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한명회는 술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랐나?
최근 단종의 비극적인 생애를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화제를 모으며, 조선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주인공들인 세조와 한명회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뜨거워지고 있다. 어린 조카의 왕좌를 빼앗고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의 행보는 역사 속에서 늘 '정당성 없는 권력'의 대명사로 읽힌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적 야욕 뒤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술'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다. 세조는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신하들과 가장 많은 술자리를 가진 '애주가'였고, 한명회는 세조와 비교하면 철저한 '절주가'였다. 그러나 이 상반된 태도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소름 끼치도록 닮은 비극적 결말이었다.
조선 최대의 술자리 주관자는 세조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세조는 조선의 왕들 중 신하들과 가장 빈번하게 술자리를 가진 임금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술자리로 검색하면 973건이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세조 시대의 기록이 무려 467건이나 된다. 거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것으로 명실상부 최고의 술자리 주최자였다.
이는 세조가 단순한 유희를 넘어 술을 통치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세조에게 술자리는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무장을 해제시켜 그들의 본심을 긁어내는 이른바 ‘액체로 된 정치 무대’였다.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그에게 술은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고 신하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 도구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세조의 집요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조선 중기의 야사집인 『소문쇄록(蒐聞瑣錄)』에 전해지는 신숙주와의 ‘팔 꺾기’ 일화다. 세조는 평소 동갑내기였던 신숙주와 술자리에서 팔씨름을 즐기곤 했는데, 어느 날 취기가 오른 신숙주가 왕의 팔을 너무 강하게 비틀어버렸다. 그 순간 '아프다!'라는 세조의 비명이 들려왔다.
순간 연회장의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황급히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귀가 후 세조가 곰곰히 생각하자 신숙주가 무척 괘씸했다. 아무리 친해도 아플 정도로 팔을 비튼다는 것은 나의 권위를 떨어트리던지, 또는 다른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고 싶어서가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는 그의 처소에 밤 늦게 사람을 몰래 보냈다. 만약 신숙주가 평소 습관처럼 새벽에 책을 읽고 있다면 이는 왕을 우롱한 뒤에도 태연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도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신숙주의 목숨이 걸릴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숙주는 살 수 있었다. 바로 싸 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한명회가 미리 신숙주의 집을 찾아가 식솔들에게 등불을 끄고 책을 치우게 한 덕분에, 신숙주는 잠을 잘 수 밖에 없었고, 목숨을 부지했다는 이야기다.
세조의 술자리는 때로 왕의 넓은 도량을 과시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야사가 아닌 『세조실록』 4년(1458)의 기록이다. 집현전 학자이자 원로였던 정인지가 술기운에 세조를 향해 흔히 말하는 야자타임을 시연한 것. 즉 ‘너(汝)’라고 부르는 대역죄에 가까운 실수를 저지른 사건이 등장한다. 신하들은 즉각 엄벌을 주장하며 상소를 올렸지만, 세조는 이를 의외로 너그럽게 넘겼다. 이는 세조가 정인지를 아껴서라기보다는, 이미 권력의 정점에 선 자신에게 세력이 약해진 늙은 학자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즉, 정인지는 세조의 관용을 대내외에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소품’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술자리에서의 실언이 모든 이에게 용납된 것은 아니었다. 계유정난의 공신이자 행동대장이었던 양정의 사례다. 세조 12년(1466), 세조는 평안도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양정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날 흔히 말하는 진실게임을 했는지 양정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만다. 바로 왕을 그만해라, 직역하자면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라는 내용이었다.
권력은 부모자식간에도 나눌 수 없는 법. 결국 세조를 위해 피를 묻혔던 행동대장 양정은 이 발언이 있은 지 불과 4일 만에 처형당했다. 사냥이 끝나면 삶아서 먹어버린다는 사냥개의 운명을 뜻하는 ‘토사구팽’의 비정한 논리가 술자리에서 완성된 것이다.
절주가 한명회의 처신
세조의 수족이었던 한명회는 세조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당시 지략가로서의 한명회를 묘사한 여러 기록을 보면, 그는 남들이 술에 취해 방심할 때 홀로 깨어 정국을 살폈던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 그는 세조의 파격적인 술자리 정치를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결코 취기에 휘말리지 않는 철저한 자기 통제력을 보여주었다." 즉 세조에 비해 절주가로 지낸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세조가 베푸는 광란의 술자리에서도 그는 정신줄을 놓지 않았고, 남들이 숙취에 시달릴 때 인사권을 주무르며 권력의 기반을 다졌다. 어쩌면 그는 술자리를 이용한 세조의 정치 게임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을른지 모른다.
압구정에서 실수한 한명회
그러나 술을 멀리했던 그조차도 ‘권력’이라는 이름의 독주에는 결국 취하고 말았다. 그의 오만이 극에 달한 사건은 세조가 죽고, 그의 손자인 성종이 집권했을 때다. 그는 성종 7년에 경기도 광주목 언주면 상북리(京畿道 廣州牧 彦州面 上北里)에 정자를 하나 세운다.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의미로 정자 이름을 짓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압구정(狎鷗亭)이다. 문제는 그가 이 압구정으로 왕권에 선을 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12년(1481)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정자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성종에게 왕의 전용 물품인 ‘용차(龍遮, 해 가리개)’를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용차는 오직 왕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 이는 신하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무례였다. 이 사건으로 한명회는 파직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술을 마시지 않아 실수는 피했을지언정, 권력에 취해 세상을 발아래 두려 했던 그 역시 오만의 취함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말년
단종을 죽이고 피로 세운 권력의 끝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었다. 세조는 말년에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피부병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조선 후기의 야사집인 『연려실기술』 따르면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그의 몸에 침을 뱉었고, 그 자리에 종기가 돋았다고 이야기한다. 일부 학자들은 세조의 피부병이 한센병이였을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뼈아픈 것은 자식들의 죽음이었다. 장남 의경세자가 1457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뒤를 이은 예종 역시 1469년 즉위 1년 만에 승하했다. 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낚으려 했던 왕은, 정작 자신의 가장 소중한 핏줄이 끊어지는 비극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한명회의 결말은 죽어서 더욱 처참했다. 살아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한명회는 사후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대에 이르러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의 목이 베이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평생 술을 절제하며 맑은 정신으로 타인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지략가는, 죽어서 자신의 유골조차 지키지 못하고 길바닥에 뿌려지는 치욕을 맛보았다.
술을 좋아하던 세조와 절주가였던 한명회. 술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친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그들의 행적은 이번 영화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계속 회자되며 비난 받을 것이다.
이것이 세종대왕의 친손자이자 적통이었던 단종 이홍위의 마지막 어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