, 그의 아내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테오도라 황후 주변, 그리고 귀족들의 연회는 와인이 강처럼 흐르는 방탕한 장소로 그려지기도 한다.


Empress_Theodora.jpg 테오도라 황후.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Basilica of San Vitale)에 있는 유명한 벽화로 성배(와인)을 들고 있다.


테오도라는 서커스 단원 출신이라는 천한 신분을 딛고 황후가 된 인물로,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다. 그녀는 화려한 연회를 통해 귀족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은 절제했지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와인 문화를 묵인했다. 오히려 그들이 와인과 향락에 취해 정치적 야심을 갖지 않도록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제국의 부유함이 낳은 그림자였지만, 이 또한 황제의 통제 범위 안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일했다는 것이다. 어린 소녀들의 인신매매를 엄단하는 법을 제정하게 하고 이혼법을 여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함하였으며,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집을 만들어주고 강간을 사형으로 처벌하는 법을 마련했다. 와인을 사랑하고 인권을 사랑한 그런 황후였다란 것에는 틀림이 없다.


술잔을 채우는 자, 제국을 설계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술을 즐기는 애주가가 아니라, 술이라는 욕망을 시스템으로 통제한 설계자였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호기를 부리는 대신, 법과 세금으로 와인이 흐르는 물길을 텄다. 제국을 지탱한 힘은 황제의 화려한 건배사가 아니라, 그가 구축한 냉철한 규칙이었다. 진정한 리더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의 룰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완성한 번영은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황금빛 콘스탄티노플의 넘쳐나는 와인 향기가 지중해를 건너자, 가난한 서유럽의 늑대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신의 이름 뒤에 탐욕을 숨긴 자들, 십자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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