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 그 이후의 복수와 반격
1부 '눈밭에서 굴욕을 당한 황제, 그리고 이어진 복수의 서막'에 이어 2부로 이어지는 카노사의 굴욕, 그 배경과 이후의 역사입니다.
눈은 녹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077년 1월, 카노사의 굳게 닫혔던 성문이 열리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철회했다. 겉보기에는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황제는 왕좌를 지켰고, 교황은 권위를 세웠다. 사람들은 이제 붉은 와인을 나누며 신의 은총을 찬양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카노사의 굴욕은 전쟁의 끝이 아니라, 더 잔혹하고 파괴적인 2차전의 서막에 불과했다.
눈밭에서 일어선 황제는 겉으로는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다. 반면, 교황은 이 승리를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거대한 시스템을 이미 가동하고 있었다. 권력이라는 독한 술을 마신 두 남자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교황이 카노사로 간 이유는 뭘까?
그렇다면 교황은 왜 로마에 있지 않고 카노사로 가 있었을까? 이미 끝난 이야기지만 그래도 중요한 배경이 있기에 정리를 해 놓는다.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받자마자 위기가 생겼다. 파문당한 황제를 몰아내기 위해 뭉친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살벌한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다.
"1077년 2월 2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제국 의회를 열겠다. 그날 교황 성하를 모시고 당신의 거취(폐위)를 결정할 것이다. 만약 그날까지 파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끝이다."
이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독일 땅이다. 만약 교황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독일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독일 제후들과 손을 잡는다면? 황제에게는 단 1%의 승산도 없었다. 교황이 재판관석에 앉아 "너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다"라고 망치만 두드리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황제에게 남은 시간은 단 두 달. 편지 따위로는 어림도 없었다.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 했다. 그것도 교황이 알프스를 넘어 독일 제후들과 만나기 전에 말이다.
"교황이 알프스를 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먼저 넘어가서 이탈리아에서 교황을 가로막아야 한다."
그해 겨울은 라인강이 얼어붙을 정도의 유례없는 혹한이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아내와 갓난아이, 그리고 극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눈보라 치는 알프스 산맥의 몽스니 고개를 넘었다. 길은 얼어붙어 미끄러웠고, 말이나 마차를 탈 수도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황제 일행은 소가죽을 썰매처럼 깔고 그 위에 앉아 비명을 지르며 얼음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와야 했다.
이것은 회개를 위한 순례가 아니었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건 처절한 '타임 어택(Time Attack)'이었다.
그렇다면 교황은 왜 로마도, 독일도 아닌 '카노사'에 있었을까? 그는 위풍당당하게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곳에서 황제를 심판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생각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 도중, 청천벽력 같은 급보가 날아들었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고 있습니다!"
사실 황제는 군대가 아닌 가족과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오는 중이었지만, 교황은 이를 '자신을 죽이러 오는 암살부대'로 오해했다. 덜컥 겁이 난 교황은 북진을 멈추고 급하게 몸을 피할 곳을 찾았다.
그때 교황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마틸다 백작부인이 나섰다.
"제 영지에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카노사 성이었다. 교황은 황제를 피해 서둘러 카노사 성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황제는 살기 위해 달려왔고, 교황은 살기 위해 숨었다. 역사적인 만남은 이 거대한 오해와 공포 속에서 성사된 것이다.
하인리히 4세의 치밀한 전략
1077년 1월 25일. 죽을 고비를 넘겨 카노사 성에 도착한 황제는 성문 앞에서 3일 밤낮을 맨발로 서서 빌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황제의 비굴한 패배로 배웠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황제의 고도로 계산된 쇼맨십이었다고 평가한다.
황제는 교황을 외통수에 몰아넣었다.
교황의 원래 계획은 독일로 가서 황제를 폐위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칼을 들고 올 줄 알았던 황제가 맨발의 죄인이 되어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비는데, 이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교황은 '자비 없는 냉혈한'이 되어 도덕적 치명상을 입게 된다.
결국 3일째 되던 날, 굳게 닫혔던 카노사의 성문이 열렸다. 교황은 황제를 받아들였고, 파문을 철회했다. 하인리시 4세 입장에서는 수습이 된 것이고 복수의 칼날을 갈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었다.
싸움의 기술, "가족을 없애라"
도대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무슨 배짱으로 그 강력한 황제와 맞짱을 뜰 수 있었을까? 단순히 신앙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교황에게는 황제와 싸우기 전부터 준비해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사제 결혼 금지'라는 시스템이었다.
1074년, 교황은 기독교 역사를 뒤바꿀 칙령을 선포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모든 사제의 결혼을 금지한다."
당시 교황청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황제의 간섭보다 내부의 '자금 유출'이었다. 당시만 해도 수많은 주교들이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두고 있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된 주교들이 교회의 알짜배기 포도밭을 아들에게 물려주거나(상속), 뇌물을 써서 아들을 후임 주교로 앉히는(족벌주의)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이다.
교황의 계산은 냉철했다. 명분은 '순결'이었지만, 진짜 목적은 '상속의 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가족이 없으면 상속할 자식이 없고, 자식이 없으면 교회의 포도밭은 사유화되지 않고 온전히 교황청의 통제하에 남는다. 교황은 사제들을 가족보다 조직에 충성하는 '신의 특공대'로 재편성한 것이다.
이 강력한 '독신 부대'가 있었기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무릎 꿇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으로 억누른 욕망은 언젠가 터지는 법. 황제는 이 시스템의 빈틈을 노리고 복수의 칼을 뽑아 들었다.
물론 황제 하인리히 4세도 처음에는 이 '결혼 금지'를 내심 반겼을지 모른다. 황제 입장에서도 주교가 자식에게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살다가 죽어서 그 땅을 다시 황제에게 반납하는 것이 통치에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황의 수는 황제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교황은 '독신'이라는 명분을 이용해 주교들의 소속을 '황제의 신하'에서 '교황의 군대'로 바꿔버렸다. '결혼하지 않은 자는 오직 신(교황)에게만 충성해야 한다'는 논리. 황제는 그제야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그 '독신 파트너'들이 하루아침에 자신의 목을 겨누는 '교황의 특공대'가 되어버렸음을."
결과적으로 가톨릭 사제의 결혼 금지는 이때 제도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먹히지 않은 제 2차 파문
카노사에서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독일 내부의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며 빠르게 권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치명적인 정치적 도박을 감행했다. 카노사의 굴욕 직후, 독일의 반란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를 인정하지 않고 슈바벤의 루돌프(Rudolf)를 새로운 왕(대립 왕)으로 선출했다. 독일 하늘 아래 두 명의 태양, 즉 왕이 둘인 내전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반역자 루돌프를 파문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교황은 3년 동안이나 침묵했다. 두 왕이 서로 싸우며 힘을 빼는 것이 교황청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누가 이길 것인가? 나는 이기는 편에 서겠다."
1080년, 승기가 점차 하인리히 4세 쪽으로 기울자 다급해진 교황은 무리수를 두었다. 황제가 아닌 반란군 루돌프를 '진짜 왕'으로 인정하고, 하인리히 4세에게 두 번째 파문을 날린 것이다. 명분은 신앙이었지만, 실체는 노골적인 '정치적 줄 서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교황의 패착이었다. 독일인들은 분노했다.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교황의 정치질이다!" 설상가상으로 파문 직후 벌어진 전투에서 교황이 선택한 루돌프가 오른팔이 잘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른손은 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손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신의 심판은 교황이 아니라 황제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수군거렸다.
명분도 잃고, 자신이 미는 대선 후보(?)도 잃은 교황. 이제 황제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파문장을 받아 든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그레고리오는 가짜다!"
황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대립 교황(Anti-pope)을 세우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이번에는 맨발의 순례자가 아니라 무장한 정복자였다.
3년의 공성전 끝에 1084년, 로마의 성벽이 무너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으로 피신해 벌벌 떨며 구조 요청을 보냈다. 그를 구하러 온 것은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투수가 아니라 약탈자였다. 노르만족은 황제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그 대가로 로마 시내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시민들을 학살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로마 시민들은 분노했다. 그 화살은 황제가 아닌 교황에게 향했다. "너 때문에 우리 도시가 잿더미가 되었다!" 시민들의 돌팔매질을 견디다 못한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로마에서 쫓겨나 쓸쓸한 유배지 살레르노(Salerno)로 도망쳐야 했다.
1085년, 한때 황제를 눈밭에 꿇어앉혔던 교황은 초라한 침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뼈아픈 회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러므로 나는 망명지에서 죽노라."
권력의 술잔을 들이킨 자의 말로
그렇다면 복수에 성공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행복했을까? 권력이라는 술은 너무 독해서 천륜마저 끊어놓았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연달아 배신을 당했다. 특히 차남인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가 교황과 계속 싸워서 나라가 어지럽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아들은 아버지를 감금하고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왕관, 보물, 그리고 그토록 지키려 했던 라인강의 포도밭까지 모두 빼앗겼다.
그는 감옥을 탈출해 비참하게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1106년 객사했다. 더 비참한 것은 사후였다. 파문당한 자라는 이유로 그의 시신은 축성받지 못한 땅에 5년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교황도, 황제도, 승자는 없었다. 남은 것은 주인 잃은 권력뿐이었다.
반지는 교황에게, 포도밭은 황제에게
피 튀기던 서임권 투쟁은 하인리히 4세가 죽고 16년이 지난 1122년,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가 맺은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으로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
사람들은 이를 '평화'라 불렀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철저한 '이익 분할 계약'이었다. 두 거대 권력은 더 이상 피를 흘리는 대신, 권력의 상징을 쪼개 갖기로 합의했다.
"영혼은 교황이, 땅은 황제가 갖는다."
교황은 주교에게 '반지(Ring)'와 '지팡이(Staff)'를 수여할 권리를 가져갔다. 반지는 '교회와의 결혼'을, 지팡이는 '영혼을 이끄는 목자'를 상징했다. 즉, 주교를 종교적으로 임명하는 권한은 온전히 교황의 차지가 되었다. 교황은 명분과 영적 권위를 지켜냈다.
하지만 황제는 결코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홀(Scepter)'을 수여할 권리를 챙겼다. 홀은 세속적인 통치권을 상징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교가 관리하는 거대한 영지, 즉 라인강의 비옥한 포도밭과 그곳에서 나오는 세금, 그리고 군사 징집권은 여전히 황제의 손아귀에 남았다는 뜻이다.
황제는 주교라는 '성직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주교라는 '영주'가 가진 '지갑'은 계속 틀어쥐게 된 셈이다. 아버지가 눈밭에서 그토록 지키려 했던 제국의 경제적 엔진(포도밭)은 아들의 냉철한 협상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
카노사의 눈밭은 녹았고, 그 위에 섰던 치열했던 사람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역사의 현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인리히 4세의 고향이자 투쟁의 중심지였던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z). 그곳은 오늘날에도 독일 전체 와인의 60% 이상을 생산하는 최대의 와인 산지로 남아 있다.
PS: 다음 브런치에서는 수도사의 헤어스타일과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의 기원에 대해 정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