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예배와 와인이 구축한 사회적 질서
감정이 거세된 예술, 영원을 향한 갈망
중세(Middle Ages)를 정의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기독교'이다. 유럽의 모든 삶과 죽음, 예술과 정치는 십자가 아래 놓여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수준에서 이 시대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생경함은 바로 박물관의 ‘미술품’들이다. 그곳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딱딱하고 무표정하다. 이를 두고 화가의 실력이 부족했다고 치부하는 것은 중세 신학에 대한 오해이다.
당시 미술의 목적은 인간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인물의 정면성, 위계적 비례, 그리고 평면적인 묘사는 화가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원성’을 표현하기 위한 정교한 양식적 선택이었다. 인간의 감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유약한 것이기에, 감정을 그림에 담는 순간 그 인물이 가진 신성함이 훼손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 표현이 성령 모독'이라며 교리가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2세기 고딕 양식으로 접어들며 마리아의 자애로움이나 예수의 고통은 점차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전의 긴 시간 동안, 미술은 문맹인 민중들에게 성경의 메시지를 오차 없이 전달해야 하는 '보이는 성경'이었기에, 화려한 감정보다는 엄숙한 상징을 우선시해야 했다. 이 무표정한 얼굴들은 역설적으로 중세인들이 갈구했던 '변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의 산물이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진행된 예배
지금의 예배가 소통과 나눔 중심이라면, 중세의 미사(Missa)는 철저히 '관람'보다는 '신비의 체험'에 가까웠다.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언어의 벽이다. 서방 교회의 미사는 오직 라틴어로 집전되었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유럽 각국의 자국어가 발달했음에도 교회는 보편성을 유지하기 위해 라틴어만을 고집했다. 평신도 다수는 라틴어를 완벽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반복되는 전례 구조와 상징적인 동작을 통해 의식의 의미를 학습했다. 이는 현대적인 관점의 '불통'이라기보다, 언어를 초월한 신비에 참여한다는 종교적 장치로 이해되었다.
바리케이트를 통한 격리된 예배
음악과 공간 역시 이 신비를 고조시켰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성직자와 수도자 중심의 전례 음악으로, 회중이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닌 '천상의 소리'를 듣는 체험을 제공했다. 또한, 공간 배치 역시 철저히 격리되어 있었다. 제단과 회중석 사이를 가르는 '루드 스크린(Rood Screen)'이라 불리는 거대한 장벽, 즉 바리케이트는 보이지 않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물리적으로 구분했다. 신자들은 이 장벽 너머로 사제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장벽 너머의 세계를 더욱 갈망하게 만들었다.
미사 불참에 대한 사회적 규율
중세 사회에서 미사 참석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절대적인 의무였다. 교회법상 주일 미사 불참은 엄연한 죄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실질적인 제재로 이어졌다.
당시 사람들을 가장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것은 '파문'이었다. 공동체에서 제명되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처벌을 넘어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농노와 같은 하층민들에게 교회는 유일한 사교장이자 정보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불참한다는 것은 마을 공동체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로 간주되어 고해성사에서 엄격한 보속(Penance)을 명받아야 했다.
귀족들에게 미사 참석은 자신의 통치권이 신으로부터 왔음을 증명하는 정치적 무대였다. 이들에게 가해진 제재는 주로 '정치적 명분'의 하락이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귀족들은 성당 건립에 기부하거나 막대한 자금을 헌납하며 자신의 경건함을 증명하려 애썼다. 결국 미사는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구성원을 하나의 거대한 질서 속에 묶어두는 사회적 통제 기제였던 셈이다.
일반 신도는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중세 미사의 하이라이트는 '성찬 전례'였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화체설'이 교리로 명확해지면서, 빵과 와인은 예수의 실제 살과 피라는 신비로운 지위를 공고히 했다. 사제가 기도를 올리고 와인을 마실 때 종을 크게 울리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라틴어를 잘 모르는 신자들에게 "지금이 기적이 일어나는 찰나"라는 하이라이트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차별이 발생한다. 중세 후기 서방 교회에서는 평신도에게 빵만 주는 '단형 영성체'가 일반화되었다. 포도주(성혈)를 흘릴 위험이 있다는 관리상의 이유를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성직자만이 신의 피를 직접 영하는 '구별된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 시기 와인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전례를 완성하는 절대적인 필수재이자, 성직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성한 자산이 되었다.
와인이 빚어낸 물류와 수도원
와인을 생산하고 확보하는 능력은 중세 유럽의 경제 지도에 흥미로운 흔적을 남겼다. 성찬용 와인은 반드시 발효된 포도주여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포도 재배에 적합한 기후를 가진 남유럽 국가들은 자연스레 전례 자원 공급처로서의 이점을 가졌다.
특히 영국(잉글랜드)은 기후 특성상 와인 수급이 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영국은 12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대량으로 수입했다. 이것이 영국이 역사적으로 와인 무역의 중심지가 된 배경 중 하나이다. 또한 대규모 수도원들은 각지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을 발전시키며 와인 유통의 핵심 거점 역할을 했다.
아일랜드 같은 오지에서도 와인으로 미사를 드려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와인 대신 맥주로 미사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공식적으로는 반드시 와인을 고집했다. 그만큼 와인 수급이 당시 지식인(수도자)들에게 얼마나 절박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와인은 종교적 필수성으로 인해 유럽 전체의 물류망을 잇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종교개혁, 지금의 예배형태를 만들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 견고한 질서에 거대한 균열을 냈다. 교황 레오 10세 치하에서 면죄부 판매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독일 제후들이 루터를 지지한 배경에는 신학적 동조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독립의 의지가 섞여 있었다.
제후들은 루터의 사상을 통해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과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루터와 개혁가들은 전례를 대폭 수정했다. 성직자만 마시던 와인을 신자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양형 영성체'를 실시했다. 이는 성직자의 특권을 해체하는 선언이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소통'이었다.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 등 그 지역의 언어로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신비의 장막이었던 바리케이트(루드 스크린)는 제거되었고, 사제는 신자들에게 등을 돌리는 대신 정면을 바라보며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찬양 또한 이제는 회중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루터의 개혁은 와인을 '독점된 신비'에서 '공유된 은혜'로 바꾸어 놓았고, 이는 유럽의 권력 지도를 바꾸는 거대한 동력이 되었다.
미사의 어원은 '예배가 끝났다는 의미'
'미사(Missa)'라는 명칭은 예배가 끝날 때 사제가 외치던 라틴어 "Ite, missa est"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이다. "가십시오, 회중(성도)이 이제 세상으로 파견되었습니다"라는 이 선포는, 예배당 안의 신비가 삶의 현장으로 이어져야 함을 의미했다.
비록 "신자들이 그 단어만 알아들어서 미사가 되었다"는 설은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풍자적 해석에 가깝지만, 그만큼 당시 전례가 대중에게는 거대한 신비의 벽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중세의 와인은 신의 피라는 종교적 숭고함이자, 유럽의 해상 물류를 잇는 경제적 동력이었으며, 계급의 위계를 나누는 장치였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언어를 선택하고 소통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거대한 '신비의 장벽'을 허물고 신앙을 일상의 삶으로 가져오려 했던 수많은 역사적 전환점들의 결과물이다.
와인은 중세라는 질서를 움직인 가장 뜨겁고도 붉은 연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