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의 멸망 이후, 가톨릭의 흥망성쇠
이 글은 로마와 가톨릭의 관계를 정리한 3부작 브런치글입니다. 1부와 2부, 글을 보시고, 이 글을 참고해 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2부 서로마 최후의 황제, 최고의 와인 산지로 유배가다
지식은 곧 권력이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때 제국이 국교로 공인했던 기독교 역시 거친 게르만족의 말발굽 아래 사라져야 마땅했다. 오도아케르와 그 뒤를 이은 '야만족' 왕들에게는 힘없는 가톨릭 교회를 지켜줄 의무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정반대로 흘렀다. 와인도, 군대도, 황제도 사라진 그 황무지에서 칼을 든 정복자들이 십자가를 든 사제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언어'와 '지식', 그리고 와인이었다.
중세 초기, 사제와 수도사들은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야만의 시대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성 집단이었다. 게르만족 정복자들은 육체적인 힘은 셌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행정 능력과 고등 언어가 부재했다. 반면 사제들은 로마의 공용어인 '라틴어'는 물론, 고전 문명의 뿌리인 '헬라어'와 '히브리어'까지 다루는 슈퍼 엘리트였다. 성경을 번역하고 로마의 법률과 천문학을 보존한 그들에게, 글을 모르는 왕들은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지식이 곧 권력이 된 것이다. 여기에 보혈이라는 예수의 피라는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존재,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그들을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고대시대부터 내려온 와인 제조방법까지 그들이 쥐고 있었으니,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로마를 지킨 교황의 리더
물론 교회가 단순히 지식과 와인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황제가 도망친 빈자리를 채운 것은 초기 교황들의 목숨을 건 리더십이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교황 레오 1세(Leo I)가 연출했다. 452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이탈리아로 진격해 왔을 때였다. 군대도 황제도 없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레오 1세는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 아틸라와 담판을 지어 로마 침공을 막아냈다. 이어 455년 반달족의 약탈 때도 그가 나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로마 시민들에게 교황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황제보다 더 우리를 잘 지켜주는 진짜 리더"로 각인된 것이다.
이 토대 위에 그레고리오 1세(Gregory I)는 기독교 왕국을 완성했다. 그는 무너진 로마의 행정 조직을 교회 조직으로 재편했고, 앵글로색슨족 등 이교도들에게 선교사를 보내 그들을 정신적으로 복속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중세 교황권'의 기틀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위조된 문서와 샤를마뉴의 대관식
하지만 존경받던 교황청은 점차 세속적 욕망, 즉 '권력'이라는 독한 와인에 취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단순히 영적인 지도자에 머무르지 않고, 왕들 위에 군림하는 '황제 제조기'가 되고 싶어 했다. 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기극 중 하나가 벌어진다.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 사건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면서 남겨놨다는 문서다. 내용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에게 서유럽 전체의 통치권을 넘겼다"
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교황권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 문서는 위조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몰랐다. 그리고 이 무기가 처음으로 빛을 발한 사건이 800년 크리스마스에 일어났다.
당시 교황 레오 3세는 반대파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동로마 제국이 형식적으로나마 지켜줬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그들의 지역인 동로마 제국 조차 지키는 것이 버거워보였다.
결국 그는 자신을 지켜줄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고,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카를 대제)'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를 올리던 샤를마뉴에게 교황은 기습적으로 다가가 황제의 관을 씌워버렸다. 이것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었다.
"교황이 황제의 관을 수여한다"는 이 퍼포먼스는 "지상의 권력(황제)은 신의 대리인(교황)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한 정치적 쇼였다. 결국 거짓 위조문서에서 서로마 황제가 다시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로마 교황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세속의 권력 왕과 황제에게 관을 쓰워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교황의 시체를 꺼내 재판하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했던가. 황제조차 발아래 둔 교황청은 급격히 타락했다. 성직 매매와 향락은 기본이었고, 권력 투쟁은 엽기적인 수준으로 치달았다. 그 정점이 바로 897년 교황 스테판 6세가 벌인 '시신 재판(Cadaver Synod)'이다.
스테판 6세는 전임 교황 포모수스(Formosus)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이미 죽어 땅에 묻힌 그의 시신을 7개월 만에 무덤에서 파헤쳤다. 썩어가는 시신에 교황의 예복을 입혀 법정에 세우고, 스테판 6세는 시신을 향해 고함을 치며 심문했다.
"네가 어찌 감히 야심을 품고 로마 교황의 자리에 올랐느냐!"
대답 없는 시신에게 유죄가 선고되었고, 형벌은 잔혹했다. 생전에 축복을 내리던 세 개의 손가락을 잘라버렸고, 시신은 로마 거리에 질질 끌려다니다 강에 던져졌다.
하지만 광기의 대가는 처참했다. 이 엽기적인 행각을 지켜보던 로마 시민들은 "신의 대리인이 미쳤다"며 분노하여 봉기했다. 결국 스테판 6세는 재판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위되었고, 감옥에 갇혀 목이 졸린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죽은 자를 심판하던 자가 결국 자신도 끔찍한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포모수스의 급사 원인이 '독이 든 와인'이었다는 소문은 당시 교황청 내부가 얼마나 혼탁했는지 보여준다. 시민들의 목을 축여주던 성스러운 포도주는 사라지고, 권력자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한 독주를 마시고 있었던 셈이다.
십자군 전쟁
내부에서 곪아 터진 광기는 11세기에 이르러 밖으로 터져 나왔다.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는 "신이 원하신다(Deus Vult)"며 성지 탈환을 외쳤다. 초기에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시작되었으나, 전쟁은 장장 200년 가까이 이어지며 추악하게 변질되었다.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은 사라지고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중에서도 1204년의 제4차 십자군은 타락의 결정체였다. 그들은 이교도인 이슬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 국가인 콘스탄티노플(동로마)을 침략했다. 십자가를 든 기사들이 형제의 도시를 불태우고, 성당의 보물을 약탈하고, 수녀들을 겁탈하는 촌극을 빚은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진 채 실패로 끝났다. 이 전쟁은 교황권의 정점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권위가 어떻게 타락하고 무너져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아나니의 치욕과 아비뇽 유수
십자군 실패 이후, 교황의 권위는 끝없이 추락했다. 그 결정타를 날린 것은 1303년 '아나니 사건'이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며 끝까지 권위를 내세웠지만,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군대를 보냈다. 아나니 별장에 있던 교황을 급습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측 기사(혹은 용병대장)가 장갑 낀 손으로 교황의 뺨을 후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의 대리인이 세속 군주의 부하에게 폭행당한 이 사건은 중세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했다.
이후 교황청은 혼돈 그 자체였다.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끌려간 '아비뇽 유수'를 거치며,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각 교황이 선출되는 대분열(Great Schism)이 일어났다. 한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 심지어 세 개가 뜨는 일이 벌어졌다. 로마의 교황, 아비뇽의 교황, 그리고 이를 해결하겠다고 피사에서 뽑은 교황까지. 대립교황(Anti-Pope)들이 난립하며 서로가 서로를 "가짜다", "악마의 하수인이다"라며 파문하는 코미디가 펼쳐졌다. 신의 대리인이라 자칭하는 자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동안, 민중들의 신앙심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거짓의 종말, 르네상스의 학자와 나폴레옹
영원할 것 같았던 교황의 권위는 결국 진실 앞에서 무너졌다. 15세기, 인문학자 로렌조 발라가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 천 년간 교황 권력의 근거였던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이 위조되었음을 밝혀냈다. 사기극의 전말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당황한 교황청은 처음에 발라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며 진실을 덮으려 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증거 앞에서 진실을 영원히 가릴 수는 없었다. 결국 16세기 후반, 교황청의 공식 역사학자였던 추기경 체자레 바로니우스(Cesare Baronio)조차 "이 문서는 위조된 것이 맞다"고 공식적으로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거짓된 권위에 최후의 일격을 날린 인물은 근대의 시작을 알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1804년 황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1,000년 전 샤를마뉴처럼 무릎 꿇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손에서 관을 빼앗아 자기 손으로 직접 머리에 썼다. "황제의 권력은 교황(종교)이 아닌, 나 자신의 능력과 국민에게서 나온다." 이로써 중세의 질서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 이유
기독교의 역사는 흑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 문명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지키려 했던 '사회적 가치'가 그들의 과오보다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암흑기라고 불리던 중세 시대, 고대의 지식을 필사하여 후대에 전한 것도, 대학과 병원 시스템을 만든 것도, "신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인권 사상의 씨앗을 뿌린 것도 그들이었다. 결국 문제는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악용한 '인간'에게 있었다.
훌륭했던 초기 교황들의 정신이 사라지고 권력자들이 '탐욕의 와인'을 마시자 교회는 병들었다. 그리고 망국의 황제가 마신 '특권의 와인'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역사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술이든 권력이든,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절제'와 '책임'이 없으면 남는 것은 파멸뿐이라고. 와인은 신이 주신 축복이지만, 그 잔을 어떻게 채우고 비우느냐는 오로지 인간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