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의 중심이 단전까지 내려오면서
몸은 스스로 조율되고
마음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호흡을 통해 흐르는 숨은
이내 단전에서 기로 화한다.
몸과 마음 전체가
하나로 정리된다.
호흡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단전이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몸과 마음
나와 세계
나와 우주는 본래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
그 근본을 이루는 것
우리가 흔히 나누어 이해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나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
기는 언제나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너와 나
내 것과 네 것
우리 땅과 너희 땅
구분을 좋아하는 사람들.
왜일까?
막연한 두려움 때문 아닐까.
모를 때 두려움이 생기고
다룰 수 없다고 느낄 때 그 두려움은 더 커진다.
내 것이 되면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알 수 있는 영역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확신이 생기면 긴장은 풀린다.
미지의 세계를 알기 위해
사람들은 이름을 붙여 정의한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하나였던 모든 것들은 분리되고 단절된다.
노자는 말했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더 이상 본래의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존재의 의미가 달라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중에 나타난 존재가
이미 있던 세계를 이해하려면
정의하고
이름 짓고
나눌 수밖에 없었다.
기 또한 예외는 아니다.
따뜻하면 온기라 했고
차가우면 냉기라 이름 붙였다.
더 깊어지면
열기와 한기로 다시 나누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생기
힘들게 만들면 사기
자기를 중심에 두고 구분하였다.
기는 언제나 하나였지만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느낌을 중심으로 기를 나누었다.
모든 일은 우주 안에서 일어난다.
우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
잘났든 못났든
그 안에서 변화한다.
아무리 부모가 못나고
자식이 문제를 일으켜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인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기의 바깥이 있다.
이미 안과 밖
자기와 환경의 구분이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으므로.
그러한 어쩔 수 없음을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선각자들이다.
원래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고
우주와 나는 본래 하나라고.
기를 이해하려면
나누어진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미 나누어진 퍼즐을 맞추기는 어렵다.
적어도 맞추어진 퍼즐을 보고 난 후에라야 조립할 수 있다.
기는 언제나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역할과 상태에 따라 나누어 표현하더라도
본래 하나라는 것은 잊지 않아야 한다.