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에서 굴욕을 당한 황제, 이어진 복수의 서막

주님의 보혈, 탐욕의 포도밭, 그리고 카노사의 겨울

by 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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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성문 앞, 붉은 와인의 향기


1077년 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아펜니노 산맥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한 카노사 성(Castello di Canossa). 기록적인 혹한이 몰아친 그날, 성 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살을 에는 듯한 설원 위에, 유럽에서 가장 존귀해야 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Henry IV)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제국의 지배자라기보다는 초라한 죄인에 가까웠다. 그는 황제의 표식인 자색 망토와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거친 참회복(Hairshirt)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사료는 그가 가죽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Nudis pedibus)로 3일 낮밤을 눈 속에 서 있었다고 전한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성 안의 주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Gregory VII)는 창밖을 내다보며 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승리에 도취해 있던 것이 아니라, 냉철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저 밖에서 떨고 있는 황제의 눈물이 진심어린 회개인지, 아니면 권력을 되찾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연기인지를.


이 장면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카노사의 굴욕'이다. 하지만 우리는 황제의 얼어붙은 발에만 주목할 뿐, 이 사태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19세기에 그려진 에두아르트 슈보이저의 하인리히 4세- 카노사의 굴욕


황제는 왜 그토록 처절하게 자존심을 버려야 했을까? 그것은 단순한 신앙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맨발로 지키고 싶었던 것은 성 안의 교황이 쥐고 있던 '와인잔', 즉 성혈(聖血)을 다루는 권한과 그 뒤에 연결된 막대한 '포도밭(영지)'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of Canossa)'이라 기록한다. 교과서에서는 이를 '교황권이 황제권을 누른 정점'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극적인 장면 이면에 숨겨진 진짜 주인공을 놓치고 있다.


황제는 왜 그토록 자존심을 버리고 눈밭을 굴러야 했을까? 교황은 왜 그토록 잔인하게 황제를 몰아붙였을까?


황금 들판과 붉은 언덕

중세 유럽에서 '권력'이란 무엇인가? 군사력? 아니다. 그것은 바로 '토지'였다. 그렇다면 그 토지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중요한 '강남 땅'은 어디였을까? 바로 수도원과 교회가 소유한 영지였다.


당시 교회는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유럽 최대의 '복합 농업 기업'이었다.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갔다.


하나는 생존을 위한 '곡창지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과 보리밭에서 수확한 곡식은 수도사들의 배를 채우는 빵이 되었고, 물이 나쁜 유럽에서 식수 대신 마시는 '맥주(Liquid Bread)'가 되었다. 이것은 조직을 유지하는 기초 체력이었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은 역시 '포도밭'이었다. 기독교 사회에서 와인은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즉 보혈(寶血)이었다. 미사의 핵심인 성체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와인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게다가 귀족들의 연회에서 소비되는 최고급 와인은 막대한 현금을 벌어들이는 '고부가가치 상품(Cash Cow)'이었다.


수도원은 당대 최고의 와인 양조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었고, 주교는 그 지역 최대의 와이너리 오너였다. 와인을 독점한다는 것은 곧 신의 은총과 막대한 부를 동시에 독점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하인리히 4세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그의 고향, 슈파이어와 보름스는 오늘날 '라인란트-팔츠'라 불린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독일 전체 와인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독일 최대의 와인 산지라는 점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주교 임명권(서임권)을 그토록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인리히 4세가 가지고 있던 팔츠 지역의 포도밭 모습. 이곳에서 대표 독일 와인 들이 나오고 있다. 출처 /www.winetourism.com/
주교는 나의 신하이자 장군이다

여기에 황제에게 주교는 단순한 종교적 파트너가 아니었다.


"주교는 황제의 지갑이자, 가장 강력한 장군(General)이었다."


당시 독일 땅의 3분의 1 이상이 교회 영지라고 부를 만큼 교회의 영지는 엄청났다. 황제는 세습 욕심을 부리는 일반 귀족(공작, 백작)보다, 법적으로 자식이 없어 땅을 물려줄 수 없는 주교에게 영지를 주는 것을 선호했다. 주교가 죽으면 그 땅(포도밭)과 권력은 고스란히 다시 황제의 임명권 아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군사력'이었다. 우리는 흔히 성직자를 기도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중세의 주교는 달랐다. 황제가 전쟁을 선포하면 전체 병력의 70% 이상을 교회 영지에서 징집해 바쳐야 할 정도로 중요했다. 이를 '세르비티움 레기스(Servitium Regis, 왕에 대한 봉사)'라 불렀다.


전투 주교(Warrior Bishop)를 설명하는 삽화. 다만 실제로는 전투 주교 복장은 아니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thinkingwest.com


더 놀라운 것은 주교들이 직접 전쟁터에 나갔다는 점이다. 그들은 제의 위에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 군대를 지휘했다. 교회법에 "성직자는 칼을 들어 피를 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있었지만, 그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날카로운 칼 대신 묵직한 철퇴(Mace)나 쇠몽둥이를 들고 적의 머리통을 부수며 "나는 피를 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전투 주교(Warrior Bishop)'들. 당시 그들은 황제의 최정예 친위대였다.


게다가 하인리히 4세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그의 고향, 슈파이어와 보름스는 오늘날 '라인란트-팔츠'라 불린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독일 전체 와인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독일 최대의 와인 산지라는 점이다.


황제의 본거지가 곧 와인의 심장부였다는 사실. 이것은 그가 눈밭에서 지키려 했던 것이 단순한 자존심이 아니라, 제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거대한 포도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황의 선전포고와 파문

이 거대한 이권 카르텔을 깨부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다. 개혁가였던 그는 교회가 황제의 '군사 기지'나 '자금줄'로 전락한 것을 참을 수 없었다.


1075년, 교황은 <교황 칙서>를 통해 폭탄선언을 한다. "황제는 주교를 임명할 권한이 없다. 서임권은 오직 교황에게 있다."


젊은 혈기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즉각 반발했다. 그는 교황을 '가짜'라 비난하며 폐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교황은 기다렸다는 듯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핵폭탄 버튼을 눌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Excommunication)한다."


현대인들에게 파문은 그저 "교회 나오지 마" 정도일지 모른다. 하지만 중세 봉건사회에서 파문은 '사회적 사형 선고'이자 '봉건 계약의 파기'였다. 기독교 사회에서 신하들의 충성 맹세는 '기독교인 군주'를 전제로 한다. 군주가 파문당해 이교도보다 못한 존재가 되면, 신하들의 충성 의무는 자동으로 사라진다. 즉, "황제에게 반역을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된 것이다.


황제의 땅을 호시탐탐 노리던 독일의 제후들은 쾌재를 불렀다. "파문당한 황제를 모실 수 없다!"며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 곁을 지키던 전투 주교들조차 교황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발을 뺐다. 군대도, 명분도 잃은 황제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당시 황제는 제후들의 선거로 뽑히는 회장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굴복, 혹은 치밀한 쇼맨십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살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했다. 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교황이 머물던 카노사 성으로 향했다.


1077년 1월, 눈보라 치는 성문 앞에서 황제는 3일 밤낮을 맨발로 서서 빌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황제의 비굴한 패배로 배웠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은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황제의 고도로 계산된 쇼맨십이라고 본다.


황제는 알고 있었다. 교황은 '용서의 종교'인 가톨릭의 수장이다. 죄인이 맨발로 찾아와 진심으로(척이라도) 회개하는데, 이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교황은 '자비 없는 냉혈한'이 되어 도덕적 치명상을 입게 된다. 황제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담보로 교황을 외통수에 몰아넣은 것이다.


"문을 열어주시오! 나는 회개하였소!"

성 밖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외침은 교황에게는 압박이었다. 결국 3일째 되던 날, 굳게 닫혔던 카노사의 성문이 열렸다.


다시 시작되는 복수의 칼날

교황은 황제를 받아들였고, 파문을 철회했다. 따뜻한 성 안으로 들어온 황제에게 교황은 성혈(와인)을 권했을지도 모른다. 겉보기에 그것은 화해의 건배였고, 교황의 완벽한 승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와인잔을 비우고 돌아선 하인리히 4세의 눈빛은 회개가 아니라, 시퍼런 '복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포도밭과 장군들을 되찾기 위해 잠시 무릎을 꿇었을 뿐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몰랐을 것이다. 오늘 자신이 열어준 그 문이, 훗날 자신을 파멸로 이끌 지옥문이 될 줄은.


카노사의 눈밭은 녹았지만,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PS: 그 처절한 복수극과, 교황청이 만들어낸 '사제 결혼 금지'와교황을 선출하는 '콩클라베'의 이야기가

제2부 <독신(獨身)의 제국과 황제의 복수>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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