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로마의 기본소득이었다

로마의 기본소득에는 와인도 있었다

by 명욱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본소득 - 로마의 안노나

우리는 흔히 로마의 위대함을 이야기할 때, 국경을 넘나들던 무적의 군단이나 천 년을 버틴 단단한 도로, 혹은 콜로세움의 웅장함을 떠올린다. 하지만 술을 공부하는 나의 시선에서 로마가 진정으로 '제국'다웠던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국가가 시민의 음식뿐만이 아닌 술까지 책임지는 시대였다.


2천 년 전,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거대한 규모의 복지 시스템이 로마에서 가동되었다. 바로 '안노나(Annona)'다. 현대 사회가 이제야 뜨겁게 논쟁하고 있는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을 로마는 이미 수백 년간 실현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현금이 아닌 현물, 즉 '빵과 와인'으로 지급했다는 점이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알고 있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것은 국경의 칼날이 아니라, 로마 시내를 가득 메운 수십만 시민들의 '부른 배'와 '적당한 취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THOMAS_COUTURE_-_Los_Romanos_de_la_Decadencia_(Museo_de_Orsay,_1847._Óleo_sobre_lienzo,_472_x_772_cm).jpg 토마 쿠튀르, <타락한 로마인들 (The Romans of the Decadence)>
로마 시민에게만 쥐어진 기본소득 - 안노나

이 거대한 무료 배급 시스템의 시작은 기원전 123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곡물법을 제정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시장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에 곡물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의 성격이 강했지만, 제정(帝政) 시대로 접어들며 이것은 황제의 의무이자 시민의 권리로 굳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혜택이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노나는 오직 '로마 시(Urbs Roma)' 안에 거주하는 '성인 남성 시민권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노예나 외국인, 혹은 이탈리아 지방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림의 떡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약 2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이 혜택을 받았다. 그들은 배급소에 갈 때 나무나 납으로 만든 작은 판을 들고 갔는데, 이것이 바로 '테세라(Tessera)'다. 이 '테세라'는 오늘날의 신용카드이자 신분증이었다. 가난한 로마 시민들에게 이 나무토큰은 목숨보다 소중한 생명줄이자, 자신이 '제국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공짜 빵과 와인을 얻기 위해 제국 전역의 빈민들이 로마로, 로마로 몰려든 것이다. 그 결과 로마는 인구 100만이 넘는 기형적인 거대 도시가 되었고, '안노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잉여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로마는 스스로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블랙홀'이 되어가고 있었다.


로마인에게 와인은 '취향'이 아닌 '생존'

그렇다면 왜 로마는 굳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이들에게 와인까지 퍼주었는가? 단순히 시민들을 기분 좋게 취하게 만들어 통치하기 쉽게 하려는 '우민화 정책'이었을까?


꼭 그렇지않다. 로마 서민들에게 와인은 기호식품이 아니라 '생존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와인은 오염된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는 '보존제'이자 '마스킹(Masking) 수단'이었다. 당시 로마는 100만 명이 밀집한 거대 도시였다. 상하수도 시설이 발달했다고는 하나, 테베레 강물과 공동 우물물은 오염에 취약했다. 물론 와인을 물에 탄다고 해서 완벽하게 살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와인의 산성(Acidity)과 알코올은 물의 부패를 늦추고, 납 수도관 특유의 비릿함이나 물비린내를 가려주었다. 로마인들에게 와인을 섞은 물은 맹물보다 훨씬 안전하고 마시기 편한, 경험적인 생존 음료였다.


둘째, 경제적인 이유다. "물을 끓여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로마 주변의 숲은 이미 황폐해져 땔감 가격이 치솟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서민들에게 물을 끓이기 위해 땔감을 사는 것은 엄청난 사치였다. 실제로 네로 황제는 물을 끓인 뒤 알프스 얼음으로 식힌 '데콕타'를 즐겼는데, 이는 그가 황제였기에 가능한 사치였다. 서민들에게는 돈 들여 불을 때느니, 공짜로 주거나 값싼 와인을 타서 마시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거주지 자체가 화재에 취약했다.


셋째, 에너지원이었다. 하루 종일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와인의 알코올이 주는 칼로리는 즉각적인 에너지원이었다. 즉, 국가는 시민들에게 '마시는 빵'이자 '안전한 식수'를 보급함으로써 제국의 노동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아우렐리아누스, 로마의 식탁에 '풀 코스'를

이러한 생존의 문제를 국가 시스템으로 완벽하게 격상시킨 것이 바로 3세기 후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재위 270~275) 때였다. 군인 출신으로 '세계의 복원자'라 불렸던 그는 무너져가던 제국의 기강을 바로잡는 동시에,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복지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그는 이전까지 지급하던 밀가루 대신, 제빵소에서 갓 구운 '빵'을 지급했다. 땔감이 부족해 밀가루를 받아도 요리하기 힘들었던 서민들의 고충(앞서 말한 연료 문제)을 해결해 준 혁신이었다. 여기에 요리의 풍미를 더할 '소금'과 '올리브유'를 추가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돼지고기(Porcina)'와 '와인'을 배급 품목에 포함시켰다. 기록에 따르면 아우렐리아누스는 겨울철 약 5개월 동안 시민들에게 정기적으로 돼지고기를 배급했다.


빵과 고기, 오일, 그리고 와인. 이것은 단순한 생존 배급이 아니었다. 현대의 레스토랑에서나 볼 법한 완벽한 '마리아주(Mariage)'였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생존'을 넘어 '생활'을 선물했고, 시민들은 한 손엔 테세라를, 다른 한 손엔 와인잔을 들고 황제를 신처럼 칭송했다. 바야흐로 '와인 복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zoGQEfAjaiRWpOmGa4hnroKTNT-t_p1wuS4V7qkPufc.jpg 로마 몬테 테스타치오 (Monte Testaccio) '식민지에서 걷어들인 와인 항아리(암포라)'가 깨져서 산을 이룬 모습. 로마의 와인 복지에 대한 규모를 알 수 있다.
로마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식민지의 피

그렇다면 그 막대한 양의 와인은 어디서 왔을까? 황제나 귀족들은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의 팔레르노 와인이나 그리스의 최고급 와인을 마셨다. 하지만 수십만 서민에게 뿌려지는 안노나 와인은 달라야 했다. 양이 많아야 했고, 가격이 저렴해야 했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 곳이 바로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 속주(지금의 튀니지, 알제리 일대)'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대량 생산된 북아프리카의 포도는 당도가 높고 알코올 도수가 강했다. 비록 섬세한 맛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물의 비린내를 덮고 하루의 노동을 위로받기에는 충분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로마 시민들이 누린 이 풍요는 제국이 식민지를 쥐어짜 낸 결과물이었다. 로마는 북아프리카 속주에 막대한 세금을 매겼는데, 이를 현금뿐만 아니라 현물(와인, 올리브유)로 걷어들였다. 즉, 로마 시민들의 '기본소득'은 식민지인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Ostia)에는 매일같이 식민지의 고혈을 실은 선단이 도착했고, 거대한 항아리(암포라)에 담긴 와인은 테베레 강을 거슬러 로마 심장부로 흘러들어갔다.

Genseric_sacking_rome_456.jpg 카를 브률로프, <로마를 약탈하는 젠세릭 (Genseric Sacking Rome)>
반달족의 침공과 제국의 위기

하지만 이 완벽해 보였던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공급망 의존도'였다. 만약 현대의 기본소득처럼 '현금'을 줬다면, 공급처가 끊겨도 다른 곳에서 사 먹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노나는 국가가 식민지로부터 걷어들여 분배하는 '물류 시스템'이었고, 로마 시민들은 스스로 식량을 구할 생산 능력이 거세된 상태였다.


5세기 중반, 로마 멸망의 결정적인 트리거(Trigger)가 당겨졌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Vandals)이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로 건너간 것이다. 429년, 반달족의 왕 젠세릭은 북아프리카를 휩쓸었고, 439년에는 로마의 곡창지대이자 와인 창고인 카르타고를 함락시켰다.


물론 로마가 멸망한 원인이 오로지 이것 하나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적 혼란, 경제 파탄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북아프리카 상실은 벼랑 끝에 선 제국을 밀어버린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오스티아 항구로 들어오던 배들이 멈췄다. 매일 아침 광장에서 '테세라'를 들고 줄을 서던 시민들 앞에는 빈 창고뿐이었다.


수백 년 동안 국가가 주는 밥과 술에 길들여진 수십만의 시민들. 그들에게 황제는 곧 밥이자 술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식탁이 텅 비어버렸다. 자급자족 능력이 없는 도시 빈민들에게, 안노나 와인 한 잔이 끊겼다는 것은 곧 제국의 시스템이 멈췄음을 의미했다. 배고픔보다 무서운 것은 박탈감이었고, 알코올이 사라진 밤의 정적은 공포였다.


서로마의 멸망

식량과 와인 배급이 중단되자 로마의 인구는 급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도시는 활력을 잃었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때, 사실 로마는 이미 죽어 있었다. 와인과 빵이라는 혈액이 돌지 않는 제국은, 칼을 든 적이 오기도 전에 이미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빵과 와인이 사라진 황무지,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안개 속에서 새로운 권력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와인이 끊기자 제국이 멈췄고, 그 자리에 십자가가 섰다.


PS: 2부로 서로마 멸망 이후에 기독교가 어떻게 서유럽의 헤게모니를 잡았는지 정리할 예정입니다.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서로마 최후의 황제, 최고의 와인 산지로 유배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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